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사도행전 14:1-18

yt1981 2023. 7. 24.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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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에 도착한 두 사도는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1절).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사도는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호되게 박해를 당했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힘만으로 안 되니까,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면서까지 두 사도를 쫓아냈습니다(13:50).

이쯤 되면, 아무리 자기 민족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포기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먼저 찾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전도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끝까지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도 공생애 내내 자신을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가라고 친히 주문하셨습니다(마10:6).

그런데 요즈음은 이러한 관용을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원수 대하듯 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쉽게 포기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음의 정신은 잘잘못을 따지는 충고보다는 관용하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고 바로잡는 사람이 아니라, 관용함으로 용서하고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잘못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관용을 배워야 합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그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빌4:5)

 

2. 그런데 두 사도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머물렀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이고니온에서는 ‘허다한 무리’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새 성도들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오래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양육은 바울의 선교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2년’을 가르쳤습니다(행19:10).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가르쳤습니다(행18:11).
수리아 안디옥에서도 ‘1년’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인수가 많으면 무엇 합니까?
양육이 되지 않으면 작은 고난에 흩어지고 맙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원망과 불평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탁합니다.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4-9 말씀을 통해 후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강하게 권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진정한 신앙인은 기적을 체험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11장에서 수리아 안디옥의 성도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난 이후에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의 손길을 펼쳤습니다.
전 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육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열심히 가르치고, 성도들은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입니다.
양육을 통해서 전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양육은 우리의 열심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3절 함께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시니”

‘사도들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사도들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은 주께서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알게 합니다.

전도자가 힘있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결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도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철저히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감동시키실 자를 감동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자기의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전도자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3:6-7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으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것이 전도자의 바른 생각이요 태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시며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때에 따라서 기적도 주시고 표적도 주셔서 그 열매 맺음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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