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학사의 쓰라를 사용하셔서 일으키신 말씀의 대부흥을 목격했습니다. 상하고 지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수가 떨어지면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루종일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영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말씀 듣고 은혜만 받고 끝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초막절을 다시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막절은 그들이 광야 시절 아무것도 없던 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광야 시절에 주님과의 첫사랑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초막조를 준수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흘려보내주셨습니다. 이제 그 놀라운 기쁨과 은혜의 부흥성에 불을 지피는 일이 또 오늘의 본문에서 계속됩니다. 1절 읽습니다. 그달 숨은 나흘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배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달 20 낳은 날 즉 7월 24일에 다시 모였다고 했습니다. 초막절을 지킨 후에 부흥성애를 가진 다음 단 하루의 공백기를 거치고 바로 다시 대집회로 모인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거예요. 최고의 음식을 한번 맛보고 나면은 그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저희 동네에도 아주 유명한 재래교포 분이 하시는 빵집이 있는데, 하루에 빵을 800만 원어치를 팔아요.
8시에 문 여는 데 11시 가면 이미 다 떨어져 있어요. 사람들이 그 빵을 1번 먹고 나면은 계속 오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사모해서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모이는 거예요. 추정 예산 3만에서 5만 정도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서 은혜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가슴에 은혜를 갈망하는 목마름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도 성령께서 그런 마음을 부어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부흥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오는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방금 얘기했듯이 영적인 목마름이 있어야 되구요.
둘째는 예외 없이 모두가 다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했어요. 그 누구도 말씀을 안 들어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어린 사람 나이 많은 사람 다 나와야 돼요.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다 나와야 돼요. 초신자 기성 신자 다 나와야 되는 거예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예외 없이 닿도록 된다는 그런 목마름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들이 겸손히 낮은 자세로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1절에 보니까 그들이 금식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티끌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습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임지 앞에 나올 때는 세상 계급장을 떼고 들어와야 합니다.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낮추고 자신의 죄를 훤히 보시는 주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겸허히 나오는 것이 바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겸손히 애통해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위로를 주십니다. 2절 읽습니다. 모든 이왕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방 사람과 절교했다는 것은 민족주의나 인종차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 사람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세상적 가치관에 젖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과 교제를 끊어야 된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말합니다. 아니 그들과 교제를 끊으면 누가 그들에게 전도 합니까?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영성이 약한 채로 그런 세상적인 사람들과 교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인격적 삭임을 계속 하고 있으면 내용이 무너진다는 거예요.
타락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10편에도 보면 복 있는 자는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거룩은 순결해서 나와요. 관계가 굉장히 중요해요. 죄도 관계를 통해서 흐르고요. 거룩도 관계를 통해서 흐릅니다. 여러분이 부흥을 체험했으면 여러분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던 세상 친구들과 거리를 둬야만 됩니다. 그래야지 더 큰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다섯 번째로, 그들은 열정과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3절 이날의 낮 4분의 1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4분의 1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여기서 낮 4분지1은 3시간을 말하는 거예요. 낮 시간 3시간을 꼬박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미국의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연화단 에드워드 목사님도 그 약하고 미세한 음성으로 촛불 앞에서 설교 원구를 읽기만 하는데도 기름 부심이 너무 강렬해 가지고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떼굴떼굴 회개하면서 마룻바닥을 굴렀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흥은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량이 강렬하게 역사에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처럼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섯 번째로, 그들은 진정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낮에 3시간을 3절에 보니까 말씀을 듣고 그 다음 4분지 1 즉 3시간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썼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시간만큼 각자 자신의 영혼 속에서 말씀을 씹어 소화하는 시간을 가진 거예요.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상황 상황에 따라서 맞춤 서비스를 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각 사람이 자기와 하나님만이 아는 아주 특별한 죄를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다루어 주신 거예요. 