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16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17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18 시온 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은 세세에 미치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애 5:15-22)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꼬옥 안고 계십니다.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아직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신 분들도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따뜻하심, 그 자유케 하심, 그 위로의 손길을 모두 경험하고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은 구약의 예레미야 애가의 말씀입니다. 애가는 “큰 소리로 높이 운다”라는 헬라어의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그 도시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버렸습니다. 지금부터 2천 6백 여 년 전, B.C. 587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난 참극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감에 충만하여 가슴을 찢으며 쓴 성경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울며 통곡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고난. 하나님의 백성들도 때때로 그런 심각한 고난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이시지만 때때로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수수방관하시지는 않습니다. 가까이 서 계십니다. 다만 침묵하실 뿐입니다. 고난의 세월을 아픈 마음으로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고난의 아픔 가운데 있더라도 잠잠하여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터널을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회개입니다. 회개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게 되는 우리는 지은 죄를 회개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최선입니다.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고난의 절망 중에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반드시 고난이 물러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간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오늘 본문은 옛적 같은 그 날의 도래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필요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윌리엄 섹커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회개가 늦어지면 늦어질 수록 그만큼 더 하나님의 용서 또한 늦어진다”.무슨 말입니까? 회개는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지요. 회개해야 하나님도 용서의 은혜를 베푸실 것 아니냐는 거죠. 그렇습니다. 회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하나님 나라의 풍요가 그만큼 더 빨리 우리 삶에 임하게 됩니다. 청소하지 아니하면 더러운 집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샤워하지 않으면 땀내 나는 몸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청소할수록 부지런히 샤워할수록 부지런히 회개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맛보며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자매님이 엊그제 전화를 주셨습니다. 반가운 전화였습니다. 기다리던 전화였습니다. 아니 기다릴 수도 없는 전화였습니다. 내가 먼저 해야 할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할 수도 없는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를 받고 보니 참 반가운 전화였습니다. 서로 주고받은 말들이 그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중요하지 않은 전화였습니다. 자매님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시종, “목사님, 죄송해요” “목사님 죄송해요”를 되풀이했습니다. “아닙니다. 집사님. 제가 감사합니다. 집사님이 용기가 있으신 겁니다.” “참 감사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사죄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고백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회개의 전류가 그 전화기에 엉켰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천국을 이미 선물로 주셨습니다. 천국을 선물로 주시면서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다셨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면 천국을 소유하며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본격적인 전도의 삶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생각할 때 믿음을 먼저 떠 올립니다. 맞습니다. 믿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천국 문까지 갈 수 있는 자가 누구인 줄 아세요? 회개하는 자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제대로 된 건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이 찐빵이라면 회개의 삶은 그 앙꼬입니다. 천국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 이 땅에서부터 즉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죄가 아직 숨어 있으면 죄가 끼어들게 되면 그 천국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죄가 한 톨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겸손히 깨닫고 흉악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앙망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일단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고상한 인격을 유지하려는 자는 이 회개의 삶을 멸시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는 자입니다. 회개의 삶이라 함은 일단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사람일지라도 날마다 쌓이는 죄의 먼지를 날마다 고백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 먼지를 날마다 청소하기를 소망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이 언제나 천국의 기쁨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천국으로 느껴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시기 위하여 여러분의 삶이 회개의 삶 죄고백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 회개할 것인가 그 회개할 때를 알려 주십니다. 언제 우리들의 회개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언제 우리들의 죄고백이 터져 나와야 할까요? 하나님의 회개의 싸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18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저런 현상을 통하여 우리의 범죄의 증거가 드러날 때입니다. “아, 왜 이런 일들이 생길까?” 그 때는 우리가 즉각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각 죄를 고백하는 무릎으로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어떤 싸인 어떤 증세일까요? 성경은 나열합니다. 내 삶에서 내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입니다. 갑자기 삶이 무의미해지고 우울해 질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춤추고 웃고 즐기는 무도의 기쁨이 사라지고 애통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날 때입니다. 부부문제가 터지고 자녀문제가 나를 괴롭히고 인간관계가 자꾸만 막혀갈 때를 말합니다. 면류관이 땅에 떨어질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명예감이 실추할 때를 말합니다. 마음이 자꾸만 피곤해 지고, 눈이 어두움으로 덮여 올 때입니다. 매사에 짜증이 나고 우울해지며 모든 게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비관적으로 여겨질 때를 말합니다. 시온산이 황무하여질 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빛이 되지 못하고 조롱거리가 되고 손가락질을 받게 될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친목단체 정도로 우습게 여길 때입니다. 여우들이 여기 저기 설칠 때입니다. 이는 악한 말 악한 생각 악한 영향력이 내 삶과 나의 가정과 우리들의 공동체를 덮을 때를 말합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하면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시 89:39).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죄악을 너무 너무 싫어하신다는 거죠. 