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히브리서 2장 10절부터 18절까지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머니가 많은 아들들이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러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1004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본사의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4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송양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적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아멘 울리 히브리스는 우리가 앞에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본질을 우리가 규명해 나갈 때 그분은 단순히 어떤 1004나 이런 존재보다도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 말씀을 계속해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특별히 보내실 때 어떤 목적으로 보내셨는지를 또 그분이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지를 우리에게 명쾌하게 밝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10절 말씀 한번 듣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아머니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왜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고난받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의 형틀 끔찍한 십자가 형을 받고 죽었어야 하느냐 이 부분이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축복받았다면서 그렇게 어려움을 매 그렇게 겪고 있느냐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사람들 일반 사람들은 그럽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 믿으면 더 잘 풀리고 일이 잘 되고 더 순탄하게 되어야지 왜 그렇게 어려움을 겪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그런 고민에 빠집니다.
아니 내가 예수 따라가는데 남들 보기에도 좀 번듯해야 예수가 전해지지 이래 가지고 무슨 예수가 전해지겠습니까? 하는 그런 고통과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 겪게 하심으로 고난을 이기시는 모습 그 고난을 정복해 가신 그분의 모습을 통해야 고난 받는 이들을 위로케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곧 고난 겪지 않은 사람이 고난 겪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암 환자에게 뭐 암도 감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소리 하면 분노밖에 더 불러일으키겠어요.
그러나 암 수술을 8번 받은 하용조 목사님께서 그렇게 암 수술을 간암 수술을 그렇게 8번이나 하고 단위에 올라서 겪어보니까, 이게 저를 정말 겸손하게 하는 겁니다. 내가 안 그랬으면 까불었을 사람인데 이 암 때문에 제가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얘기를 고백하고 겪어보니까, 뭐 암이나 감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한테는 그게 다 똑같은 병입니다. 그래야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해도 우리가 분노하지 않지 같이 암을 안 겪은 사람이 그런 소리 하면 정말 저자가 정말 철이 없구나 그런 소리 들으시지 않겠어요. 그 여러분들이 겪는 고난은 제가 트위터에도 몇 번 그렇게 썼지만은 아니 그게 남에게 백신이 되기 위해서 내가 겪는 고통이라는 거예요. 내 인생의 고난이라는 건 나 같은 고난을 겪을 사람들에게 이건 백신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이해하고 병을 아파본 사람이 병자의 심정을 이해하고 이혼을 겪어 그런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 이혼을 앞둔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 그런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 무슨 위로가 되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고난이야말로 이 인류가 온통 죄와 사망의 고통 속에서 그 권한 가운데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그런 통로가 되신 것이죠. 그래서 그분은 오셔서 구원의 창시자를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말이죠. 온전케 하시므로 고난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을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 곧 하나님 그분께서는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구원의 창시자를 완전케 하심으로 일이 시작이 되었다. 이런 이해할 듯 이해하지 못할 듯한 이런 말씀 우리가 들어야 되는 까닭은 이 세상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은 이걸 무슨 소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그나마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방법을 이해시키는 유일한 길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그러므로, 우리 또한 고난 가운데 찌들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예요.