오늘 저는 오늘 예배가 끝난 뒤에도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여러분 각자의 상황에 맞춰서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회귀하고 새롭게 되는 그런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휘감아 치고 들어오면 2가지 일이 일어나요?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고 또 하나는 내 자신의 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선하심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면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내 자신의 죄 실체를 더 깊이 보게 되면 회개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3절에 그들이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하는 거예요. 사제를 보니까 레위 사람들이 단위에 서서 큰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회기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자신은 완전한 사람들처럼 폼잡고 있는 게 아니에요. 순장은 영적 지도자죠 순장이 먼저 말씀 앞에 회귀하는 모습을 보일 때 순원들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영적 지도자들이 우리 목회자들이 장로들이 집사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일 때 역설적이지만 우리의 영적인 권위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이제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고 경배하게 됩니다. 5절 6절 또 레위 사람 예수와와 감미엘과 바니와 하삼리아와 세레바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보다히아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혼부터 영혼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우와를 송축할 지어다 쥐요 쥐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기하여 모든 성충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 나이다. 오직 주는 여호와 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 위에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죽게 경배하나이다. 자 네 여러분 말씀의 부흥을 체험하고 나니까 이제 예배하는 자세가 달라져요 그전에는 내 상황이 급했어요. 그래갖고 내 힘든 문제를 막 쏟아놓는 걸로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 현실이 너무 삭막하면 하나님을 작게 봐요. 자꾸 크신 하나님을 끌어내려서 땅에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요 그러나 그것은 예배가 아니에요. 예배는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지. 하늘을 나에게 끌어내리는 게 아니에요. 그분의 높고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취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7절부터 이 구장 끝날 때까지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반추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믿음의 시각으로 보는 거예요. 무엇을 보는가 이상으로 중요한 건 어떤 시각으로 보는 거거든요.
은혜를 받고 나니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보기 시작합니다. 7절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데아 우루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부르시는 데서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여러분 한 사람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께서는 먼저 글을 우르에서 끌어내셨어요. 우르는 아브라함의 고향입니다마는 동시에 고대 중동에서 굉장히 잘 나가는 도시였어요. 화려하고 풍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양신을 섬기는 우상숭배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다 우상신 조각해서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그 땅에 그대로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의 비전의 역사를 만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환경에 노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풍요롭고 익숙한 우루 땅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거야. 그리고 축복의 사명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거기서 운명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한민족의 아버지란 뜻이지만 아브라함은 열방의 아버지예요. 그때부터 운명이 바뀐 거예요. 우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민족만 보고 살았어요. 자기 가족 자기만 보고 살았어요. 그냥 자기만 복 받으면 되는 인생이었어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축복의 종착역이 아닌 축복의 통로로 쓰기를 원하셨어요. 한민족뿐 아니라 열방이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나만 알고 살았어요. 내 가족만 알고 살았어요. 축복을 나만 다 받아서 가지고 있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면서 우리가 축복을 열방으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어요. 새로운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은 우리만 부흥하라는 축복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부흥의 열기를 생기를 흘려보내 라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의 인생 부르심의 인생을 가는 사람에게도 위기는 옵니다. 9절 10절 읽습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국에서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그들이 우리의 조상들에게 교만하게 행함을 아셨습니다.
주께서 오늘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가장 무서운 아픔은 이집트에서의 혹독했던 400년 노예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일제 치하해서 36년 보냈는데도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어요. 아직도 일본이라는 존재는 우리 민족의 뇌리 속의 트라우마예요. 그런데 이국 땅에 끌려가서 400년 노예 생활을 했을 때 최강대국 이집트가 400년 동안 그들을 압제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이집트는 너무나 무서운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신 거예요. 너희들을 그토록 두렵게 하던 이집트를 내가 공포에 떨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너무 그들은 좋았습니다.