죄악 때문에 아들까지 십자가에 매다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죄악 속에 우리가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보호하실 수 없게 되고, 우리와의 약속을 폐기하시고, 약속하신 우리의 명예와 상급을 지킬 수 없게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범죄의 자리에 넘어져 있으면, 하나님은 그의 성소마저 원수가 모든 악을 행하는 자리로 내어주시는 분(시 74:2,3)이심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떠난 몸, 죄악이 자행되는 몸은 온갖 탐욕과 욕심이 흐르는 몸이 되어 버립니다. 악한 권세가 유린하는 몸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들의 육체, 우리들의 가정, 우리들의 공동체가 그런 죄악 때문에 더러운 몸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잘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더 좋은 것을 선물하려 해도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을 수 없다는 마음 때문에 아빠의 선물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지금 불끈 쥐고 있는 껌이 더 좋은 거예요. 장난감이 더 좋아요. 그것이 돌멩이나 조개껍질이라도 그걸 놓지 못하는 거지요. 때로는 독약일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주는 선물을 받으려 하니 두 주먹에 불끈 쥐고 있는 것이 아까워요. 그래서 웁니다. 이것은 성령을 사모하지만 죄를 포기하기 힘들어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빛을 사모하지만 어둠을 청산하지 않으려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성령을 받으시려면 성령에 충만하시려면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시려면 이 죄를 쫓아내야 합니다. 붙들고 있는 이 죄악을 추방해야 합니다. 토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의 삶입니다.
이 회개는 누구 앞에서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 앞에서도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19절, 20절과 22절을 보면 우리의 모든 죄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을 전제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원히 계십니다.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오래도록 주님. 우리의 죄를 다스리시려 하십니까? 우리를 잊으셨습니까? 이렇게 오래도록 버려 두십니까? 이다지도 우리가 지은 죄를 미워하고 계십니까?” 물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신다”고 시편 기자는 확신을 가지고 노래합니다(시 103:3).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는 자의 눈물을 외면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며 찬양드릴 수 있습니까? 경외함으로 찬양드려야 합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형수가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회개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 해도 나라의 법으로서는 그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사형을 집행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회개의 순간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귀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16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살인자 김대두. 그는 감옥 안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거죠.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처형이 되던 날 그는 이런 마지막 말을 우리들에게 남겨 두고 있습니다. “지난 날의 모든 죄 회개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그 빚을 갚을 길 없습니다. 죽음으로 사죄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우리는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꼭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채 인사도 다 못 드리고 떠납니다. 김집사님, 임집사님. 그 외 형제 자매님께 소식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는 큰 소리로 “아멘” 외치며 처형대 앞으로 나아갔다 합니다.
성도 여러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까?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까? 나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까? 죄를 짓기도 하지만 얼른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까?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짓고 나서 죄를 지적당하자 철저히 회개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시편을 읽으면 다윗이 얼마나 철저히 통절하게 회개하고 있는가를 가슴 뭉클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란 어떤 것일까요?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시지요. 영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성령께서는 회개의 삶을 주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주님을 주목하고 주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죄사함의 은총과 그 외의 온갖 은혜를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과 계획에 맞추는 것. 그것입니다. 나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를 주님 발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엄청난 씨름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도우시니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게 아닙니다. 성령님도 도우시지만 나도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의 열매가 우리의 마음을 덮습니다. 우리의 삶을 덮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날이 다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옛적 같게 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 때의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회개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회개는 당연히 삶의 변화를 몰고 옵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직 회개의 끝이 아닙니다. 최상의 회개는 삶이 변화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삶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헐벗이라는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일 분도 안 걸린다.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것은 결코 길지 않다. 그러나 참회하고 개선하는 데는 평생이 소요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누구나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자만이 드디어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삶은 회개한 자가 보이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큰 소리 쳤음에도 불구하고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입니다. 주님 잡혀가시는 현장에서도 먼 발치서 따라갈 수 밖에 없던 베드로. 골고다 언덕 십자가 운명의 자리에서도 도망쳐 있던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양 떼를 먹이라 양떼를 치라”라는 사도권 회복의 용서함을 누리고 나서 그는 일어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습니다. 회개의 삶은 성령 충만한 삶으로, 주신 사역을 능히 감당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초대교회의 그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수천 명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능력의 삶, 전도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드디어는 하늘의 천사도 흠모하는 순교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우선 내가 범한 죄악 앞에서 나의 가슴을 찢으며 즉각 회개하는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내가 아닌 남의 잘못을 예민하게 살피고 찾아내는 삶이 아닙니다. 무슨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내 탓이요”지 “네 탓이요”가 아닙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 맡기신 사명 붙들고, 성령의 권능과 은사로서 충성하며 봉사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일생을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삶이요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은총을 우리 모두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