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국가적으로 참 힘들었던 한 달이었습니다. 4월은 여러분들 가정과 일상에 또 생업의 주님의 풍성한 자비가 넘치는 한 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오늘 5장 11절부터인데요. 주보에는 10일 14절까지로 잡혀 있는데, 내용상으로는 6장 3절까지 가능하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히브리 기자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제 설명을 하려다가 설명을 중단합니다. 11절에 이렇게 시작이 되죠. 멜기세댁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함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이 설명 안 하겠다. 말이에요.
그 안 할 걸 왜 거론을 했 하고 언급을 했을까? 안 하는 건 아니고, 어떤 설명을 먼저 한 다음에 이 멜기 세댁에 관한 주제는 7장에 본격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6장까지의 이 전체 내용은 사실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문구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삽화 격이죠. 우리도 어법에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뭔가를 중요한 주제를 담아서 설명을 하다가 이걸 조금 더 보강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오히려 이 주제를 멈추고 왜 지난번에 너랑 나랑 거기 갔을 때 이런 경우 있었잖아. 그래 그거 얘기하는 거야. 해서 하던 말의 주제를 중단하고 괄호 안에 넣거나 삽화 개념으로 설명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5장 11절부터 6장 20절까지는 사실상 항목에 진짜 주제를 더 깊게 더 진지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괄호 안에 특별한 이해를 돕는 겁니다. 원래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멜기스 새댁이에요. 멜기 새댁이라 함은 대제4장의 직분을 얘기하는데 멜기세댁은 세상의 세습을 따라 이어지는 서열이 아닙니다. 영적인 서열이에요. 그래서 대제4장과 밀기새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예표적 성격이기 때문에 이건 구약 전체의 성경의 핵심 가치예요. 핵심 주제예요.
그래서 이것을 설명해야 되는데 문제는 이 독자들의 상태가 이걸 지금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겁니다.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설명할 수가 없다 하면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지적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내복을 그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어요. 11절 멜기세댁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렵다 뭐가 둔해요. 듣는 것이 둔하대요 이 둔하다고 했을 때는 무감각하다 그런 의미가 사실은 아닙니다.
둔하다라 얘기할 때는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첫째는 듣는 일에 말씀을 경청하는 일에 너희가 게으르다 이게 한 가지 지적이고 또 하나의 지적은 그러다 보니까, 말씀에 대한 저항심을 너희가 갖고 있다. 이렇게 두 개가 합한 개념이에요. 이걸 조금 더 직설적으로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네요. 10편 40편을 한번 띄워 주실까요?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여부를 기부하지 아니하시며 혼죄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시지라 자 초반에 보면,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이렇게 돼 있죠. 이 말을 조금 더 원뜻에 가깝게 직역을 하자면 이런 표현이 되겠습니다.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하나님이요.
아이가 내게 열린 귀를 주시옵소서 열린 길을 주시옵소서 한 번 더 할까요? 하나님이요. 하나님이에요. 네 개 네 개 열린 귀를 주시옵소서 열린 귀를 주시옵소서 이것은 예배자들이 여기 미리 와 앉으셔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기도할 때 물론 예배 자체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겠고 또 설교자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가장 앞에 우선적 기도가 자신의 영적인 열림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이 본문은 하나님이여 내게 열린 귀를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자 그런데 히브리 독자들은 지금 듣는 일에 두뇌 있어요. 이것은 지적인 상태도 아니고 어떤 이성적인 상태도 아닙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영적인 상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오래전의 일인데요. 예배 시간에 꼭 중앙에 앉는 여집사님이 한 분 계셨어요. 그것도 설교자 정면회 근데 신기한 것은 사도신경부터 다 찬양까지 뭐 너무 잘 따라해요. 말똥말똥하게 그러다가 아주 기계적으로 무슨 소리 하고 싶은지 알겠죠. 목사의 설교가 시작이 되면 자동으로 방아를 짓기 시작해요. 이게 조금 심해지면 헤드뱅잉이 일어납니다. 해가 일쳐요 근데 문제는 제가 시험에 드는 거예요. 그것도 정면에 앉아 가지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그러는 거예요.
