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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요약

yt1981 2023. 10. 1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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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1 - Abraham Kuruvilla, A Vision for Preaching ; 곽철호, 김석근 역, 『설교의 비전』 (경기 이천: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18)

 

1. 설교는 성경적인 것이다. Preaching is biblic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성경의 고전적 본성 ① 성경은 영속적이다. Œ 성경이란 책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그 영속적 특성을 충분히 입증해 왔는데, 성경이 모 든 세대의 하나님 백성 모든 이에게 계속 설교 돼 유익을 주었고, 그 유익이 많은 사 람, 심지어 원래의 사건이나 기록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 을 미쳤기 때문이다. (38)  성경은 스스로 영속적임을 드러내는데, 즉 모든 시대와 상황을 직접 긴급하게 다룸으 로써 모든 새로운 세대에 그것의 적절하고 중요함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38) Ž 성경이 시간의 경계를 벗어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주변 안에 있다는 말 이다. (38) ② 성경은 중대하다. Œ 성경이 그 주인공인 하나님에 관한 사안들과 그분이 인류와 가진 관계를 다루기 때문 에, 사실상 성경은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이슈들을 다룬다. (39)  성경 전체만이 아니라 성서를 구성하는 개개의 본문들(texts)과 문단들(pericopes) 또 한 중요하다. (39) ③ 성경은 구속력이 있다. Œ 성경의 구속력은 신적 성명으로 스스로 보는 해석의 결과로서, 그것이 교회의 믿음과 행위에 있어 권위를 가지게 한다. (42)  설교에 적실성을 갖는, 정경의 구속력의 또 하나의 결과는, ‘성서’로 용납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이다. … 정경은 이 특정한 텍스트들에 구속하는 권위를 부여한다. (44) “성경이 영속하고 중대하며 구속력이 있으므로, 그것은 설교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경만이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조정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적용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하고 유능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책무는 똑같이 중대한데, 왜냐하면 성경이 영속적이고 중대하며 구속력이 있기 때문이다. 곧 설교는 완전히 그리고 독점적으로 성경적이어야만 한다.” (47)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2 - 2. 설교는 목회적인 것이다. Preaching is pastor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설교자 과업의 목회적 특성 ① 왜 목회 지도자의 과업이 설교하는 것인가? 성경의 규칙적 강해가 목양 과업의 한 부분 이기 때문에, 설교 사역은 회중을 목양 임무를 받은 사람이 맡는다. 설교와 목양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 말씀 강해와 하나님 백성 목양 사이에 분리가 있을 수 없다. (61) ② [설교자의] 기저에는 자기 양 떼를 위한 목회적 애정과 관심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설교 자의 열정을 이끄는 발전기이다. (63) ③ 칼 바르트(Karl Barth), “설교자들은 자신의 회중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 이 사랑이 없다면, 사람이나 천사의 혀로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63) 2) 설교자의 직무에 대한 목회적 약속 ① 설교자는 양 떼를 목양하는 사람이자 지속해서 사람들과 그들 삶에 연관된 사람이어야 한다. (64) ② 설교자로서 공동체 모임에서 공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반드시 공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65) 3) 설교자 삶의 목회적 속성 ① 설교를 위해서 안수받은 사람의 인격은 그 효과와 영향력에서 말씀 사약에 결정적이다. (77) ② 목사이자 설교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설교라는 일을 기도하며 전능자에게 의탁하면서, 설교 준비와 전달, 그리고 진정 삶의 모든 측면에서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영성의 모범이 되 어야 한다. (77) “성서의 강해는 목양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고, 목회의 과업은 설교의 책임과 분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그리고 모본으로 변화된 삶들, 공적 선포로 그리고 사적 상담으로 변화한 삶들, 이 의무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목회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도록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안수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설교의 과업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서 은사를 받고 자격을갖춘 것으로 지역 교회에서 승인받는 것이다. … 설교자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과 영성을 나타내면서 이 위엄 있는 소명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설교의 모든 노력이 헛된데,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은 설교자가 한 말은 물론이고 설교자가 사는 삶에 따라 변화되기 때문이다.” (79)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3 - 3. 