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히브리서 2장

yt1981 2023. 8. 3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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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히브리서 2장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응답받는 기도회 은총이 우리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제부터 히브리서 말씀을 이제 공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인지 또는 바나바인지 또는 그밖에 다른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진리의 정경성이 확실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박해받는 시절 고난당하고 교회가 교회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절에 믿음을 지켜 나가고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 백성에게 주는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 그리고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했죠. 그래서 오늘은 이제 이 말씀이 본격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 구체적인 우리 신앙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어제 공부했잖아요. 예수님은 얼마나 훌륭한 분이고 얼마나 중요한 분인가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인 광채이신 분 자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분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라야 되는가라는 것이 오늘 이 장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므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아멘 그랬어요. 자 먼저 한번 표시해 볼까요? 노란색을 드시고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후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이것이 중요하죠. 이게 히브리설을 기록한 목적이에요.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흘러 떠내려갈 수 있다. 여기서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이 파라르레오라는 말인데 파라르레오 오는 참 재미있는 단어예요. 분명히 잘 메워놨어요. 

배를 항구에 잘 메워놨는데 닫힐 하늘인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잘 되었겠거니 하고 하손해 버렸어요. 다 배를 내려와서 그날 밤에 식사도 하고, 뭐 하룻밤 즐기면서 잘 이제 쉬었단 말이죠. 그다음 날 출발을 하고 나와 보니까, 배가 없는 거예요. 왜 밭을 단단히 내리지 않았어요. 그래 가지고 이게 스르륵 배가 흘러나가 흘러내려간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데까지 나가버린 거죠. 자 이게 파라르레오라는 단어인데 그럼 여러분 이게 처음에 내렸을 때 배가 움찔 하면서 움직였을까요? 아니면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마 그때 움직였으면 다 알았겠죠. 선장부터 뭐 항해사 뭐 다 알았겠죠. 배가 움직이네 그리고 바로 잡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 배가 처음에는 마치 정박된 것처럼 닷을 내린 것처럼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었으니까. 다들 잘 되었거니 하고 서로 믿은 거죠. 

그리고 하순해 버렸는데 밤새도록 조금씩 흘러내려가는 것이 그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로 배가 나가버린 것이죠. 여러분 이 단어가 여기서 왜 쓰였을까요?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신앙이라는 게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이 어느 날 갑자기 확 안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믿던 예수님이 갑자기 안 믿어지고 갑자기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배가 조금씩 멀어지듯이 보이지 않게 조금씩 바다에 흘러 내려가듯이 그렇게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파라르레오라는 말이 한꺼번에 확 빠지는 게 아니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흘러 떠내려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단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라고 하는 기독교 저명한 이 저술가는 이런 말을 했어요.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린 100명의 사람을 한번 찾아봐라 그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다는 이유 있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다수는 아마도 천천히 자기도 모르던 사이에 흘러 떠내려고 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해요. 여러분 신앙이라는 게 그래요. 다들 멀쩡해 보이고 괜찮아 보여요. 그런데 아마 어떤 사람은 오늘 보이지 않는 0.010점 영영일 플러스 드신 분이 있을 거예요. 근데 어떤 분은 보이지 않게 0.001 마이너스가 되고 있다니까요?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하루에 얼마큼이라도 올라가든지 내려간단 말이죠. 

그런데 내려가는 걸 그래 내려갈 수 있지 뭐 0.01 괜찮아 다음날 0.050점영칠 괜찮아 하다가 이게 어느 날 갑자기 괜찮아 하다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어린 시절에 같이 모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저희 서울의 엄천교회 친구들 뭐 1년에 한 번 정도 만났는데 어쩌다가 서울에서 길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야 오랜만이다. 친구야 인사하다가 친구가 굉장히 저를 보고 이렇게 움찔하는 표정 영을 찍길래 친구는 저는 제가 목사님인 줄 아니까 그래서 제가 당연히 물어봤죠 야 요즘 너 교회는 잘 나가냐 뭐 어르신들 잘 계시고 목사님 장로님 다 잘 계시냐 그랬더니, 친구가 저를 보면서 눈길을 피해요. 그러면서 야 요즘 나 교회 쉬고 있어 그러는 거예요. 아니 여러분 교회를 쉬다니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이게 뭐 학원입니까? 