또 저는 이제 다른 경우에는 둔해도 이 설교 시간마다 워낙 예민해 있기 때문에 정면에 앉아서 그게 눈에 들어오죠 속이 상해요. 여자가 왜 저럴까 왜 제가 기도를 다 했네요. 하나님 저분 귀를 뚫어주시든지 아니면 자리를 옮겨주시든지 그렇게 기도를 했어요. 실제 너무 좀 부담이 돼 가지고 근데 한 몇 달 지난 어느 날 태도가 돌변을 해서 눈이 반짝반짝하면서 말씀을 쫙 받는 거예요. 보면 알잖아요. 졸지도 않고 야 이건 또 뭐지 해서 담당 여전사님한테 시켜가지고.
이분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한번 좀 자연스럽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신방을 갖다 오더니, 사정 얘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 그분이 참 귀한 분입니다. 어떻게 귀한데요. 자기도 예배 시간마다 이 문제 땜에 보통 고역이 아닌 거예요. 근데 이분이 워낙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는 분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은혜받기 위해서 가운데 앉는데 다른 시간은 발동하다가도 설교 시간만 목사님이 입을 떼면 마치 무슨 버튼 누르듯이 자동적으로 방아를 짓기 시작하는 거예요. 본인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걸 본인이 알 텐데 또 목사님이 자기 때문에 지금 신경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도 사람이면 느낄 텐데 예 여기요 그런데 이분이 작정을 하고 기도를 한 겁니다. 이거는 내가 육신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고 이거 영적인 문제 같다 물론 인제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예배 중에 조는 분이 여러 유형이 있는데, 정말 밤새 알바하다가 들어와 가지고 일부에 앉아서 너무 몸이 고단해 조는 경우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지요 있죠. 4대 행전에도 보면 그 유두고가 등장을 하죠. 이분은 이름이 노예 계급입니다. 낮에 한창 힘든 일을 했을 거예요. 그때가 밤이었는데.
늦게까지 또 파울이 지리하게 길게 설교를 하다 보니까, 뒤늦게 와가지고 이 층 다락방에 창가에 걸터앉았다가 그땐 단지 그 촛불 같은 거를 심지가 타는 기름불을 켜놓고 설교를 했겠죠. 그러면 그게 다 위로 올라갑니다. 위로 어디로 빠져나가요 창문으로 빠져나가잖아요. 그 거기 걸쳐 앉았다가 노곤해 가지고 그냥 떨어진 겁니다. 그런 경우도 물론 있어요. 몸이 곤해서 근데 이건 영적인 문제예요. 본인도 기도를 한 거예요. 근데 어느 날부터 하나님께서 귀를 뚫어주시는데 그때부터 말씀이 쏙쏙 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지적인 작용이 절대 아닙니다.
이거를 배제해서도 안 되지만 지적인 작용으로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철저히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러 와서 기도할 때 가장 먼저 1차적으로 기도해야 될 게 방금 고백하신 것처럼 하나님이여 내 귀를 열어주시옵소서 믿습니까? 그런데 이 히브리 독자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둔해버렸어요. 말씀을 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잃어버렸다 말이에요.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사람은요, 이 학문학적인 차원에서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음식이 들어가야 몸이 유지가 되고 활동을 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음식 들어간 지 시간이 오래 걸리면 허기가 지괴돼 있어 그게 건강한 사람의 싸인이에요.
근데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말씀을 몇 달째 안 잃는데도 포만감에 허기도 없고 갈증도 없다면 지금 본인이 심각하다는 걸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럼 본인이 심각하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생리학적인 차원에서도 그건 있을 수가 없는 현상입니다. 근데 지금 히브리 독자들이 어떤 위험에 빠졌는가 하면 말씀 듣는 일이 둔해지다 보니까, 자 성경을 볼까요? 12절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잠깐 저를 보십시다. 여기 사용한 때라는 말은 헬라 말의 두 가지로 보통 쓰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을 씁니다. 카이로스는 말 그대로 의미적 시간이에요. 그런데 크루노스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입니다.