설교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Preaching is ecclesi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성경 역사에서 설교 ① 설교-구약의 예전 사건 Œ 예전을 위한 집회 상황에서 토라 읽기와 해석(느 7:73-8:12) (89)  모임(assembly)은 구약에서 하나님 존전에 이스라엘 회중이 모이는 것을 묘사할 때 가장 흔히 쓰인 단어다. … 그런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위한 우선적인 상황을 작용한다. (90) ② 설교-신약과 초대 교회의 예전적 사건 Œ 신약성서에는 성경 ‘읽기’가 거의 항상 그것에 대한 해석(설교)과 연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위해 공식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다(행 13:14-5). (91)  신약 교회는 눈에 띄게 예전의 행습에서 빌려온 은유, 특히 희생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롬 12:1). … 말씀의 사역 역시 희생 제사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93) 2) 설교-성례적 행위 ① 주의 만찬과 설교의 유사성에 주목하라(고전 11:26, 골 1:28). 둘 다 그리스도를 선포하 는 것으로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그 외에도 둘 다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중재 활동이 필요하다. (95) ② 성경 역사와 그 이후 계속, 설교(하나님 말씀의 사역)는 예배의 예전에 확고하게 뿌리박 고 있으며 다른 의식들과 함께 성례적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인다. (97) 3) 설교와 주의 만찬에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 ① 설교와 주의 만찬이라는 성례적 행위들 간의 유사성의 한 측면은 양편 모두에 있는 그리 스도의 임재이다. (99) ② 설교와 주의 만찬의 목적(그리고 결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교제이다. (102) ③ 설교는 어떻게 구조를 잡아야 하는가? 어떤 예화가 효과적인가? 어떤 종류의 서론이 필 요한가? 아마도 지금은 그 사건에서, 그것이 주의 만찬이든 설교든, 정확히 무엇이 일어 나는지 주의를 기울일 때다. 이 두 가지 성례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신다는 것이다-그분이 정말로 현존하신다! (103) “역사적으로 교회의 삶을 통해 말씀과 성례는 불가분 짝지어져 왔다. 나는 주의 만찬과 같이 성경의 설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을 통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로 특징지워진다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만난다. 그런 만남의 이상적인 자리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인 예배며, 거기에서 구주의 임재는 가장 예리하게 느껴진다.” (105)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4 - 4. 설교는 소통을 위한 것이다. Preaching is communication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설교: 성경을 소통하기 ① 느헤미야 8장에 나오는 성경 읽기는 고대의 글과 포로 후기 독자들 사이에 유사한 의사 소통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가 필요했다. (112) ② 설교는 그 근본에서부터 소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라 틴어 communicare에서 나왔는데, 이는 comminis, 즉 ‘공통적’(common)에서 유래하 였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은 화자와 청자 사이에, 그리고 저자와 독자들 사이에 공통적으 로 의미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설교가 의사소통적이어야 한다면, 설교자의 머릿 속에 있는 것이 회중들의 머릿속에도 복제되어야-신호 대 잡음비가 있으므로, 가능한 최 대로-한다. (114) 2) 새로운 형태의 수사(rhetoric) ① 인간 저자는 더는 생존하지 않으며, 독자들은 해당 본문이 만들어진 때에서부터 멀리 떨 어져 있다. 그런데도 성경은 고유한 담화이기 때문에, 그 저작의 환경에서부터 시공간적 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새로운 장소들에서도 그 스스로 적용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새로 운 독해 환경에서 성경을 사용한다면, 해당 본문의 핵심-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반드시 발견해 전달해야 한다. 이것이 말씀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중재자인 설교자의 역할이다. (117) 3) 되돌아보기: 논쟁들과 요점들 ① 14세기 베이스본의 로베르토(Robert de Basevorn), 삼대지 설교: 대지들(그리고 근거들 이나 명제들) 사용은 설교를 무엇보다도 논증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반영하는데, 이는 아 마도 청중들에게 교리의 올바름과 이단의 문제점을 확증시키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여 겼던 초대교회의 설교가 남긴 흔적일 것이다. (118) ② 종교개혁 기간: 논증으로서 설교가 관례(rule)로 자리 잡았는데,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회 에 대항하는 개혁가들의 논박에 완벽하게 적절했기 때문이다. (118) ③ 17세기 후반-18세기 계몽주의: 합리적인 설교학은 연구를 위해 하나의 대상을 따로 나 누는 과학적 절차를 그대로 흉내 낸 것처럼 보인다. (119) ④ 옛 설교의 작동 방식은 본문을 분쇄기에 넣은 다음, 그 기계에서 나온 가루가 된 명제화 된 결과물을 설교하는 것이다. (120) ⑤ 20세기 후반 언어철학의 발달: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 이해가 상당히 발전했다. … 특정 의사소통은 의사소통되는 내용과 함께 어떠한 것을 수행하는(doing) 의사소통 행위자로 서 점점 인식된다. (120) 4) 앞을 향해 보기: 화용론과 저자가 수행하는 것들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5 - ① 의사소통을 사건으로 연구하는 화용론은 저자/화자가 자신들이 저술/발화하는 것과 함 께 수행하는 것을 다룬다. 