고난 가운데 우리가 있을지라도 고난을 이기신 분을 바라보고 고난의 끝이 어떠함을 우리가 미리 맛보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때 고란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갈 때 주위에서 고란 맞는 사람들이 모습을 보고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 11절 이할 읽습니다. 시작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냐하면, 거룩하게 하시는 이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구원자나 구원받을 사람이나 한 근원에서 낳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났다는 거예요. 똑똑한 아들이나 어리석은 아들이나 감옥에 있는 아들이나 밖에서 무슨 남들에게 재판을 하는 아들이나 옛날에 모래시계인가 그게 그거 아닙니까 뭐 다 한 아버지 밑에서 뭐 검사건 뭐 죄수건 다 한 아버지 앞에서 난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이런 얘기죠 우리는 조금만 좀 격이 떨어지면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하고 내가 같이 앉아 있습니까? 그래서 초대 교회가 충격을 준 것이죠. 어떻게 노예하고 종이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어떻게 여자와 남자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때나 직업이나 여러분 격을 찾아 사는 존재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알지만은 뭐 민주주의의 발상지처럼 여겨지는 민주주의가 활짝 꽃 피었다고 생각하는 영국조차도 200개가 넘는 계층 의식이 있다고 그래요. 지금도 뭐 하기야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니까 어쨌건 그래서 우리가 인간이 정말 뭐 속으로 나는 어느 정도의 격에 속하는가? 매일 이거 계산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분 상승이 어떻게 일어나나 어느 집하고 결혼을 해야 우리가 조금 나아지나 뭐 이거 따지는 건 내가 어느 학교를 가야 내가 격이 좀 높아지나 그래서 우리는 격이 안 맞으면 부끄러워한단 말이에요. 어떻게 이 파티에 저런 사람 와 있습니까? 저런 사람을 초청하는 자리에 왜 나를 또 불렀습니까? 이런 생각들을 우리가 갖고 살아간단 말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왜 구원할 사람이나 구원자로 오신 분이나 한 근원에서 났기 때문에 여러분 그래서 평등 의식 진정한 인권 의식이 성경 아니고서 어디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복음이 아니고서 어떤 그런 의식이 있겠어요. 정말 주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근데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부끄러워했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자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이 계속해서 이 히브리 기자는 해박한 구약적 지식을 가지고 10편 22편 메시아 10편을 또 인용하고 있고 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이런 이사야서의 말씀 8장의 말씀을 인용해 가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히브리스 기자는 이 구약적 지식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이 구약의 배경을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게 됩니다. 구약을 알기 때문에 구약에 묶여 있는 자들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이고.
구약 가운데 보석처럼 박혀 있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발굴해 냄으로써 마치 금광을 캐듯 보석을 캐듯 구약 속의 곳곳에 박혀있는 그리스도 메시지를 찾아내어서 그분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말씀 가운데 이미 계시된 분이다. 이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죠.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성하리라 여기 10편 22편의 교회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어제 주일 말씀에서 같이 나누었던 것처럼 구약의 카할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갖다가 여기는 지금 에클레시아로 번역을 했어요. 그러나 이때 당시는 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런 교회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 번역을 하면 내가 주를 주의 백성 가운데서 회중 가운데서 찬송하리라 이런 뜻이에요.
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그렇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됨으로써의 그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은 정말 우리가 주를 받아들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14절 이하를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지마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자 하는 이 자녀들과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혈과 욕을 가지고 입고 오셔서 성육신하셔서 인간과 같은 모양이 되셔서 형제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셔서 그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에 이를 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하신 일은 죽음의 세력을 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의 덧에 걸려서 모든 것들의 죽음이 종노릇하고 있는 그런 실상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말씀이시죠.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모습 가운데는 죽음의 덧에 걸려 있는 모습이 가장 큰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어떻게 되냐 이게 걱정인 거예요. 근데 이 죽음을 통해서 죽음 권세 사망 권세를 가진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렵게 하는 존재 죽음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좌지우지하는 존재 그렇죠.
뭐 우리가 대개 뭐 강도나 무슨 뭐 살인범이나 오면은 칼을 들이대거나 총을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우리를 협박하는 것 아닙니까 근데 만약 죽음을 모르는 갓난아이가 있다고 칩시다. 칼을 들이든들 걔가 압니까 칼을 들이든 나 너 죽여 하면 걔가 빈 것 웃고 말겠죠. 제가 뭘 주려고 그러나 보다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죽음을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리라는 오해 가운데 비롯된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탄은 우리를 법박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우리를 쥐고 흔드는 존재란다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에 뛰어들어서 죽음을 이기심으로 부활하심으로 그리하여 우리에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망 권세로부터 풀려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신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면 절대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라면 이 문제가 해결돼야 된다는 거예요. 사방권수에 붙들려 있으면 우리는 여전히 사탄이 조종하는 사탄이 우리를 짚고 까부는 그런 영향력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망권세를 가지고 얼마나 이 사탄이 지 까부는지 몰라요. 온 데다가 뭐 보통 뭐 이렇게 겁을 줄 때 백골단 이런 거 만들지 않습니까? 그건 뭐 그냥 어떻게 자꾸 해골 그린 옷을 입고 다니는지 참 애들한테 헬로윈 데이 뭐 이런 게 다 그런 데서 비롯된 거란 말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이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우리가 죽음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거죠. 그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이에요.
