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에서 성도 개인적 차원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한 선물로 구원을 얻었음을 말씀하였습니다.
2:11-22절에서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수평적 화평을 이루고, 또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수직적 화평을 이룸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성립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방인의 신분 변화의 모습은 '그 때에', '이제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시작으로 본문에서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접속사를 중심으로 ‘그 때에, 이제는, 그러므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명령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10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개인적 차원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들의 아무 공로 없이 거저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들입니다.
1. ‘그 때에’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그 때에’란 ‘구원받기 이전’을 말합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11절과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에베소서 2:11-12).
에베소 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혈통이나 육체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하듯이, 유대인들을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건한 유대인들, 즉 할례를 행한 자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을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즉 유대인들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밖의 사람'이란 '~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으로서, ‘멀리 떨어져 있어 낯선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마치 개처럼 여겼습니다(마 15:26,27). 그래서 그들은 비록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성전 제사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성전에 이방인의 뜰을 만들어 그들의 출입을 제한시켰습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야 언약에 대한 큰 소망을 가졌던 자들이었음에 반하여 이방인들은 이에 대해서도 ‘외인’ 즉 ‘낯선 자들(KJV, strangers)’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모든 축복들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사후 세계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구원의 소망, 즉 내세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갖지 못한 절망적인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구원받기 이전에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좌절과 낙심만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
2.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 먼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어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13-15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에베소서 2:13-15)
우리 성경에서는 ‘이제는’으로 번역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러나 이제는’으로 번역해야 뜻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즉 구원받기 이전에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이방인들의 비극적 상태로 살아왔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이 ‘멀리’ 있었지만, 이제는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피 흘림을 통해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까워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14절의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앞에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란 뜻을 지닌 '가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에 멀리 있던 그들을 가까워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허무신 벽은 보이는 성전의 벽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벽이기도 합니다.
먼저, 보이는 벽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1.5m의 높이로 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를 가로막는 돌로 쌓은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을 구별하여 두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방인도 이 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Josephus, Antiquities xv. 11.5).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에베소인 드로비모(Trophimus)를 이 벽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는 오해를 사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한 적이 있었습니다(행 21:29,3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 성전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써(마 27:51) 이방인의 출입을 제한한 그 담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분이셨습니다.
다음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은 혈통적,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 포괄적인 보이지 않는 벽들을 허무셨습니다.
이런 장벽들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에 의해 드러났는데 특별히 음식법과 제사, 할례(창 17:27 ; 행 15:5)에 관한 규정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기게 하는 장애 역할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을 보면 베드로도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간 일 때문에 바울로부터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라는 책망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부정한 음식을 먹거나 할례를 받지 않는 일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구원 밖의 존재로 무시되거나 천시받지 않게 되었습니다(행 11:17,18 ; 롬 14:5-12 ; 고전 8:13).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 가입한 자들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등의 구별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골 3:11).
이처럼 과거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던 벽들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허물어짐으로써 전에 멀리 있던 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속해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한 몸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엡 1:22,23 ; 4:3-5).
이렇게 막힌 담과 율법을 폐하신 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가 되게 하셔서 화평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one)’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및 그 교회를 구성하는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는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존귀한 자나 천한 자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롬 10:12). 그런 구분이 있다면 그 공동체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공동체입니다.
둘째, ‘새로운’이란 뜻의 단어는 시간적인 새로움뿐만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도 뜻하므로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새로운 존재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피조물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에 대한 질시와 반목 없이 지체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짓다’라는 단어는 ‘만들다(KJV, NASB, make)’가 아니고 ‘창조하다(RSV, NJB, creation)’라는 뜻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 된 인간을 약간 향상시키신 정도가 아니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한 인류를 자신의 순종을 통해 완전하게 재창조하셔서 교회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써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한 새로운 인류’, 즉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 구속 공동체로 재창조하셨습니다.
나. 다음으로 하나님과 수직적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16-18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6-18)
14,15절에서 유대인들과는 너무나 멀리 있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수평적 화평을 누리게 되었음을 밝힌 사도 바울은, 16-18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목하게 하다’는 것은 ‘완전히 화해하다’, ‘이전의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이 새로운 화목이 아니라 과거 화목 되었었던 상태로 다시 되돌리는 화목임과 동시에 불완전한 화목이 아니라 완전한 화목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원래 화목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이 아담의 범죄로 깨어졌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그 깨어진 관계가 바로잡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대가를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의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방인과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원수 된 것을 모두 소멸하셨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원수 되게 하는 분쟁과 시기와 분리함이 사라져 서로 하나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4:3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오셔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가) 오신 후에’가 됩니다.
‘오신 분’은 성령이시며, 그를 보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복음을 전한 자들은 자신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을 근거로 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그 분으로 하여금 제자들 속에 역사하게 하셔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성령을 보내시어 한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올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18절).
고대 근동 및 헬라 문화권에서는 ‘프로사고게’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왕을 알현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선별하여 왕에게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왕의 최측근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을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한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자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오늘날에는 인종과 빈부와 성별에 무관하게 누구든지 성령 안에 거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성도들 안에의 거주하심과 인도하심, 또한 성자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받아들이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어(고전 12:13) 모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삼위 하나님의 큰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코 실패가 있을 수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3.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도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까?
19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에베소서 2:19)
구원받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아무런 소망도 없는 상태였으나(11,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수평적 화평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13-15절),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과 수직적 화평을 이루었기(16-18절) 때문에,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여 형성된 한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방인 성도들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닌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먼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성도’란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 지리적으로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완전히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은 ‘하나님의 권속’이란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권속’이란 ‘가족’, ‘식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임을 자랑하며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20-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0-22)
사도 바울은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입니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고,
그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21절),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입니다(22절 ; 고전 3:9).
이제 주 안에서 구별된 성도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밀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닦아 놓은 교회의 터 위에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석을 가리킵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이 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셔서’ 교회의 기초가 되시고 교회의 소유자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친히 자신이 직접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의 건물을 건축할 때 견고하게 선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건축 자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웅장한 건물을 세워가는 것처럼, 성전 건축 역시 각 지체인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튼튼하게 세워져 가게 됩니다.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에서 ‘되어 가고’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 동사로서,
/ 교회가 완성을 향해 계속 건축 중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 이를 직역하면 ‘자라간다(RSV, grows)’라는 단어로서, 건축에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고 생물의 성장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입니다(마 6:28 ; 눅 13:19).
/그러므로 교회는 유기체로서 살아서 숨 쉬고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성장해 가야 합니다.
교회 성도들은 22절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 연합하여 든든하고 단단하게 세워져 가야 합니다.
교회 성장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22절)
첫째, ‘그의 안에서’ 성장시켜야 합니다.
둘째, 서로 연결하여 성장해야 합니다. / 조화, 서로 섬김 / 퍼즐 맞추듯이 / 퍼즐 중에 한 조각이라도 없으면, 이탈하면, 사라지면 완성품이 되질 않는 것처럼 모든 성도가 하나로 연합하여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 나의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다 필요한 성도들이다. 하나님 보시기엔 다 필요한 자들이다.
셋째, 성장을 위해 함께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