뭐 쉬긴 뭘 쉽니까 여러분 기도하는 걸 쉬고 예배하는 걸 쉰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얘기죠 그런데 이 친구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거든요. 저랑 신앙생활 정말 뜨겁게 열심히 잘하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확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냥 조금씩 아주아주 보이지 않게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이제는 교회를 다시 돌아오기 힘든 지경까지 된 것이죠.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요, 이 당시의 상황도 그랬다는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한꺼번에 떠나가지는 않아요. 그런데 조금씩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전받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식어지고 있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하고도 비슷하죠.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시기를 이 위기의 시기를 우리가 이겨낼 수 있고 잘 넘어설 수 있을까? 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 일 절에 앞에 나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므로 그랬어요. 자 이게 중요한 겁니다. 노란색 드시고 자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므로 여기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한다. 이 유념하다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프로세코라고 하는 단어인데 프로세코 이 유념하다는 단어인데요. 프로세코가 무슨 단어냐면 아까 나온 파라그레오랑 같이 쓰는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 잘 닫을 내리다 는 뜻이에요. 정박시킨다. 배를 확실하게 항구에 메어둔다는 말이 바로 프로세코입니다. 그러니까 배를 확실하게 정박히 두지 않으면 배가 자기도 모르게 흘러 내려가 버리잖아요. 

그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들은 것 들은 것이 뭐예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죠 아들을 통해 주신 말씀 아들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의 말씀을 유념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잘 정박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서 이 말이 일상생활에서는 마음을 어디로 돌린다 주의를 쓴다 주목한다. 이렇게 쓰이고요. 또 놓치지 않도록 힘쓴다 늘 마음을 두며 꽉 붙들어 놓다는 말로 쓰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은 앞에 나온 말이죠. 1장 전체를 받는 말입니다. 1장 전체를 받을 때 들은 것에 더 유념해야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또 나와요. 여러분 우리는 나오죠. 우리는 1절 앞에 그러므로, 우리는 할 때 우리 동그라미 해보시고 하반절에 우리가 또 나오죠. 흘러내려가지 않도록 우리 동그라미 해보세요. 

여러분 이 히브리서를 쓰는 사람은요, 히브리서를 받는 대상인 일반 성도들만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히브리설을 기록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문제라는 거예요. 이것은 너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다, 즉 말씀을 기록하고 전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나나 너희나 모두가 마찬가지 모든 인간은 마찬가지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래 신앙생활이 조금씩 무뎌지다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어가 아니라 그게 나일 수 있다는 거예요. 이 매일같이 말씀을 접하고 말씀을 만나고 묵상하고 매일 말씀을 대로 살려고 하는 나도 거기에 해당이 된다는 거예요. 나도 매일같이 더욱더 말씀에 유념하지 않으면 나도 흘러 떠내려갈 수 있다 라고 하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 말씀을요 단지 듣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지나가면 어떻게 되나 그 말씀이 나한테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탓을 내리지 않았어요. 정박하지 않았어요. 유념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요 말씀을 내게서 슬그머니 슬금슬금 떠내려갈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있는 것처럼 보이겠죠. 그래서 내가 눈물도 나겠죠. 때로는 감동도 받겠죠. 때로는 그만 쓰면 은혜도 받고 때로는 말씀 나를 뭐 설레기도 하고, 때로는 격동치기도 하겠죠. 그런데 그게 붙들어 놓지 않으면 말씀이 슬금슬금 멀어지더니, 내게서 완전히 상관없이 떠나버릴 수도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게 말씀을 많이 봤지만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말씀은 봤는데 말씀을 붙들어 놓지 않아요. 

말씀 속에 내가 계속해서 머물러 있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들었다가 사라지고 잊혀지고 또 없어지고 하다가 보니까, 내가 들은 거 같긴 한데 어느 날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죠. 텅 비어있는 거죠. 왜 말씀이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이 물론 거룩한 말씀이고 존귀한 말씀이고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우리들의 자세 역시 중요하다는 거예요. 말씀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게나 받아도 된다. 아닙니다. 말씀이 훌륭하니까 나는 대충대충 받아도 되겠지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더 유념함으로 받아 말씀을 내 마음속에 잘 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사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흘러갈 갈 수도 있다는 거죠. 여러분 그렇잖아요. 이 배를 타고 항구에 정박할 때 바다에 어떻습니까? 