의사소통 사건에서, 저자에 의하여 전달되는 것이 발화의 화 용론인데, 이는 그들이 저술하는 핵심이며, 자신들이 말하는 내용과 함께 그들이 수행하 는 것이다. (121) ② 다시 말해, 저자가 말하는 바(담화의 의미론)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 리는 또한 저자가 말하는 내용과 함께 수행하는 것(담화의 화용론)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122) 5) ‘옛’ 그리고 ‘새로운’ 설교학: 설교의 모양을 갖추기 ① ‘옛’ 설교학: 설교 구성하기 Œ 옛 설교학에서 논증이 가지는 특징적인 성격은 대지(point)였다. … 그것은 어떤 종류 의 합리적인 객관화를 암시하는데, 이는 어떠한 것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가리키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125)  여기에서 설교는 “교훈적 도구들”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는데, 이는 본문들과 이 본문 들(혹은 이 본문들의 저자들)이 ‘수행’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청중들로 하여 금 이 명제들을 믿도록 설득하는 논증들에 관한 것이다. (125) Ž 이 모든 것들은 심지어 일단 본문에서 증류한 것-다시 말해서, 본문을 하나 혹은 몇 가지의 명제들로 환원한 것-을 얻기만 하면, 그다음에 본문 그 자체를 버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암시한다. (126)  이러한 명제들과 대지들은 그 본성상 활기가 없으며, 결과적으로 정적이고 복잡하며 따분한 설교를 만든다. … 이 설교 접근은 매우 단조롭고 매우 일방적인데, 그들 스스 로 그 어떠한 발전도 하지 못하는 불우한 청중에게 설교자가 억지로 끼워 맞춘 결론 을 제시할 뿐이다. (127)  이러한 자연스럽지 않은 작업은 오히려 본문에서 그 힘을 앗아갔는데, 그 이유는 전달 되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본문의 핵심/화용론)이 아니라 설교자의 주장이기 때문이 다. (128) ② ‘새로운’ 설교학: 설교 플롯 짜기 Œ 옛 설교가 지지한, 사상들에 대한 공간적 구조 계획(개요)에 연관되기보다는, 새로운 설교는 오히려 사건(서사, plot)에 더 많이 연관되어야 한다고 유진 로우리(Eugene Lowry)는 주장한다. (129)  설교는 논증이라기보다는 예술로, 정적인 회화보다는 역동적인 이야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교에 플롯이 있어야, 이야기체나 이야기와 같은 형태가 되어, 공간에서 질서정 연한 구조(공학적 현상)로 굳어지기보다는 시간에서 유기적 발전(생물학적 현상)을 진 행한다. 설교 그 자체가 이야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성경의 단락이 가지고 있는 플롯-저자가 수행하고 있던 것-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129) Ž 설교자의 목표는 설교하는 본문의 핵심을 이해하게 촉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왜냐하 면 오직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합당하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9)  설교자 자신이 미리 씹어서 소화를 돕게 만든 음식을 제공하기 보다는, 본문을 연구하 며 느낀 동일한 결정적 순간과 환희를 청중들이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것, 그래서 그들 이 설교자가 그러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본문을 보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본문의 핵심을 파악하도록 해주는 것이 목표이다. (130)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6 -  여기에서 본문에 대한 환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본문의 핵심은 본문들을 대지들과 명 제들로 증류한 것이 아니다. 대신, 설교자는 환원할 수 없는 전체로서 본문이 가지는 핵심을 발견하기를(그리고 청중들이 재발견하기를) 추구한다. (131) ‘ 데이비드 버트릭(David Buttrick): 새로운 설교학에서 설교를 이야기체 형식으로 만들 려는 시도로, 일련의 움직임(옛 설교의 대지들에 대한 반대로서)으로 설교 구성을 요청 한다: ‘사상 진술’로 시작하는 문단들은 그 발전으로 나아가 ‘사상 재진술’로 끝마친다. (131) ’ 그러나, 이 방식은 설교학을 다시 ‘옛’ 스타일로 되돌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기서 각각 증류된 ‘대지’는 다음 ‘대지’로 전환되기 전까지, 진술되고, 발전되는 하나의 주제(a topic)가 된다. (131) “ 다시 말해, 심지어 새로운 설교가 제안하는 설교도, 본문에서 나와서 설교자를 통해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중심 사상-분명 위장하고 있어서, 설교 내에서 ‘움직임’으로 분산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본문을 증류한 것-인 것처럼 보인다. (131) ” 그러므로 마지막 분석으로, 비록 새로운 설교학자들이 훌륭한 진단 전문가들이며 옛 설 교의 병폐를 잘 지적했어도, 그들이 자신들 치료학으로 ‘대지/포인트’라고 쓴 약-그것 들을 ‘움직임’이라고 부름으로써 다소 달콤하게 된-을 계속해서 처방한다. (132) ③ “새로운” 설교학: 큐레이터 그리고 증인 Œ 각각의 본문은 하나의 그림이며, 설교자는 큐레이터이다. 