여기서는 물리적 시간을 사용했어요. 크루노스의 시간을 사용했어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 믿은 시간이 오래된 사람들이라 말이에요. 모태 신앙들 전도도 못해 기도도 못해 뭐 이런 그걸 인제 보통 모태 신앙이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예수 믿는 문제에 관한 우리 집이 4대 3대 5대요 할 말이 있다는 집안들이에요. 때가 오래된 사람들 여기 이제 착시현상이 일어나죠. 자기가 때가 오래되면 그게 신앙 실력인 줄 알아요. 큰 착각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더 심한 오해는 큰 교회 다니면 그게 자기 신앙 실력인 줄 알아요. 실제 그런 설명을 하는 사람을 봤어요. 제가 부교역자 시절인데 어느 분하고 신방을 갔어요.
근데 그분이 신방간 집주인을 이제 교회를 안내하고 이제 신앙적으로 고면을 하면서 이런 고면을 하더라고요. 성돈이 대학에도 서울대학이 있고 지방대학이 있듯이 교회도 다 똑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격 교회가 있고 지방대학격 교회가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분별이 없는 소리죠 성경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소리죠 그러다 보니까, 큰 대형교회 다니면 그게 자기 신앙 실력인 줄 알아요. 또 예배당들을 오래 밟고 다니면 뭐가 돼 있는 줄 알아요. 근데 오늘 성경 기자가 얼마나 날카롭게 지적을 하냐면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지금 뭐가 돼야 돼요.
선생이 돼야 될 터인데 뒤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에 대하여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젖 먹는 젖 먹는 사람들을 누구라 그럽니까 어린아이가 젖 먹는 자들이에요. 젖은 어린아이가 먹는 거 이제 대학 들어갔는데도 엄마 찾으면 비정상이죠. 정상이 아니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를 먹어야 될 자가 되었다고 초보가 뭐예요? 기초라는 말인데 이 말을 어느 주석에 보니까,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놨어요. 이런 얘기입니다.
자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인지 가장 기초를 배워요 산수로는 구구단부터 배우고 더하기 빼기 곱셈 나눗셈 살아가는데 이것만 알면 그렇게 불편한 게 없어요. 뭐 생활하면서 미분 적분을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은 전문가들 외에는 그렇게 많질 않아요. 고만 하면 그저 웬만한 일상은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중요한 국어를 배워요 우리말에는 아야 어여 모음이 있고 자음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우수한지 아십니까?
UN에서 글 없는 민족에게 글을 배포할 때 영호를 배포하지 세계 공용에 해당하는 영호를 배포하지 않고 한글을 배포한답니다. 유일하게 한글을 배포한답니다. 한글은 모음 자음이 조합에서 가장 세계적으로 많이 어휘와 발음을 낼 수 있는 글자가 우리 한글이라는 거예요. 가장 풍성한 발음을 생산할 수 있는 글자 체계가 한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한글을 배웁니다. 이건 역사적인 자긍심을 가져도 될 만한 참 독창적인 언어체계를 한글은 갖고 있습니다. 기역 니은 아야어를 배워요 그러면 이제 글 조합하는 방법을 거기서 터득하겠죠. 국어 끝 맞아요. 아니죠.
알파벳을 마치고 나면은 단어 공부를 해야 돼요. 외국에 오래 살다 온 인제 1.5세들 보면 뭐 나름 한국말을 한다곤 하는데 회귀한 단어를 잘못을 갖다 쓸 때가 있어요. 가끔 인제 한국에서 생활을 한 지가 오래되니까. 떠난 지가 오래되니까. 한국에서 매일 바뀌고 새로 생산되는 어휘를 잘 모르는 거죠. 못 따라오는 거죠. 그러니까 자꾸 어휘를 배워야 돼요. 그리고 나서 문장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나가서 논문을 쓰고 논문을 읽고 철학을 읽고 철학을 사유할 수 있는 단계까지 들어가야 그게 성숙한 단계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계속 아야 어여만 하고 있어요. 그것만 붙들고 그것만 할 줄 알면 구원받는 것으로 오해했던 사람이 있었죠.
