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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히브리서 5장 1편

yt1981 2023. 9. 1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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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히브리서 5장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응답받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논문이라고 했어요. 신학 논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이번에 종교 개혁 기념 특강을 공부하면서 만인 제4장론을 공부했죠. 만인 제4장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어떤 다른 사람을 내세우지 않고도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만인 제4장이다. 그것은 곧 우리는 만인 신학자이기도 하다 또 만인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랬어요. 우리 모두는 신학자이고 우리 모두는 선교사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신학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히브리스 3장에서 공부하면서 우리가 다른 책에서는 예수님을 한 번도 사도라고 부른 적이 없고 대제4장이라고 부른 적이 없는데 히브리서만 그렇게 부른다고 했죠. 그러면 그게 무슨 말이냐면 그게 신학적인 해석인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이 히브리서가 신학적 논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삶을 있는 대로 보여주는 복음서였다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서신서였다면 예수님을 대제4장이라고 부를 리가 없어요. 부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러분 한번 떠올려 보세요. 보검소에서 예수님과 대제4장은 이 비슷합니까? 예수님을 대대사장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예수님은요, 한 번도 대제4장 펴린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그렇잖아요. 

예수님 시대의 대재제장은 가야바였고 실제로는 실권자 누구였냐면 가야바의 장인이었던 안나스였어요. 이 시대에는 유일하게 대 제4장이 두 명이었어요. 원래는 한 명만 있어야 되는데 안나스가 퇴임한 이후에도 자기 사위인 가야발을 내세워서 실권을 휘둘렀기 때문에 실제로는 두 명이나 대제4장에 있었고, 이들의 재정적인 주머니를 채워주는 게 뭐였냐면 바로 성전에서 재물을 파는 거였죠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을 뒤덮어 버렸단 말이에요. 돈 바꾸는 자들과 재물 팔은 자들의 상을 엎어버렸죠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대제4장 두 명 가야바와 안나스의 권위에 정면 도전을 하신 거예요. 그 일 때문에 예수님 죽으셨단 말이죠. 

그래서 이 대제4장인 두 명이 모든 종교인들을 일으키고 모든 회중들을 불러일으켜서 결국 그들이 빌라드에게 예수님을 고소해서 고발해 죽게 만들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대제4장이라고 말하면 만약 진짜 화가 나는 거죠. 게다가 여러분 대제4장이 그때 있던 곳이 어딥니까 성전 아닙니까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의 소굴이 성전이었고 예수님은 성전 그래서 마지막에 한 번 딱 가시고는 안 가셨어요. 어디 계셨어요. 예수님은 주로 산에 오르셨어요. 산 성전파와 정반대되는 야당이셨어요. 재야에 계셨어요. 산은 어디입니까? 바로 모세가 산에서 예수님 하나님을 만나죠.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 만난 곳도 산이었고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곳도 산이었어요. 그리고 엘리야가 850명의 발과 아세라 선지자를 물리친 것도 산이었어요. 

그러니까 성룡에서 산은 뭘 상징하냐면 산은 성전파 종교주의자들과 반대되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직접 얻는 장소가 산이거든요. 그래서 산은 굉장히 권위가 있는 장소가 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배단이 한 언덕에 올라가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산상순이라고 불러요 산이 아니고 그냥 언덕배기예요. 지금 가보시면, 굉장히 낮아요. 그런데 왜 산이라고 부르나 그만큼 권세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산은 굉장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미가 있는 장소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반 종교주의자였고 반성전주의자였고 반 대제4장주의자였는데 그런 예수님을 어떻게 대제4장과 비교해서 예수님을 대제4장이라고 하고 대제4장보다 낫다고 할 수가 있냐구요. 그거는 복음서나 서신서 같으면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오직 신학 논문인 히브리서만 예수님을 대제4장이라고 불러요 왜 그런가 하는 거예요. 오늘 그걸 알아볼 거예요. 왜 그런가 바로 여러분 신학 논문은 학문적인 접근이기 때문에 항상 뭘 하는가? 새로운 시각을 열어줍니다. 그게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그래서 복음서와 서신서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도전이 매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럼 왜 의미가 있는가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대제4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하나님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랬죠 자 대제4장 동그라미 하시구요. 이제 이 대제4장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내내 부딪쳤던 예수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일종의 정적이죠. 라이벌이죠. 그런데 왜 이 대제재장을 예수님과 같다고 왜 이 3장부터 얘기하는가? 