그리고 설교는 회중, 즉 미술 관 방문객에게 본문-그림과 그 핵심을 안내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명제들을 정당화시 키려는 논증이라기보다는 본문의 핵심을 표현함이다. (132)  토마스 롱(Thomas Long): 설교자는 본문에 대한 목격자이자 본문에 대한 증언자이 다. 증인-설교자는 봤으며 경험했으며 목도하고 경험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133) Ž 설교자는 신뢰할 만한데, 이는 그 지위나 직책 혹은 위상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바를 듣기 위하여 나아가서, 그 녀 혹은 그가 거기서 들었던 것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할 때, 그녀 혹은 그가 보고 듣고 연구하고 경험한 바로 그것 때문이다. (133)  본문의 핵심은 처음에는 설교자가, 그다음에는 선포되는 설교를 듣는 사람이 이해한 다. (133) “성경의 본문성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할 것이 바로 본문의 핵심 요지임을 강조한다. … 명제식 옛 접근이 가졌던 부족한 부분들을 인식한 새로운 설교에 발맞추어, 이제 요구되는 것은 본문의 화용론을 발견하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강단에서 청중들의 유익을 위하여 재발견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그림에 대한 큐레이터, 혹은 본문에 대한 증인이며, 그 핵심적 역할은 본문 안에서 수행되는 것을 지적해내고 그 핵심 요지가 모든 힘과 영향력, 그리고 파토스를 가진 채로 청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134)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7 - 5. 설교는 신학적인 것이다. Preaching is theologic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문단과 본문 앞의 세계 ① 문단은 단순히 장르나 크기와 상관없는 하나의 설교 본문이다. (143) ② 설교의 목표는 단순히 선택된 본문에 포함된 지식적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 가진 변화시키는 함축된 의미를 청중이 절실히 깨닫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143) ③ 본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 초월적 비전을 투사하는 저 자의 행위를 위한 문학적 도구이다. (144) Œ 폴 리쾨르(Paul Ricoeur): 이 초월적인 비전을 본문 앞의 세계라고 부른다. (144)  본문은 세계를 투사하는 행위의 도구나 대리자의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본문의 투 사된 세계는 미래 적용을 가능하게 한다. (145) ④ 성경 Œ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미래에 적용하길 바라기에,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그것의 언 어학적, 문법적, 구문론적 요소(그것의 의미론)를 밝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본 문 앞의 세계-본문의 요지, 그것의 화용론, 저자가 수행하는 것-을 분별하려고 더 진 행돼야 한다. 이 투사된 세계는 본문과 적용 사이의 매개를 형성하며, 사람이 그 본문 에 효과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한다. 본문을 바르게 적용할 때, 독자는 효과적으로 그 것이 투사하는 세계에 거주한다. (145)  성경의 정경은 전체로서 본문 앞의 세계를 투사한다. 그것은 각 문단이 각 부분을 묘 사하는 하나님의 이상적 세계이다. 그러한 모든 부분이 함께 모인 통합된 혼합물은 하 나님의 이상적 본문 앞의 세계에 정경적 투사를 완성한다. (147) Ž 따라서 특정 문단 각각의 설교는 인간이 그 문단의 요지-그 문단의 세계 구역에서 요 구되는바, 하나님의 이상적 세계의 요구-를 따름으로써 그분의 이상적 세계에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147)  그런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점진적으로, 점차로 그의 이상적 세계에 거하며 그것의 교훈, 우선순위, 실천을 따른다. 한 번에 한 문단씩, 그리스도인의 개인 적이며 연합적인 삶의 다양한 측면이 점차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일 치한다. 하나님의 세계는 실체가 된다. 이것이 설교의 목표이다. (148) 2) 문단의 신학 ① 본문의 요지는 하나님의 이상적 세계에서 사물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한다. (148) ② 문단의 신학은 특정 문단이 가리키는 구체적 신학이며, 그의 백성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정격적 본문 앞의 완전한 세계의 한 부분을 나타낸다. 문단의 신학은 본문에서 적용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중재 역할을 한다. (149) ③ 신학적 해석학의 신학은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이 아닌 문단의 신학이다. (150)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8 - Œ 조직신학: 한 본문에서부터 연역적으로 결론을 도출해 그것을 다른 본문들의 연역적 결론과 통합하여 그것들 모두를 다양한 신학적 범주에 배속한다. (150)  문단의 신학: 좀 더 귀납적으로 유추되며 한 문단의 항목들에 의해 제한된다. (150) Ž 성경신학: 문단의 신학이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역사 연표를 강조하면서 정경 전체에서 폭넓은 신학적 주제들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정 경의 큰 그림들은 문단의 작은 축소형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151) ④ 설교 과업의 이중적 측면 (152) Œ 문단의 신학을 강해하는 일(본문에서 문단의 신학으로 움직임)  어떻게 문단의 신학이 실제 삶에 적용되는지 발견하는 일(문단의 신학에서 적용으로 움직임) 2) 신학적 석의 대 전통적 석의 ① 필요한 것은 본문의 요지, 즉 저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무엇을 수행하는지를 파악하 는 일이며, 투사된 세계, 즉 문단의 신학을 이해하는 일이다. (157) ② 초상화와 캐리커쳐 Œ 초상화: 화가는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캔버스 위에 형상으로 옮 기려고 한다. (159)  캐리커쳐: 화가는 견본을 뽑는다. 