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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행전 20:13-24

yt1981 2023. 8. 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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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로아에서 고별설교를 한 사도 바울은 일행과 앗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행을 배에 태워 앞서 보낸 뒤, 자신은 홀로 도보로 앗소로 향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도보로 걸어갔는지 본문에 그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교제를 나누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껏 복음을 전하는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에게 홀로 있을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룻길이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가운데 사명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시간은 바울에게만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많은 사람 중의 일부분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이런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분주할수록 따로 시간을 내어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도 합당한 존재로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따로 시간을 내어서 홀로 있는 시간,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2.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일정을 계획대로 하기 위해 매우 힘썼습니다.
16절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은 항상 계획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했습니다.
그러했기에 2차 선교여행에서 아시아의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 선교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뜻에 자신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미루었던 아시아 선교를 3차 전도여행에서 이루어 냅니다.

이렇듯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도 분명한 자기계획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유언에 자기가 달려가야 할 길을 다 달려갔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계획 없이 살아온 사람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달려가야 할 길을 다 달려갔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도 분명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눅 13:32,33).
그러하셨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였는데, 어찌 우리가 모든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고 하면서 계획 없이 살고, 규모 없이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고전 3: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획하기를 원하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토마스 아캠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인간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믿음으로 추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시고, 또 그 길이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수정해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도와주시고 무엇을 수정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삶의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계획을 세우되, 되는 대로 막연히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세우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달려가야 할 삶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고 믿음과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달란트를 찾고 그 달란트를 통해 삶을 아름답게 수놓는 지혜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이어지는 말씀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한 바울의 고별사입니다(18-35).
그는 이 고별사에서 지난날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결론적으로 “여러분도 아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8절).
자신이 에베소에서 행했던 모든 일은 그 어느 것도 숨길 것 없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별다른 변명이나 설명을 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첫날부터 항상” 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교회가 놀랍게 부흥했지만 자신은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와 조금도 변함없이 그들 앞에서 섰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다운 면모와 자신에 찬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목회자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시대의 목회자들의 삶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교회활동을 제외하고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삶을 공유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화할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대형 교회일수록 성도들은 평소에 목회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담임목사의 전화번호나 집 주소까지 비밀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단지 말로써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목회자의 삶을 통해 복음을 배울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은 단지 말로써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성도들도 함께 삶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은 꺼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삶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성도가 되기 원한다면, 우리의 삶이 누구에게 공개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투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사도 바울처럼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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