4장에서는 또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큰 대제4장이 있다라고 했잖아요. 그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안식에 들어가게 한다라고까지 어제 4장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왜 그런가 자 오늘 1절에 대제4장마다 뭐라고 해요.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라고 그랬죠 사람 가운데 택한 자 노란색으로 쳐보세요. 대제4장은 당연히 사람이죠.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 대제4장이 무슨 일을 해요.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해요. 하나님께 속한 일 노란색으로 쳐보세요. 자 그런데 하나님께 속한 일을 사람이 한단 말이죠. 이 가능합니까? 여러분 이 게다가 하나님께 속한 일이 뭐예요?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이에요. 이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합니까? 게다가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자를 드리는 일을 어떻게 합니까? 

불가능한 일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왜 가능하냐면 바로 사람 가운데 택한 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택한 자 이 택한 탱칸 자라는 말이 왜 중요하냐면 여기서 말하는 택한 자라고 하는 말은 원래 택하다 뽑다라고 하는 말 람바노라고 하는 단어에 수동태가 쓰였어요. 수동태 그러니까 택함을 받은 자 택하여 진 자예요. 그러면 누가 택했냐는 거죠. 하나님이 택한 거죠. 수동태인 람바노라는 말은 왜 무슨 수동태냐 신적 수동태입니다. 누가 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수동태로 나오면 신적 수동태라고 하는데 하마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즉 여기서 말하는 대제4장 레위지파의 대제4장이었던 최초의 아론 이 모세형인 아론은 아론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오디션에서 뽑은 게 아니구요. 시험 봐서 뽑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택하셨어요. 

하나님이 택하셔서 그를 대세자장으로 세우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세웠기 때문에 그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할 수 있었고, 그가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는 거죠. 이처럼 예수님 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거예요. 마치 아론처럼 그래서 예수님을 대제자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죠. 게다가 이 절입니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역에 휩싸여 있습니다. 자 여러분 보세요. 사람은 어때요 사람은 무식합니다. 무식하다는 말이 뭐예요? 뭐에 무식한 거예요. 학문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글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에요. 뭘 몰라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도 없어요. 뭐만 있어요.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요. 

왜 무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또 무식하고 미혹된 자 누구에게 미혹됐어요. 사단에게 미혹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유혹을 받고 미혹되어서 영 잘못된 길을 가는 죄인이란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해야 돼요.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거예요. 자 그런데 그러한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용납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자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러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품고 속죄하는 제사를 드린다는 거죠. 대체사장이 왜 그런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노란색 들고 표시해 보세요.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다. 왜 인간이니까. 대제4장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아무리 거룩해 보여도 인간이고 자기도 조인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누구 이야기라고요. 예수님 이야기라고요. 

예수님도 이 땅의 인간으로 오셨고 예수님도 윤약함에 휩싸여 계셨다는 거죠. 예수님도 배고팠구요. 예수님도 피곤하면 졸리셨구요. 예수님도 때로는 분노하셨구요. 예수님은 때로 우셨어요. 복음서를 보세요. 예수님이 얼마나 연약함 가운데 계셨는지를 알 수 있어요. 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용납하기 위해서 무식하고 미혹된 우리를 용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연약함에 휩싸여 계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다 대제4장이다. 바로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위해서 오셨고 인간이 되셨고 연악함에 휩싸여 계셨기 때문이죠. 