마찬가지로 본문(내러티브)은 캐리커쳐에 가깝다. 모 든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 의제가 이끄는 이야기 전개는 저자의 의제를 진전시키는 측면만을 강조한다. (159) ③ 옛 설교는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세히 읽는 것을 옹호하기 보다 본문을 곧바로 통과 해, 묘사된 사건 자체를 본다. … 하지만 본문 자체보다 본문 뒤의 사건에 집중함으로써 본문의 신학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160) ④ 본문이 특권을 얻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본문은 독자가 통해서 보는 평 유리 창문이 아니다(옛 설교에서 전통적 석의). 오히려 내러티브는 독자가 그것 자체를 보는 스테인글 라스 창문이다(새로운 설교에서 신학적 석의). … 다른 모든 것들은 특정 이야기를 말하 기 위해 적절한 효과를 내도록 신중하게 계획된다. (161) “설교 본문인 한 문단은 저자가 하는 일의 도구이다. 각 문단은 하나님의 이상적 세계의 한 구획을 투사하며, 모든 성경 문단들의 모든 구획이 모여서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초월적 비전을 만들어낸다. … 따라서 한 문단 한 문단, 한 주 한 주 하나님의 백성이 그 세계의 교훈과 우선순위와 실행을 따를 때, 그들은 점진적으로 점점 더 하나님의 이상적인 세계에 거주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요구에 맞추며, 언약 갱신이 일어난다.” (162)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9 - 6. 설교는 적용을 위한 것이다. Preaching is application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적용의 필요성 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신학적 요지를 설명하는 일이며 또한 그 메시지가 실제 로 필요한, 실제의 삶을 사는 실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적용하는 일이다. (171) ② 성경 문단은 지식을 전하는 것(informing) 이상이다. 그것은 또한 변화시킨다 (transforming). 그것이 가진 신학적 요지(문단의 신학)를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을 하나님의 뜻에다 일치시키며, 그들이 본문 앞에 있는 세계의 교훈, 우선순위, 실천을 채택함으로써 그 세계에 살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용은, 실행헤 옮긴 문단 의 신학이다. (173) 2) 적용의 구체화 ① 설교 과정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문단의 신학을 강해하는 것과 어떻게 그 신학이 실 제 삶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174) ② 설교의 두 번째 단계인 ‘신학에서 적용으로’에서, 본문의 요지는 청중의 상황과 환경에 놓인다. 이것은 성경 본문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가치를 유지하며 각 세대의 독자와 지속해 연관되는 방식이다. (175) ③ 구체성이 적용의 본질이라면 설교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구체적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창의적이며 구체적이며 흥미를 돋우는 방법 말이다. … 매주 창의적이고 구체적이며 흥 미를 돋우는 적용을 찾아내는 일은 설교자가 가진 모든 목회적인 민감성, 분별, 지혜를 요구한다. 그것은 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계발된다. (179) ④ 특정 적용을 찾는 일에 진전이 없을 때 자신에게 먼저 “내가 설교하는 이 문단의 신학에 반응하여 나 자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본문이 요구하는 것의 결과로 서 구체적으로 나 자신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한다. 결국 설교자 자신의 삶은 그들이 설교하는 설교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180) 3) 적용의 다양성 ① 성경의 문단의 신학은 무한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181) ② 그러한 가능성 있는 적용의 다양성에 관한 개념은 성경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이것은 기 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의 경계를 초월하고 특정 세대 독자의 필요 너머로 갈 수 있 게 한다. (181) 4) 관계는 의무를 앞선다. ① 청중이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호소하는 설교는 칭의 지향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화 지향적인 것으로서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10 - (184) ②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항상 의무가 뒤따른다. (184) ③ 순종은 그분이 앞서 행하신 은혜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반응이다. 관계는 의무를 앞선 다. (185) ④ 성경의 각 문단의 역할은 하나님의 그러한 계명(하나님의 요구)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 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그것을 지키고 그들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듯 거룩하게 되는 것 이다. 