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베소에서의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로 놀라운 부흥을 이룬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21절).
여기서 ‘거기’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계획한 것은 그동안의 선교보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선교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언제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고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여행을 마치면 항상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행동을 보면서 믿음과 겸손은 서로 비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바울이 이 어렵고 험난한 전도 여행을 마친 후에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힘들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에베소에서와 같이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을 때에도 이에 만족하여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마까지 보아야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삶에 있어서 복음전도, 곧 생명을 구하는 일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의 끝없는 욕심을 위해 살아가는 자도 아니요, 반대로 아무런 비전이나 꿈도 없어 체념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아닙니다.
성도는 바울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복음전도, 곧 사람을 살리는 일에 비전을 품고,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품안에 있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이웃과 지역 사회를 바라보고, 우리나라의 소외된 지역을 바라보며, 더 나아가 북한을, 아시아를 그리고 땅 끝까지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매순간 더 큰 세계를 향해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일은 꼭 내 몸이 땅 끝까지 가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물질로써, 기도로써, 교육으로써, 선교사를 길러내는 일로써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복음전도의 길이 무엇인지 찾아서 ‘생명을 살리는 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그런데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23절).
여기서 ‘도’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난 것은 바울이 ‘사람이 만든 것은 참 신이 아니라 헛된 우상’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26절).
사실, 우상을 떠나라고 부르짖은 바울의 외침은 당시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에베소 사람들에게는 생업과 자존심의 근거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 중대한 위협이요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제조업자였던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무리가 바울을 제거하고자, 에베소 전체가 들썩일 만큼의 큰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 그 자체는 화목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복음이 처음 전해지는 곳에서는 평화 이전에 심각한 혼란과 분쟁이 발생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이 지니는 역동성과 복음이 가진 평화의 역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부르며, 한없어 온순하고, 인자하고, 부드러운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부드럽고 다정하며, 따뜻한 말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세상이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상과 타협하고 합리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히려 이러한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에 대해 준엄하게 경고하고, 거기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먼저 혼란과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일어납니다.
한 개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를 받아들인 사람의 영혼 속에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하던 악한 영들과 잘못된 삶의 방식과의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롬7:15~).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싸움은 한 개인을 넘어 피를 나눈 가족과의 관계로까지 확장되고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마 10:35).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4).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파되는 곳에서 아무런 문제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 복음이 오히려 이상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합니다.
오늘날 이처럼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이 시대의 악에 대해 도전하고 경고하며, 영적 투쟁을 올바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시대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이 시대의 악과 타협함으로써 거짓된 화평과 안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처럼,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예수님처럼, 이 땅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회개의 불을 던져 이 시대의 모든 거짓되고 더러운 것들을 태움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3. 이 모든 소동의 주동자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24절).
그는 은으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던 은장색이었습니다.
당시 아데미는 헬라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었고, 또 에베소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많은 우상숭배자들이 에베소에 경배하기 위해 왔었기 때문에 그는 우상을 팔아 많은 돈을 벌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 인해 우상을 믿던 자들이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상판매에 심각한 타격을 입자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데미에 대한 신앙이 있어 소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돈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아데미에 대한 신앙을 들먹이며 에베소 사람들을 선동했지만 그 내막에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에베소의 종교인 아데미 신앙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종교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에게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예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돈이 아니라 권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인되는 크리스찬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자기의 이기적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 같은 자들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가려내고 엄히 징계함으로써 교회가 악한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의 통로입니다.
늘 이 사실을 기억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