의기양양 이집트를 탈출해서 나왔는데 기쁨은 잠시 곧 홍해 앞에 턱 가로막혀 버렸습니다. 앞은 넘실거리는 바단데 뒤에는 구천기의 이집트의 전차대가 쫓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또 개입하셨습니다. 11절 읽습니다. 또 주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사 그들이 바닷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들을 돌을 큰 물에 던진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바다가 갈라지면 대부분 길이 생겨도 갯벌이 됩니다. 그러나 갯벌이 아니라 마른 땅이 되었고 그들이 건너는 동안에 세계 최강의 전차대가 수장되었습니다. 기적같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슬아슬하게 9회 말로 역전이 된 거예요. 살아난 거예요.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홍해 사건 같은 엄청난 위기 속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살아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그랬습니다. 일제 36년 통치가 조금 더 갔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한국전쟁 때 우리는 순식간에 몇 달 만에 나라 전체를 노지고 이제 낙동강 전선까지 무너지면은 전부 다 부산 바다에 빠져 죽어야 되는 위기까지 갔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살려주셨어요. 민족의 역사도 그러했거니와 우리 개인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홍해바다의 위기와도 같은 위기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저와 여러분을 구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오른팔을 우리가 다시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우리가 다시 한번 그 과거의 믿음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홍해를 갈라주시고 우리를 구해 주셨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홍해도 갈라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홍해를 지나 의기양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광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보면 홍해같이 순간에 극적이고 엄청난 위기도 있지만 길고 지리한 40년 광야 생활 같은 힘든 고통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광야는 홍해와는 또 다른 고통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한없이 외롭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른 곳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버겁게 느껴집니다. 밤이 되면 빨리 아침이 됐으면 좋겠고 아침이 되면 빨리 해가 졌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은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광양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를 통과시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남아있는 400년 이집트의 노예 근성이 부서지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엄청난 하나님의 영성훈련 학교야 기도의 용사 믿음의 용사 중에 광야 스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러나 광야가 죽을 만큼 힘들지만 죽진 않는다는 거예요. 죽을 뻔했죠. 그러나 죽지는 않죠 광야는 연단의 장소이지 무덤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곳이지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아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꼭 죽기 일보 직전에 구원 피칭을 하시기 때문이야 꼭 순간순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구원의 손길이 있어요.
여호와 일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손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스쿨에서 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육체의 피로를 광야에서 채워 주셨어요. 광야에서 그들의 절실한 육체 필요는 3가지예요. 첫째, 보호하심이 뜨거운 햇살로부터 밤의 추위로부터 적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해줘야 되고요. 또 하나가 길을 찾는 거 누군가 인도해주지 않으면 지도가 없는 그 길을 뚫고 나가야 되고 세 번째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몇백만이 엄청난 일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12절 15절을 보면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순례 내년에 우리 가는데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6월달에 갔는데요.
진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행했던 광나로 갔는데 40년 아니라 40분 있는데, 죽겠더라고요. 그냥 제 머리에다가 달걀을 누가 톡 치면 계란프라이가 돼버릴 정도로 뜨거워요 이거는 그냥 가만두면 일사병 걸리겠더라고요. 하나님께서 300만 이스라엘 민족 위에 구름기둥을 치셨기 때문에 그게 자연 원두막이 돼 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을 살린 거예요. 밤에는 얼음처럼 추워요 어떻게 버팁니까 불기둥이 완전히 무공해 히터가 돼 가지고 그들을 살린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와 식수를 해결해 주십니다. 15절의 부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런 실질적인 피로를 반드시 채워주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지금 광야 같은 현실 속에서 당장 내일 먹을 만나와 외추라기가 없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을 굶기지 않고 먹이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피로도 채워주셨어 13절 읽습니다. 또 신의 사내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정직한 율법과 선한 윤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시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어요. 특히 하나님의 백성은 그래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광야에서 하나님은 알려주십니다. 광야의 축복을 신의 산에서 하나님과 만난 거예요.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주시는 거야. 광야라는 히브리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히브리어랑 같은 어근에서 나와요.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흡수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로고스 말씀이 살아 역동하는 레마의 말씀이 되어 내 안으로 쑥쑥 꽂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말씀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곳이 바로 광야인 거야. 하나님은 이렇게 광야에서 그들을 육적 영적으로 돌보셨음 그러나 그들은 땡큐 한마디 없습니다. 절을 해도 시원찮은 하나님 앞에 그들은 사사건건 불순종과 배신을 일삼습니다. 16절 17절 그렇습니다.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곧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폐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극률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라 암행 지금 이 얘기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반역 사건을 말하는 거죠. 그들이 교만해서 불순종했다. 이 말이 지금 무슨 말입니까? 이 가데스 반야 앞에서 이제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되는데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온 정탕꾼들이 약속의 땅은 기름지고 좋지만 거기는 빈 땅이 아니다. 엄청나게 무섭고 사나운 거인족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싸워봤자 상대가 안 된다. 돌아가자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 초상집처럼 울면서 그래 우리는 상대가 안 돼 거인족들과 마주하면 죽을 거야. 그러면서 자기들이 우두머리를 세웠어요. 돌아가자 그랬어.