따라서 문단의 신학은 거룩함을 향한 본문의 방향을 제공하며, 설교의 두 번째 단 계에서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신학을 그들의 삶의 구체적인 환경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185) “설교자의 의무는 적용의 구체화에서 계속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본문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세계의 가르침과 우선순위와 실행에 자신을 맞추게 한다. 따라서 적용은 설교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며, 그러한 삶의 변화는 설교의 목표이다. … 관계는 의무를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뜻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상적 세계와 교훈과 우선순위와 실천에 거함으로써 그 세계에서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188)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11 - 7. 설교는 변화를 위한 것이다. Preaching is conformation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투사된 세계와 그리스도의 형상 ① 오직 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신 상태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이분이, 그리고 이분만이 완전하게 본문 앞의 세계에 거하시 며, 그 모든 교훈과 우선순위와 실천에 따라 사셨다고 말할 수 있다. (196) ② 온전히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은 성경의 모든 문단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 을 의미한다. (196) ③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한다. (197) ④ 설교는 변화를 위한 것이다. 성경의 요구를 강해함으로써 설교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 님의 아들 형상을 본받도록 촉진하기 때문이다. (197) 2) 설교를 위한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학 ① 나는 성경이 한 문단 한 문단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대한 신학적 묘사를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면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199) ② 설교를 목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일은 정경에 의해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 는 이러한 기초와 일치해야 한다. 각 성경 문단은 사람이 본받아야 하는 정경의 그리스 도의 형상의 한 측면을 묘사하므로, 나는 설교를 위한 이 해석 모델에 “그리스도적 해 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3) 그리스도 형상적 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①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모든 구절, 구약 문단에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찾는다. (203) ②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 하나님의 정경적 목적에 맞추어 모든 문단에서 그리스도를 본받 는 것에 관한 암시적 묘사를 발견하는 것이다. (203) 4) 설교는 삼위일체적이다. ①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는 개념과 기능에서 삼위일체적이다. 설교 과정을 형성하는 세 가 지 실체-본문, 문단의 신학, 적용- 각각은 삼위일체의 인격과 연결되며 설교라는 노력 전체가 삼위일체적이 되게 한다. (207) “각 문단은 그리스도의 모습의 일면을 묘사하며, 모든 성경 문단에서 이러한 일면 모두를 종합하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러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 …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학으로 설교할 때 성령의 영감으로 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삶이 되며, 아버지의 뜻은 성취되고, 그의 나라는 임할 것이다.” (212)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12 - 8.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Preaching is doxologic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만물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 ① 삶의 모든 것, 참으로 창조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미한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 의 영광이다. (220) ② 찬미 초점은 설교에서도 유지해야 한다. (220) ③ 설교를 통해, 그리고 설교가 성취하려고 하는 모든 것에 의해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그분이 영화로우시다고 선포되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는 찬미의 연설이다. (223) 2) 설교의 목표: 생각과 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①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생각과 말로 직접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 님의 말씀이 해설될 때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과 목소리로 예배함으로써 반응한다. (226) 3) 설교의 목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① 설교라는 매개를 통해 신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이상적인 세계의 교훈과 우선순위와 실천에 맞춘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따른다. (228) ②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삶에서 그것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 이다. (228) 4) 인간의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① 복종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인도한 이전의 은혜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반응 이다. 