바울과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걸 자기들이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한번 띄워주세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바울이 한 얘기예요. 자기가 어렸을 때에는 생물학적인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게 아니죠.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일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갖고 깨닫는 거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장성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일을 내가 버리게 되었다. 어린아이 같았다.
할 때는 율법주의에 붙들려서 알파벳만 외우고 있으면 그것만 할 줄 알면 구원을 받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율법주의에 붙들려 있을 때 그는 구약의 메시아도 알았고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50 메시아를 핍박했던 선봉에 섰던 자였습니다. 예수를 핍박하지 않았어요. 근데 경천동지알 인식의 세계가 어디서 붕괴된 거죠. 담의 색 언덕에서 붕괴된 것 아닙니까 나는 네가 빗박하는 예수라 그제서야 바울의 인식 세계 속에서 메시아와 구약의 메시아와 신약의 예수가 만나는 아이러니가 벌어집니다. 이분이 그분이었구나 예수를 만나면서 자유가 오고 문이 열어진 겁니다.
귀가 열어진 겁니다. 어린아이 때는 율법이라는 문자만 붙들고 있으면 행위만 붙들고 있으면 군이 오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율법에 꽉 가두어져서 자유롭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자유키하시는 진리이신 이수가 바울의 인생 속에 어느 날 천둥처럼 다가오시자 모든 인식 세계가 새로워졌습니다. 성숙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오늘 히브리 기자도 똑같은 거예요. 12절에 보니까,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내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 알파벳 기초라 말이죠.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몸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그리고 13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다 같이 시작 인행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자 어린아이 특징을 뭐라고 소개합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이 경험이라는 말은 굉장히 강렬한 이야기입니다. 신약에 보면, 초두의 마리아가 1004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아요.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으려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때 1004의 고지에 마리아가 대답을 하죠.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거기 안다라는 개념을 동원합니다.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내게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 거기 알지 못한다.
할 때는 태어나서 남자 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까? 그건 지식적인 개념이 아니고 경험적 차원의 이해죠 안다 내가 너를 안다라는 말은 경험적 이야기예요. 이 여기서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어떤 착시 현상을 우리 심리 속에 신앙의 이해 속에 담아 있냐 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면 그게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니거든요. 요한복음이 뭐라고 그랬어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세 글자 지키는 그 다시 말해서, 행하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 그랬어요. 신앙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누군가 신앙을 딱 두 가지로 설명을 했는데 참 와닿아요. 신앙은 딴 거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신앙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따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맞죠. 자 예를 들어서, 신랑은 미술을 너무 싫어해 뭐 싫어한다는 것보다 아예 관심이 없어 뭐 일부러 싫어할 것까지는 없겠죠. 관심이 없어 그런데 결혼한 신부가 너무 미술을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또 그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 만났어요. 근데 신랑이 싫어하니까 신부가 강요는 안 해요.
쓸쓸하게 혼자 티켓 끊어가지고 혼자 전시회 다니고 그러는 모습을 몇 년째 지켜보면 이게 정상적인 남자라면 자연이 어떻게 될까요? 싫지만 같이 따라가 줄게 따라갔다가 그림에 대해 설명도 듣게 되고 처음엔 그러고 따라가겠죠. 난 그림에 관심 없는데 당신이 가서 그냥 따라가는 거야.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림 보는 걸 좋아하고 그림도 그리게 되는 그런 부분을 제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정말 사랑한다면, 끝까지 악착같이 싫어하는 걸 난 할 거야. 이런 남자는 없어요.