모세를 불신임 투표해버린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의 공동체가 민주주의 다수결로 했으면 모세는 불신임 투표됐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다수결로 뽑아서 자기들 지도자 뽑아서 애국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 난리 치고 나왔는데 애국 사람이 살려줬겠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건 뭐냐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교만하고 불순종하니까 그들은 주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기억하지 않았어요. 홍해를 가르신 일도 잊어버렸음 만나를 내려 먹이신 일도 잊어버렸어 이집트의 10가지 재앙도 까맣게 잊어버렸음 문제만 보이고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손길은 까맣게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모세를 불신임하고 애국으로 돌아가자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배신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부어졌습니다. 19절 21절 읽습니다. 주께서는 주의 크신 궁렬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갈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또 주의 선한 용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쥐에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40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이래서 하나님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겠어요.
그렇게 잘해줬는데 결정적인 때 불순종하고 패역하고 우상숭배하면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 야 구름기둥 한 사흘만 걷어버려라 얘네들 좀 1번 읽어보게 해라 그러면 내 고마움을 알 것이다. 불기둥한 사흘만 좀 걷어봐라 밤에 좀 시원하게 자게 자연금식 한 3개월만 시켜 한 3일만 시켜봐라 만날을 끊어버리죠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정말 그렇게 아니면 쟤도 광양에 그냥 버려라 왜 쟤들 내가 데리고 가야 되는 것이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들은 악했지만, 하나님은 선하셨고 선한 하나님의 영을 주사 그들을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끝없는 끝없는 승리를 주셨어요. 22절 읽습니다.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그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심에 그들이 시온의 땅 곧 해수본 왕의 땅과 바산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해수본은 사해를 기점으로 한 북쪽 24킬로미터 지점에 요단강 동편성읍입니다. 이곳은 가난해서 가장 사납고 강력한 아모리 족속에 장악하고 있는 땅입니다. 시온이 바로 그 해수본의 왕이었고 파산왕 옥도 무서운 거인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인가는 온 천지 사람들이 다 알았기 때문에 될 수 있도록 그들의 땅은 피해 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과 정변돌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길 수 없는 적을 하나님이 다 물리쳐 주셨어요. 하나님은 그토록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어떤 문제도 이길 수 있는 강한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 에스라가 이끄는 말씀 부흥을 통해서 은혜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자신들의 그 광야 생활 동안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기 시작한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자신들의 과거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 거예요. 인간의 뇌가요 가만두면 항상 부정적인 기억들이 긍정적인 기억들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10사람이 아주 열정적인 칭찬을 했다고 해도 1명의 안티가 아주 무서운 비난을 하면 그 가수의 뇌리에는 10명의 칭찬이 아니라 1명 안티의 비난이 딱 각인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생각 속에 텔레비전이 프로그램이 상영되고 있어요. 채널이 2개인데 첫 번째 채널은 마귀가 돌리는 채널이에요.
그 채널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과거의 아픔에 대한 기억과 우리의 실수와 실패와 우리가 받았던 상처에 대한 기억들이 집중적으로 편집돼서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팝콘과 콜라를 넣고 그 앞에 앉아서 몰입하면서 봅니다. 그래 10년 전에 저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왜 내가 저 말에 속았지 특히 마귀는 하나님이 주관하신 광야의 역사를 나쁜 쪽으로만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왜 애굽에 잘 있던 나를 광녀로 끌어내 가지고 생 고생을 시키는 거예요. 이게 뭐야? 원본과 불신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과거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돌리는 내 인생의 채널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불행해져요 분노가 일어나요? 용서할 수가 없어요. 트라우마에 걸려요 너무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러고 살아요.
