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도착한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그 가련한 여인을 사로잡았던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이처럼 누가 봐도 선한 일을 한 바울에게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이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돈을 숭배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 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한 여인이 귀신에 들려 정신과 의지가 속박당한 채 살아가는 것은 분명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당연히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받아야 할 안타까운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가 귀신으로 인해 점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용해 돈 벌 생각만 할 뿐 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귀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주인들에게 있어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그 여종을 통해 어마어마한 복채를 챙겨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익명의 주인들은 한마디로 돈을 구원으로 알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에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채 다른 사람의 존엄과 아픔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들의 부당한 수입을 가로 막은 바울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품으며 로마 제국의 사법 당국에 넘겨버렸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빌립보 감옥의 교도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 제국의 공무원입니다. 이는 당연히 로마의 질서와 가치관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는 황제를 구원으로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중대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근무하고 있던 감옥에 웬 이교도 둘이 잡혀 왔습니다. 그들은 제국이 허락하지 않은 불법적인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내용은 로마의 반역범으로 처형당하고 다시 살아난 이스라엘 시골 갈릴리 사람 예수가 진정한 주님이라는 지극히 불온한 선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 황제의 통치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위험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기도하고 찬송하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이 흔들리고 문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묶어뒀던 수갑과 차꼬가 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 들까요? 당연히 모든 죄수들이 그 기회를 틈타 달아났을 거라 예상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곧 교도관으로서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되고 사형에 처해져도 할 말 없는 엄중한 중죄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다짐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큰 소리를 질러 그의 행동을 제지 하였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제자리에 있다며 안심 시켰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교도관은 등불을 들고 달려가 바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순간 둘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 되었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감옥 같은 현실도 초월하여 오히려 죄수가 간수를 걱정하는 모습, 간수보다 더 넉넉한 은혜로 간수의 영혼을 소중히 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그에게 로마의 반역범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전하는 참된 예언자 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본문 30절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동시에,
앞서 말씀 드렸듯이 그 교도관은 지금까지 황제를 구세주로 외치며 그가 보장하는 안전과 그가 베푸는 빵이 구원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엄습한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구원이 더 이상 구원이 아님을 깨닫고 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지금 상황에서의 구원으로 시작해서 영적인 구원으로 확장시켜 갑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가정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를 너무나 당연하고 뻔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그 시대,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결코 얕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통치에 대한 개념입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착취했던 주인들에게는 돈이 구원이었습니다. 로마의 질서 안에서 기득권을 누린 사람들에게는 제국의 힘과 풍요가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고 외칩니다. 그 위대한 희생이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세상을 구원하는 은혜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범위는 절대로 영혼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영역은 절대로 내세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현세와 내세 그리고 온 세계와 우주를 아우르는 다스림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은 십자가와 부활을 온 인격과 존재로 살아내신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믿고 전하는 삶은 곧 더 이상 돈을 숭배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권력에 눈길을 고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 대신 좀 더 낮아지고 비우고 섬기는 삶을 뜻합니다. 그 구원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부디 이와 같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시대의 바울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