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사도행전 13:13-31

yt1981 2023. 7. 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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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입니다.
그러하기에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의 심정을 갖고 읽어야 합니다.

 

1. 먼저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라고 말씀합니다(13절).

여기에서의 요한은 마가복음을 쓴 마가 요한을 뜻하는데, 본문에는 그가 왜 돌아갔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 이유를 ‘부잣집 아들이었던 마가에게 선교여행은 너무 힘겨운 것이 아니었나?’ 하고 짐작합니다.

마가가 부잣집 아들이라 고생을 안해봐서 중도 탈락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사역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쉽고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어제 본문에서도 보았듯이 항상 마술사 엘루마와 같은 악한 자들이 자신의 불의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모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복음 전도자는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장하여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1:24 이하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당한 고난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8에서 ‘자신이 이러한 고난을 기꺼이 받은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믿지 않고서는 결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떻게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서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루려 날마다 하나님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복음의 일꾼이 될 수는 없겠지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상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성령 권능 부어주셔서 주의 일꾼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다 말씀합니다(14절).

지금까지의 전도여정을 살펴보면, 바울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실루기아로,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에 도착하여 도보로 180km나 되는 섬을 횡단하며 복음을 전하며 구브로섬의 행정도시인 바보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총독 서기오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제 다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도보로 160km를 걸어가며 복음을 전하다 오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버시디아 안디옥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타우루스산을 넘어야 하는데, 이 산에는 ‘산적’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의 위협을 무릎 쓰고 이 산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행보는 사명자의 본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사명자의 본분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말씀을 가르치셨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수님 곁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아닙니다.
제자로 자처하던 수많은 군중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셨던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열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요 6:68)

남이야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보를 취하든 예수님께 생명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기에 사명자는 믿음으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사명자란 성공자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넓고 편한 길을 지향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을 따르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주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리고, 사명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갈지라도 끝까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고 나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사명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3. 이어지는 17절부터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예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증언합니다.

이 내용들은 시간상 다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만 한 번 살펴본다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권능으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은 것은 모세의 탁월한 지도력도, 그들 스스로의 힘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한 그들은 시내 산에 도착하기 무섭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물과 식량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애굽이 그립다고 노골적으로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이들의 원망과 불평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 백성을 전멸시키고 모세를 통해 새 백성을 만들겠다.’라고 까지 하셨습니다(출 32:10).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왜 참으셨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하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몰라봤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예언을 깨닫지 못하고 종교적 광기와 열심만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전문가로 자처했으나 진정한 그 뜻에 대하여 깨닫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에 이미 기록된 예언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목격했으며, 바울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깨닫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도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은혜의 말씀을 더 듣기를 원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때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라”(43절)

 

바울의 이 권면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혼들은 반드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처럼 그러한 영혼들을 잘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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