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사도행전 14:19-28

yt1981 2023. 7. 2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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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19)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했는데, 그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믿어 제사 지내려던 바로 그 루스드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의 여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땅으로 간 바울과 바나바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비시디아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교 지도자 무리가 바울을 시기하여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결국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100마일 이상 떨어진 이고니온(지금의 코니아)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관리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을 떠나 서남쪽으로 약 3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부터 거리를 따지면 루스드라는 약 140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지금 자동차로 가도 프리웨이를 70마일로 달려서 꼬박 2시간을 가는 거리인데, 바울이 루스드라에 나타나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루스드라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이고니온에 전해졌고, 또 루스드라에서 14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전해졌습니다.

 

그 소문으로 인해서 바울에 대한 시기심과 증오심에 다시 사로잡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서로 모의하여 함께 루스드라로 습격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세기 당시 교통 여건을 감안할 때 소식이 들려오고 그리고 가기까지 아무리 짧아도 최소한 2주 정도가 걸립니다.

 

그 두 주 동안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제사 지내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사도들에 대한 루스드라 사람들의 존경심은 더 커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를 찾아와서 무리를 충동한다고 해도 그다지 큰 영향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19절은 우리의 예상을 뒤집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선동을 당한 루스드라 사람들 무리가 바울을 돌로 쳤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죽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심하게 돌로 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을 신으로 믿고 제사를 하려 할 정도로 바울을 신봉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이었는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충동하니까, 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죽일 마음으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헬라인)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 거주자가 적었기 때문에, 루스드라 사람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평소 별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루스드라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유대인들의 충동에 자신들이 존경하며 떠받들던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돌을 들어 쳤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을 했기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모시고 제사까지 지내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칠 정도로 된 것입니까?

 

당시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믿고 있었고, 그리스 신화 속의 열두 신들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치유하니까 곧장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믿을 정도로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 깊이 심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과 함께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 정도로 그리스 신화에 심취하여 신들을 숭배했다면, 신화 속의 열두 신들을 내세워서 그와 관련된 사업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로마가 바울이 편지를 쓰던 시대까지는 황제숭배가 별로 강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었지만 막 박해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1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나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 것만이 아닙니다. 왜 황제숭배 사상을 그토록 전파하고 황제 신전을 세우며 황제에게 제사하게 했는가? 핵심은 돈입니다. 황제 신전을 세워놓고 황제숭배를 강요하면 거기서 돈이 많이 걷힙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제우스 신당 외에도 나머지 열한 신들을 위한 열한 개의 신당들이 있는데, 각 신당마다 제사장 사제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그 신전들에 제물과 제물을 장식할 꽃들을 담당하는 사업가들이 당연히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당을 짓고 보수하는 건축업자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게다가 열두 신들의 신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려서 팔며 장사하는 사람들, 또 열두 신들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들, 나가서 파는 판매원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지금도 유명한 유적지나 역사적인 곳들에 가보면 전부 그런 것들을 팔며 장사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가족들의 제사를 위해서 신전들에 찾아와 지출하는 금액을 다 합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 사람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그리스 신화 속의 열두 신들과 다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살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이 무엇이라고 설교했습니까?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일을 버려라.’ 하고 설교했습니다.

 

만약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눈에 보이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같은 신상을 더 이상 섬기지 않는다면, 그리스 신화의 열두 신들과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루스드라 사람들,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루스드라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킨 사도 바울의 영적 파워에 압도되었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래서 조금 힘들기는 해도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며 반대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럴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의 이득 문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만약 바울의 말을 따를 경우에 헬라 열두 신들의 이름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다 끊어질 것이라고 부추긴 겁니다. 바울은 그들의 삶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파괴하려고 온 흉악자라는 식으로 바울을 모함하고 매도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속의 이득을 망치고 손해를 보게 만드는 바울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동한 것입니다.

 

선동을 당하는 경우를 보면 모든 경우에 다 사실이 아닌 것에 넘어갑니다. 그러면 사실이 아닌데도 왜 넘어갑니까?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드러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는 것만 듣는 것이 확증편향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이 평소에 있는데 그것을 건드려주니까 거기에 확 넘어가는 겁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동에 넘어간 루스드라 사람들은 현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조금 후 16장에도 나오지만 빌립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이 어느 여종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냄으로 귀신에 들려 점을 치며 돈을 벌던 것이 끊어진 것을 본 주인들이 바울을 고소해서 때려 가두게 합니다. 에베소에서도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신상을 만들어 팔다가, 바울과 복음 때문에 자기 밥줄이 끊기게 되니까 소요를 일으키며 바울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있는데 정말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돈과 연결되면 정말 신앙을 지킬까요? 평소에 교회 나와서 예배하면 한 번 예배하러 올 때마다 $100씩 내서 나라가 걷어 한다고 하면 조금은 나올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한 번 나올 때마다 $1,000씩 내야 한다면 굉장히 줄어들 겁니다. 한 번 나올 때마다 $10,000씩 내야 한다면 아마 나올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의 이권이나 이해관계와 얽힌다면 신앙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현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꼬임에 넘어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고, 돈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거부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하루,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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