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말씀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핍박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계속해서 변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새로운 대제사장의 사역을 완전하게 행하시는 분, 옛 언약과 비교해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심을 선언합니다.
1절에서 성경은 현재 계속 논의되고 있는 것에 관한 요점을 확인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 하늘의 성소에서 섬기시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고백하는 성도들의 믿음은 구약백성들처럼 더 이상 그림자를 통한 것이 아닙니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들은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와 같은 역할을 대신할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성소에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셔서 당신의 위엄과 권세를 누리고자 하심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중보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좋은 것임을 강조하면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님을 옛 언약의 중심에 섰던 모세와 대립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신 새 언약이 모세가 중보가 되었던 옛 언약보다 훨씬 탁월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옛 언약 안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새 언약 안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중보인 모세는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나, 신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메시테스’ 즉 ‘중보’라는 말은 ‘가운데 있는’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두 단체 혹은 두 존재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메시테스’라는 단어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 잘 알려진 단어입니다. 아직 법정으로 가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 법정까지 가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화해자나 중재자가 될 수 있고, 분쟁 중인 사건을 위한 관리인이나 위탁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미 해결된 법적 사건에서 그 결정이 실행될 것을 보증하는 책임을 가진 증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잘 알려진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서신 ‘중보자’가 되심을 설명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서 화해시키는 자’를 뜻하는 ‘메시테스’는 자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적합한 단여였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처음 선언처럼, 이 모든 말의 요점, 핵심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게 있다는 사실입니다(1절). 그분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이십니다(6절).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여 되돌아가지 말고 굳건히 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안다면 우리역시 우리의 영적 여정을 방해하고 삶을 무너뜨리는 온갖 죄와 어둠으로부터 굳건히 일어서서 용기 있게 세상을 거스르는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걸음을 걷다가, 말씀의 정신을 따라 선택과 결정을 시도해 가다가 벽에 부딪혀 포기하거나 되돌아가려 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다시 영적인 걸음을 시도하려는 힘조차 잃어버리고 침체의 수렁에 빠진 경험을 겪고 있습니까? 오늘 이 새벽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하늘의 대제사장, 참되신 ‘메시테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그 ‘요점’을 말입니다.
기도
주님, 되돌아가려 할 때, 포기하려 할 때 ‘메시테스’, 참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낙심의 장벽이 가로막을 때,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주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기도의 끈을 부여잡고, 찬송의 단을 쌓으며, 세상을 거스르는 진리의 걸음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