그거 정상이 아니죠. 그럼 못돼먹은 남자죠 그건 부부로서 자격이 없는 거죠. 그렇죠. 근데 또 못해먹은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끝까지 근데 정상적이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신앙이에요. 좋아하는 걸 따라가게 되는 게 신앙이에요. 우리는 누구의 신부입니까? 그리스도의 신부 아닙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나 스스로 해 가지고 갖다 바치고 치성을 데리고 업적을 쌓는 싸움이 아니고 전부 수동태로 돼 있어요. 6장을 볼까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에 초보를 버리고 아까 말한 기초를 얘기하는 거예요.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귀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자 잠깐 설명하고 들어갑시다 여기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벌이라고 그래요. 자 말은 이 기초가 뒤집어 얘기하면 잘못되었다. 말이에요. 잘못된 기초 위에 내가 써 있었다.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죽은 행실을 버리라는 말은 뭐냐 하면, 죽었다라는 말은 행동이 없고 열매가 없다는 뜻입니다. 정지된 상태를 얘기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다녀도 오래 해도 들은 말씀 많고 공부한 말씀 많고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그래서 성경 어디 하면 쫙 해석도 붙이고 주석도 붙이고 설명을 해요. 그런데 요지는 안 살아 살질 않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말로만 신부를 사랑하고 신랑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싫어하는 짓은 골라서 해 이런 괴물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특별히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 가운데 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성경을 잘 보세요. 몇 절을 보시냐 하면 12절을 보십시다.
때가 오래되었으면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초보에 대하여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더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뭐 하는 자들이니라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 분별이 뭐냐 하면, 자 제가 인제 최근에 겪고 있는 참 희한한 경험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4월 11일 날 우리 교회가 세월호 가족들을 초대해서 고난 주간에 음악회를 한다고 뭐 페북에 이렇게 광고가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간지에도 그때부터 교회로 외부에서 전화 폭탄이 쏟아지는데 뭐 제게 메일로 말할 것도 없고 근데 우리 교회 성도들은 혹 그런 분이 계셔도 제가 잘 설명을 하고 하니까 아이 죄송했다고 취지를 몰랐다고 오히려 이렇게 선뜻 이해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런 분들 참 고맙죠 근데 뭐 빨갱이라는 둥 별별 악당을 다 퍼붓는 거예요. 자 그런 분들 한번 물어봅시다 아니 차디찬 바다에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이 왜 빨갱이가 돼야 됩니까? 그거를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쁜 놈들이지 왜 그들이 빨갱이입니까? 그 너 한번 얘기 좀 해봅시다 왜 그들이 빨갱이예요.
왜 그들이 좌파예요. 바다에다 자식 묻어버리면 다 좌파고 빨갱이 되는 겁니까? 여러분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그러세요. 교회는 정치적인 노름에 이데올로기에 휘말려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해야 될 일은 기맥힌 슬픔을 당한 자와 같이 우는 게 교회 역할입니다. 거기에 이상도 이하도 어떤 해석도 하지 마세요. 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가 자꾸 수구 보수요 수구 꼴통이라는 소리를 듣습니까? 왜 기독교가 그런 조롱을 당해야 돼요. 분별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사회 이 복잡한 문제에 우리가 분별이 떨어지면 그냥 세대의 강물에 휩쓸려 가기 딱 쉽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웠으면 그것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겁니다. 그래서 6장 1절서부터 3절까지 보면 전부 이 문장이 수동형으로 돼 있어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조차 순종하는 것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라고요. 사랑하는 우리 3일의 성도 여러분 시대가 혼란스럽고 가짜와 지짜가 뒤썩여서 분별하기 참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말씀에 늘 갈증을 가지고 목마른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몸을 다해서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부활의 봄 4월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나 일어나십시다.
주님 말씀하시면 그 주님 말씀하시면 우리 한번 서신 채로 또 삶의 예배로 떠나기 전에 눈을 감고 두 가지만 같이 기도합시다.
첫째는 오늘 주신 말씀을 꼼꼼하게 한번 되새김질을 하면 좋겠어요. 때가 오래되므로 지금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될 터인데 아직도 젖을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분별력도 잃어버리고 아직도 어린아이 자리에 돌봄을 받아야 될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내 안에 모습은 없는가를 돌아보십시다. 두 번째는 4월 첫 주입니다. 이렇게 한 달이 또 시작이 됩니다. 참 국가적으로도 많은 힘든 시기를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죠.
특별히 부활의 봄인 만큼 내 안에 죽었던 삶의 자리가 소송하고 회복의 자리로 하나님의 풍성한 기절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한번 쥐여 부른 다음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