자 그럼 3절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주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4장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인간이고 그도 연합감에 휩싸였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예배를 드려야죠 마땅히 드려야죠 자 그렇다면 예수님도 그렇다면 그러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드는 의문이 뭐냐면 그러면 예수님이 대지사장과 유사 한 건 알겠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대제4장보다 나은 부분은 뭐냐라고 하는 거죠. 그럼 예수님이 아론과 똑같다 그러면 아론이 예수님이게요 아니잖아요. 그러면 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신학 논문에서 예수님이 대 제4장과 매우 흡사하고 유사하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면 더 낫다 유대교를 초월하는 전 우주적인 대제사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뭐냐 그게 바로 4절과 5절의 차이예요. 4절과 5절은 완전히 달라 보여 완전히 달라요.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요. 

4절부입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그랬죠 자 여기 존귀 동그라미 해보세요. 존귀 티메라고 하는 단어의 티메 이 존귀는 뭐냐 인간에게 쓰는 말이에요. 인간이 존귀하다 여러분 인간이 어떻게 존귀해요. 인간이 존교할 수 있는 방법이 뭐예요?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노란색 쳐 보십시오. 이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 부르심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4명을 감당하는 부르심은 4명 아닙니까 콜링 하나님의 콜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을 팀의 존귀라고 불러요 존귀하다 그런데 이게 인간적인 한계 속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이 존귀해도 아니 아무리 팀에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짐 속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만 할 수 있어요. 

자 그런데 5절은 완전히 다르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4장 되심도 자 노래색 들고 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4장 되심 이게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히브리서 기자가 하고 싶은 얘기가 이거예요. 3장 4장 5장 6장 7장까지 무려 5장에 걸쳐서 하는 얘기가 바로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대제자장 되심 자 그런데 다른 게 뭐가 다르냐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오. 이게 중요해요. 영광 동그라미 해보세요. 이 영광이 4절에 나오는 존귀와는 전혀 다른 단어예요. 4절의 존귀는 팀의 인간에게 쓰는 말이라면 여기 나오는 영광은 독사라는 단어인데 독사는 하나님께만 쓰는 단어예요. 

즉 존귀와 영광은 전혀 다르다 존귀는 사람에게 영광은 하나님께 쓰는 단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는 대제4장이 되시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존귀함 티메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독사로 되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고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하신 이가 누구예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뭐라고 하셨어요.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즉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필요도 없고 연약함에 휩쓸 이유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속주제를 드려야 될 이유도 없어요. 

그런데 그분이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사람을 위해서 예물과 속주자를 드리는 자리에 오셨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연약함에 휩싸이는 자가 되셨고 또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 독사에 완전히 가득한 분이셨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뭐가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어요. 자 오늘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신학 논문인 히브리서는 굳이 예수 예수님을 그냥 우리의 9주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뭐 선한 목자다 양의 무리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왜 대제4장이라고 했는가 이런 우리가 공부했었죠. 바로 이 아르키 레게야 아르키레아라고 하는 아르키레아 대제자장이라고 하는 단어를 우리가 3장에서 공부했어요. 라틴어 성경은 뭘로 번역했다고 그랬어요. 