물살이 잔잔할까요? 거셀까요? 밑에 수많은 물의 흐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마 꽤나 많은 물살들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성도는 누구냐 이 세상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에요. 자연적으로 두면 물살에 쓸러 내려가 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거칠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처럼 우리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돼요. 그럼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말씀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서 정박시키고 유념하고 계속적으로 돌아보고 말씀이 과연 나의 삶에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내가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새로워지기를 하나님 원하시는지를 계속해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한마디 받으면 말씀이 내 가정생활에선 어떻게 적용될까 내 직장생활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 내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적용될까 말씀이 적어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 또 내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적용될까 남과는 이웃과는 어떻게 적용될까를 계속해서 말씀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질문입니다. 질문 말씀을 통해 내가 질문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이 말씀이 저에게 주어졌는데 저에게 다가왔는데 과연 이 말씀을 제가 어떻게 묵상해야 어떻게 잘 가지고 있어야 유념해야 이 말씀이 저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 그렇게 물을 때 말씀은 교회에서만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 저만 말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가정에서도 또 삶의 자리에서도 출근길에서도 삶의 어디에서도 말씀을 받을 수 있고 말씀에 창념할 수 있고 유념할 수 있고 말씀과 함께 할 수 있구요. 그렇게 해서 우리 삶을 뒤흔드는 세상의 물살들 타격과 교만과 마음을 흔드는 온갖 유혹에서 우리는 거슬러 올라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요 우리가 말씀을 잘 붙들어서 그러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무엇을 가운데 오늘 우리가 받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이 이 절과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절입니다. 1004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늘 그랬어요. 여기서 말하는 1004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 이게 뭐냐면 바로 구약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모세 윤리 불법을 지칭할 때 이렇게 표현했어요. 

1004들을 통해 하신 말씀 그래서 성경에서 주시는 구약의 말씀들을 이렇게 그들의 유대교적인 생각들은 이해했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 19절 한번 보겠습니다. 갈라디아 3장 19절 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런, 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1004들을 통하여 자 그랬죠 1004들을 통하여 한 중고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랬어요. 이게 당시 사람들의 통념이었어요. 1004들을 통해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구약의 말씀이죠. 자 그런데 이러한 말씀도 범죄함이라는 말은 뭐예요? 어긴다는 말이죠. 일부러 어리거나 적극적으로 어기거나 아니면 순종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이것을 안 들은 척하는 거죠. 못 들은 척하는 거죠. 이렇게 하던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됐어요.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는 거예요. 즉 말씀이 효력이 있어서 견고하게 됐다는 말씀은 말은 효력이 있다는 말인데 법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유효하게 되어서 지키지 않거나 못 들은 척 한 사람들 거부한 사람들을 다 적절한 보응을 내렸단 말이죠. 그랬거든. 자 1004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이 율법도 그랬거든. 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하니 여기면 어찌 보옹을 피하리오 그랬어요. 이 절과 3절은 1장에서처럼 또 한 번 1004들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겁니다. 1004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이렇게 보응이 되는데 효력이 있는데, 예수님을 통해 주셨던 이같이 큰 구원 놀라운 구원이죠. 여러분 이같이 큰 구원 노란 사람은 쳐보세요. 자 이같이 큰 구원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이 복음이 어찌 그것을 등하니 여기면, 즉 모른 체하면 고개를 돌려버리면 어찌 봉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즉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이 귀한 말씀에 복음을 절대로 우리는 흘려보내거나 이것을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우리 마음을 묶어두고 계속적으로 이 말씀을 우리는 섬기며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3절 하반절에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그랬어요. 즉 이 복음의 말씀은 처음에 예수님 말씀하셨죠. 주로 말씀하셨어요. 그다음에 들은 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확증하셨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예수님을 알게 된 거죠. 여러분 이것이 중요한데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하셨고 또 그것을 들은 자들이 사도들이 전하기 하셨고 또 우리에게도 확증해 주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죠 여러분 이같이 큰 구원 예수님의 이같이 큰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세상에 반항이 있었겠어요. 얼마나 세상에 많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했겠어요. 성경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동안 이 복음이 전해지는 동안에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세상의 세력들이 그것을 막았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님께서는 이같이 큰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왜요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이죠. 인류를 창조한 목적과 계획이 바로 이 복음에 있었고, 또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의 구약의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하나님의 날들 모든 하나님의 계획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였고 또 예수님이 오신 뒤로 모든 인간의 역사는 변화되었죠. 

