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이유? 1. 죽음
둘째, 죄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첫 번째 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그러자 아담 대답합니다. “예, 제가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죄인의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셋째,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였습니다. 형은 야곱을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부모님의 집에서 형과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야곱을 외삼촌 집으로 보냅니다. 먼 길을 가는 중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렵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입니다. 외삼촌의 집에 잘 당도할 수 있을지, 거기서 얼마 동안 있다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잘 돌아올 수 있을지,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미래는 정말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문제들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베드로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재판 받으실 때 그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수제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에 가서 당당하게 항의해야 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멀찍이 숨어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집의 여종 하나가 묻습니다. “당신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지요?”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 여자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저 사람 몰라”부인합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담대하지 못한 모습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후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후 이제는 그의 제자들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숨었습니다. 왜요?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핍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즈음 제일 큰 걱정거리가 무엇입니까? 사실 걱정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담대한 사람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무서운 재판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왜 여기가 무서운 자리일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이 자리는 열세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재판하는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71명입니다. 여기에 맞서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두 사람입니다. 71대 2입니다. 그러니 열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의 어부 출신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수적으로나 실력에 있어서 열세입니다.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이 자리는 며칠 전에 예수님에 대해 십자가 처형을 구형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였으니 이젠 제자들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가 무서운 자리입니다.
그런 무서운 자리인데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을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조건 하나를 달고, 사도들을 훈방 조치하는 것으로 판결을 내립니다. 조건 하나란‘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말하지 말라’
여기에 대해 사도들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두 마디 담대한 말을 했습니다.
첫째, 너희의 말 틀렸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너희의 말 들어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들어야 하느냐? 너희가 옳지 않은 말을 하는데 그래도 너희 말 들어야 하느냐? 너의 말, 틀렸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계속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는데, 이들은 계속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모습인지 모릅니다.
루마니아에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공산당에 붙잡혀 14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옥살이하는 중에 있었던 일들을 책으로 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간수는 그 말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 말하지 말라. 말하면 때리겠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매를 맞았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 이야기해서 좋았고, 간수는 때려서 좋았다”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담대함의 원천>
사도들은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하나님 앞에 있었기에.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 앞에는 산헤드린 공회원 71명이 있습니다. 살기등등하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사도들에게는 어떤 의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있다’ 이 의식이 있었기에 하나님 말씀을 말할 수 있었고, 진실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입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했습니다. 신부직을 박탈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루터를 처단하라고 했습니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황제는 루터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제후들과 국민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는 한 가지 계략을 꾸몄습니다. 루터를 보름스 국회에 소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루터를 매장시키려고 했습니다. 거기는 루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만 참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95개 조항을 철회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그때 루터가 적당히 둘러 대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다.”그가 어떻게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국회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햇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내가 당신들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식, 이 신앙이 그를 담대하게 만들었고, 용기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이 의식, 이 신앙을 가질 때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거짓말 안 할 용기가 생깁니다.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용기가 셍깁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담대함입니다.
둘째, 성령 충만했기에
4장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했기에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까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웁니다. 가치관도 배우고 세계관도 배웁니다. 말하는 법도 배우고 듣는 법도 배웁니다. 사랑하는 법도 배우고 용서하는 법도 배웁니다.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빵도 준비해 놓으시고, 물고기도 구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과거 이야기 한 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같으면 ‘베드로야, 아니 한번쯤 모른다고 하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느냐? 그것도 맹세까지 하고, 또 저주까지?’그러나 예수님은 책망도 안 하시고, 과거 이야기도 안 하셨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아이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말썽을 많이 부리는 아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때려 치료비도 여러 번 물어줬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갖고자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전거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일주일동안 사고 안치면 자전거 사줄게”아이가 자전거 갖고 싶어서 꾹 참고 일주일동안 사고를 안쳤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약속대로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 한마디 합니다. “너 이렇게 착한아이인데, 왜 지난날에 그렇게 사고를 많이 쳤느냐?”그랬더니 얘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나 그 말 나올 줄 알았어. 자전거 안가진다”하고 나갔다고 합니다. 과거를 왜 물어봐요? 과거를 왜 들춰요? 예수님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과거 이야기 한마디도 안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도 배우고, 예수님의 마음도 배우고, 예수님의 행동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배웠으면 배운 대로 따라야 합니다. 말 하는 법 배웠으면 배운 대로 말해야 합니다. 듣는 법 배웠으면 배운 대로 들어야 합니다. 이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배운 것 따로, 행동 따로 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성령께 붙잡힌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해도 잘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로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셔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인도하셔야 합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어야 합니다. 성령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때 담대하고, 용기 있게 되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