아시노 성경은 뒤에서 저장 아르키 에레야를 교량을 세우는 자라고 번역했다고 그랬어요. 다리를 세우는 사람 교량을 세우는 사람 그럼 이 교량이 어디와 어딜 있는 거예요. 우리와 하나님을 잇는 겁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끊어진 달이 아담 이후로 끊어져 버린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친밀함의 다리를 다시 세우는 분이 누구냐 그분이 아르키레야 대 제4장 이치라는 거예요. 그분이 예수님이다라고 지금 히브리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는 그런 얘기를 쉽게 해요. 구약에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자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신약에 예수님이 자신의 보열로 십자가에서 드린 제사만 온전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만약에 구약에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드린 대제4장들이 소와 양과 비둘기의 피를 잡아서 드린 제사가 불완전하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완전합니까?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 이 교회당이라고 하는 이 장소에 나와서 우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스피커를 통해서 이 장의자에 앉아서 때로는 피아노 때로는 오르간 때로는 드럼 때로는 기타 반주를 맞춰서 찬양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고 말씀 듣고 여러분 이건 완전할까요?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놈 완전할까요? 그럴 리가 없어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설교자의 고뇌를 아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삽시다라고 선교하는데 저는 그렇게 못 살아요. 거기에 대한 여러분 아픔을 아세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이게 완전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예배가 완전하다고 믿고 예배하죠. 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임이 왜 하나님과 연결되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히브리서인 거예요.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인간의 연악함을 다 감당하시고 오직 인간의 모든 죄를 속죄죄로 자신을 드려서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이 자리에 임할 수 있도록 온전하신 예배를 드린 대제4장이기 때문에 예수님 이전에 구약의 제사도 온전했고 예수님 이후에 신약의 예배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모든 예배도 온전하다는 거예요.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그걸 믿고 지금 드리는 이 예배가 얼마나 존귀한 예배고 얼마나 우리의 생명을 맞출 만한 예배고 얼마나 이 예배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고 하나님과 끊어진 이 달이 연결할 수 있는 복된 예배인지를 믿으라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가 하는 말이에요. 지금 히브리서 당시에 모든 예배는요 정말 가치 없어 보였어요. 이때 예배는 카타콤 지하 동굴로 숨어든 예배였고 이때의 예배는 소리내어 찬성을 부를 수도 없고 이때는 성경 두루마리도 없고 이때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눈에 보이는 어떤 영광도 없었어요. 잡혀 죽고 사지가 찍히고 피가 나고 자녀가 죽고 남편이 죽는 상황 가운데에서 박해받는 상황 가운데에서 히브리소티자는 말하는 거예요. 

이러한 상황 가운데 들이는 우리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고 우리의 죄가 시승받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정말 가치 있는 예배다라고 하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어요. 왜 예수님께서 대 제4장이 되셔서 자기의 몸을 찢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십자가의 주님을 의지하는 모든 이들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완전해 보일지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적으로 보이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 제4장 되시는 온전한 예배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죠 때로는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하고 때로는 만날 수도 없고 때로는 브라운관을 통해서 때로는 모니터를 통해서 예배해야 되고 때로는 귀로만 들어야 되고 때로는 눈으로만 봐야 되고 느끼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예배 과연 교회도 나오지 못하는 예배가 예배냐 예배라는 거 왜 예수님이 예배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대 제자장이 되셔서 우를 위하여 모든 예배를 온전 있게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을 선포하는 강단은 온전하고 그분을 만나는 그분을 붙잡는 성도는 온전하고 그분을 통해 예배하는 모든 예배자는 온전하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죠.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시죠. 

이 산에서도 말고 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 그때다 여러분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거창한 성전이 아니라 수많은 재물이 아니라 수많은 눈에 보이는 현란한 것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내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심을 믿고 속조의 죄로 드려주신 우리의 예수님 화목재로 자기를 드리신 예수님을 믿고 오늘도 하나님과 다리 놓는 사역 하나님과 다리 놓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비록 나는 연약하지만 나는 부족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나를 사랑하셔서 이 예배의 자리에 불러주시고 그런 연약한 나를 통해서 설교하게 하시고 그런 연약한 나를 통해 찬양하게 하시고 그런 연약한 나를 통해 기도하게 하시고 붙잡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부를 통하여서 오늘 여러분 하나님과 연결되는 영광이 있는 삶 은혜와 진리가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생회를 하실 때 한 번도 대지사장이셨던 적이 없는데 한 번도 대 제 4장관은 가까이 하신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그 온전한 제사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신 놀라운 십자가 희생 때문에 오늘 히브리석 기자는 예수님을 온 우주적인 보편적인 우리의 대제4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 이 신학적인 해석에 저희들도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우리의 예배를 예배되게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직접 만나고 직접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주님을 높이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림 우리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예배는 형편없지만, 지금 예배하는 나도 부족하고 예배하는 현실은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이 예배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배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대제4장 주림을 의지합니다. 주님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우리의 연악한 예배를 굳게 세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서 우리의 다음 세대도 주님만 의지하여 예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영광 가운데 동참하여 주님을 온전히 높이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민 가족들 온전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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