관계는 의무를 앞선다. 그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229) ②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정 방식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 다. (231) ③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러한 순종의 의무는 그의 행위와 그의 속성을 높임으로써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23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각 본문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형상이 예배를 위해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에서 나타나고 그들의 마음과 목소리로 반응하면서, 생각과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신다.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면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설교에서 영화롭게 되신다. … 성화를 위해 그가 은혜로 능력 주심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으로만 성취된다.” (238)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 13 - 9. 설교는 영적인 것이다. Preaching is spiritual. 성경적 설교란, 교회지도자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신학적 석의로 분별 한 성경 문단(pericope)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그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적용한 내 용을 전달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모 든 과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대변인 ① 사람은 생활 방식에서 도덕적인 개선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도달하게 하셨을 이상적인 상태,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며 완전히 그리스도의 형 상을 본받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 인간의 계획으로 성취될 수 없다. (248) 2) 성령 그리고 설교자 ① 설교의 동력이 성령의 능력이라면, 설교자는 자신의 능력 없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설교 의 준비부터 전달까지 모든 과정에서 의식적이며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을 의 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252) ② 주관적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며 설교의 사역에서 결과를 만들어내시지만, 설교자 의 부지런하고 신실한 설교의 일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삶에서 인간 적 의무가 분명히 있다. (253) 3) 설교자의 본보기 ① 설명된 각 문단의 하나님의 요구는 설교자의 삶에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 (258) ②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받는 첫 번째 사람이어야 한다. 목자와 양 떼는 모두 같은 제자도 여행을 한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258) 4) 목사의 훈련 ① 설교자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하나가 있다. 기도이다. (261) ② 사역에서 매일 해야 할 일들 속에 파묻혀 살기 쉽다. 심지어 설교의 전략과 기술에 질식 당하고, 문법과 주석에 파묻히고, 예화와 두운법의 수렁에 빠지며, 유인물과 개요의 덫에 걸리고, 눈부신 슬라이드쇼와 동영상 자료에 현혹당하기가 더 쉽다. 이 모든 것이 유용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일 가운데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태도가 개발되어야 하며, 그것이 다른 모든 행위와 일에 영향을 미치게 해야 한다. (262) ③ 하늘의 아버지를 향하는 지속적 방향 감각이다. (264) “준비에서 전달까지 설교의 모든 측면은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 설교에서 설교자가 맡은 일의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노력의 성공을 위해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이는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러한 의존은 말씀에 대한 설교자의 헌신에서 표현된다. 그것을 배우고 그것에 의해 사는 것이며, 그리하여 양 떼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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