예수림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 기억하고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것으로 인간의 역사가 새로워졌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BCB포 크라이스트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 후를 에이디 아노 도미니 주님 이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된 것처럼 이같이 큰 구원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한 번 더 강조하는 거죠. 1004들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주신 이 구원은 이같이 큰 구원이다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자 그런데 여러분들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게 분명히 1장에서 1004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끝났어요. 근데 끝난 얘기를 왜 한 번 더 할까요? 왜 1004와 또 비교하는 걸까요? 왜냐하면요 여러분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1004보다 못해 보였기 때문이에요. 1004들은 고결하잖아요. 날개 달고 하얀 옷 입고 하늘을 날아요. 그러니까 1004들은 뭔가 있어 보여요. 

근데 예수님은 채찍이 맞으셨죠 머리에 가시 멸류관 쓰였죠 피가 철철 흐르죠 십자가에 못 박힘 당하셨죠. 그러니까 예수님이라고 그러면 훨씬 더 못해 보이는 거예요. 왜 그렇게 우월하신 예수님이 못한 위치에 놓였을까라는 거죠. 7절 한번 보겠습니다. 7절 한번 보겠습니다. 7절 그를 잠시 동안 1004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그랬죠, 즉 하나님이 일부러 그를 잠시 동안 1004보다 못하게 하셨어요. 한 번 더 나옵니다. 9절 오직 우리가 1004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종교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그랬거든요. 자 그러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1004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받았어요. 마치 정말 1004들보다 못하는 신분처럼 됐어요. 자 왜 그랬어요. 

구절 하반절에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즉 예수님이 죽음당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음을 친히 맛보셨단 말이에요.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일부러 낮아지신 거죠. 자 그래서 14절 이렇게 증거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렇구나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누리와 혈과 육에 속해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어요. 그래서 우리처럼 죽으시고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어요. 

그리고 17절 그러므로, 그가 범사의 형제들과 같이 되시니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4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송냥하려 하십니다. 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범사에 우리처럼 되게 하셨어요. 살아도 우리처럼 죽어도 우리처럼 왜요 18절 결론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단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아멘 1004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예수님이 1004보다 못한 자리에 내려오셨다 아니 인간보다 못한 자리로 내려가셨다 왜냐하면, 바로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셔서 시험받는 자 우리를 친히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무엇입니까? 바로 이 같이 큰 구원입니다. 

이 같이 큰 구원 우월하신 천지만물의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시려고 친히 인간처럼 되시고 친히 시험 받으시고 친히 죽음을 맛보셨다 그래서 1004보다 못한 자리에 내려가셨다 왜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분 이 소식이 오늘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소식입니까? 여러분 우리는요 참 이기적이어서 오늘 내가 1000원 덜 벌고 만 원 더 버는 게 사실 복원보다 더 좋아요. 사실 우리의 좀 성적 잘 받는 게 복음보다 훨씬 더 우리는 민감하게 좋아요. 기분 좋아요. 내 통장에 돈 얼마나 꽂히는 게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훨씬 더 우리는 기분 좋아요. 우리 인간이에요. 그게 우리 수준이에요.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 오늘 다시 한번 말씀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같이 큰 구원 바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나처럼 인간적으로 오셔서 맞으시고 죽으시고 시험 받으셨다 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분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오늘 새롭게 살아나지 않으면 우리는 쓸려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한국에서 멀어지는 배처럼 점점 더 흘러 떠내려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 크신 구원의 주님께로 묶어두길 원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더욱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되새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구원의 기쁨이 우리에게 차오르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되지 않고 오늘 우리가 꿈꾸는 것이 막혀 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만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9주가 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 안날을 열어주시는 것을 오늘 우리가 바라보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나아가기를 우리 하나님 원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히브리서 2장 말씀 통해서 과연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를 돌아봅니다. 과연 우리는 점점 쓸려 내려가서 떠내려가고 있는 나도 모르게 점점 하나님께서 멀어져 말씀에서 멀어져 점점 나의 욕심을 따라 멀어지고 있는 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지 못하고 담아두지 못하고 흘려 떠내려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정박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유념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 너무나 귀한 이같이 큰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 마음에 담고 구원 오늘도 경험하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전하며 살기 원하오니 주여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우리의 영혼을 주님 정화시켜 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낮아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과 헌총을 다시 기억하면서 감격의 복음을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기뻐하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복음 중심으로 행할 때 오늘날 우리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줄로 믿사오니 주요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더욱더 말씀에 붙어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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