그러나 채널을 하나 우리가 돌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손에 믿음의 리모컨이 들려있어요. 우리가 순식간에 채널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스의 보열의 능력으로 채널을 바꾸면 거기에는 예수님이 틀어주는 승리의 기억을 담은 채널이 보입니다. 광야가 있었지만 광야를 통해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거예요. 대적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그 대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모이기 시작해요.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돌파했던 기억들이 다시 재상영되기 시작합니다. 그걸 말씀을 통해서 영이 살아나면 우리는 믿음의 채널로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완전히 다르게 보여요.
히트 윌슨이라는 미국의 차세대 지도자 목사님이 계신데, 그분 책에 보니까 한번은 미국의 한 도시로 집회를 갔대요 에 집회 시간이 빠듯해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수가 이 필리핀에서 온 사람이에요. 근데 가는 길에 곳곳에 도로 건설을 공사를 하느라고 교통체증이 걸렸대요 시간이 없는데 그래갖고 피트 윌슨 목사님이 짜증이 나가지고 왜 공사를 갖다 낮에 해가지고 말이지 밤에 하지 이렇게 집회시간 늦었는데 이놈의 나라는 왜 이렇게 이렇게 시스템이 안 좋은 거야.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하던 필리핀 운전수 아저씨가 에즈니로 원더풀 컨트리 정말 좋은 나라죠 그래서 무슨 얘기냐 그랬더니, 이 나라는 이렇게 도로가 부서지면 바로바로 고쳐주지 않냐고 필리핀은 돈이 없어 가지고 정부가 도로가 부서져도 고쳐주질 않는데요.
정부에서 그리고 돈이 있어도 높은 사람들이 다 해먹어 가지고 부정부패가 심해서 국민들을 위해서 길 고쳐주고 이런 거 안 한대요 그런데 미국은 이렇게 나라가 돈이 많고 또 친절해 가지고 부서진 도로 가만 안 놔두고 항상 고쳐주니까 너무 좋은 나라라는 거죠.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 목사님이 회개한 거예요. 야 나는 수십 년 동안 미국 살면서 이 나라가 좋은 나라란 걸 몰랐구나 공사 때문에 교통체증만 생각했지 도로가 부서져도 나라가 그걸 고쳐주지 않는 나라가 세계 대부분이라는 걸 몰랐구나 마찬가지예요. 마귀는 항상 광나의 아픈 것만 보게 해요. 우리 인생의 고통과 실패와 실수만 보면서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줘요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나면 영원히 열려요 믿음의 시각으로 인생에 고통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돼요. 광야의 아픔이 아닌 광야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가 힘들었죠.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오아시스들이 곳곳에 있었죠. 사람에게 배신당했죠. 그렇지만 또 뜻밖의 여러분에게 은혜를 준 은인들도 있었죠.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억하십시오. 구름기둥 불기둥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끔찍한 대적들로부터 어떻게 여러분의 건져내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힘든 것에 집중하지 말고 그 가운데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지나보고 나니까 그 끔찍한 홍해가 뒤로 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건너왔는지 모르겠죠. 설명이 안 되죠. 은혜로 건너온 거예요. 우리가 저 큼직한 적을 어떻게 이겼죠.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홍야를 가르시고 광야 속으로 인도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순종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 시키셨지만 죽이지 않으신 끝까지 붙잡고 오셨습니다.
이제 말씀 부흥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철이 드니까 이제 자기의 인생을 돌이켜 보며 영적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 거야. 광야의 은혜를 깨닫게 된 거예요. 그들을 괴롭히던 적들이 다 사라졌다는 걸 보게 됐어요. 이것이 새로운 부흥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에 과거에 실수 안 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내 손으로 내 발등 찍었던 실수 안 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며 살 것입니까? 여러분을 배신하고 고통 준 그 사람을 계속 묵상하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그 가운데서도 역사했던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날 것입니까? 믿음의 눈으로 죽을 것 같았던 광야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 다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아픔이 아닌 은혜를 붙잡고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되는 광야같은 세상 속에서 살리실 줄 믿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