사망권세로부터 풀려났다 일을 위해서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근데 사망이란 죄삭씨라고 말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값을 치르고 사망으로 치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죄를 우리에게 없이 해주셨기 때문에 사망으로부터도 풀려난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한평생 매여서 종노릇 죽음의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걸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매여서 종 노릇 하는 자들 그렇죠. 뭐 우리가 뭐 사실은 뭐 어디 가서 꼼짝 못하고 붙들려 있는 게 다 죽음의 종 노릇 하는 것이죠. 근데 모든 자들을 풀어주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신 거란 말이에요.
주님께서 이렇게 또 야유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는 이런 것들은 아니라 잔다 죽었다고 할 때 아니라 잔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린 깨우러 간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들에 허상 가운데 우리가 사로잡혀서 실상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들 때 누가 걱정을 합니까? 나는 그러나 죽은 것 같이 잠드는 축복을 우리가 경험하기 때문에 아침에 건강하게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냥 잠을 제대로 못 자고 확 못 죽으면 밤새도록 죽음과 삶 속에서 뒤치다거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죽을 때 확실히 죽어야 아침에 확실히 일어나지 저는 여러분들이 잘 밤마다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날마다 부활하셔서 새 힘으로 그냥 또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 이 하여튼 뭐 죽음에 대한 권세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아도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아니라는 이게 우리가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왜 맨 나다 우리는 장례 예배를 치르는데요. 그건 주검 시신이라는 거예요. 주검은 없다면 주검은 우리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게 뭐 옷이 낡아서 버리듯 이 육신을 주검에 내주겠지만, 주검으로 해서 태워버리고 우리가 묻어버리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명 우리 안에 있는 이미 임한 영원한 생명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게 우리 신앙의 본질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주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이 몸이 주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검투자들하고 맨날 가서 사자바비 되고 말이죠. 이거 그냥 뭐 사자 그냥 입에다가 들이밀고 불화형을 당하더라도 그냥 떳떳하게 화형을 당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숭교했습니까? 그들이 이 육신이 주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한순간에 고통을 그렇게 이기고 지나간 것이죠. 자 16절 이하를 꼭 마칩니다. 시작 이는 확실히 1004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는 범사의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4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송양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누가 우리를 도우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천사를 붙들려 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오셨다고 합니다.
자손들이 죽음에 붙들려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믿음의 자손으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주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들은 죄송냥을 받은 우리 모두는 대제4장이신 그분의 속죄함을 통해서 이 히브린들에게는 대제4장의 속죄라고 하면, 얼른 알아듣죠 대속죄일에 들어가서 하루 그분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계속해야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지금 성전을 짓고자 하는 이유가 대제4장이 들어가서 사람이 죄를 속해 해줘야 우리가 죄에서 풀려난다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적 백성들에 머물러 있는 히브린들은 지금도 대제4장을 기다리고 있고 성전을 기다리고 있고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속죄를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냥 율법을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나 주지 우리 주님께서는 죄를 우리에게 영원히 한 번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에 영단번의 제사라고 하는 완 센 포 올 단 한 번이지만 영원히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해졌기 때문에 그리하여 죄로 돌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풀려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 곁에 턱 밑에 죽음이 와서 쫓아 있을지라도 죽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그분을 우리가 의지하는 것 그분을 날마다 더 의지하는 것 그게 우리 신앙의 전보인 것이죠. 왜 그분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가 우리를 돕겠습니까?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그렇게 시편 기자가 엎드렸듯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죽음을 이기신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주님으로 또 오신다 이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은 모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십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난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인간의 말이 우리를 위로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 한마디면 족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전부를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로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위로가 되는 것이죠. 저는 여러분들이나 저나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온 완전하게 아시는 그분께서 위로하시는 주의 말씀을 붙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사보검서를 날마다 읽는 까닭 에 그렇게 복음세 말씀 가운데 매달려야 할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이름은 없나니 천하 이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없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모든 고난 가운데 이겨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럴 때 우리 또한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한 위로의 통로가 되신다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저분은 저렇게 살 수 있나 어떻게 저런 어려움을 당당하게 겪어낼 수 있나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들이 활짝 웃고 이 자리를 떠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들한테 한번 웃어 주십시오.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이 고난이 해석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남에게 백신이 되기 위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저를 백신으로 쓰십시오. 고난받는 이들에게 다가가게 하시고 고난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게 하셔서 하나님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망 권세 묶이지 않고 정말 주님과 함께 훌홀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해주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하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사오니 더 큰 짐을 지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짐을 다 내려놓게 하심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십자가를 질 때 우리에게는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지고 쫓으라고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을 이렇게 한번 내어 드리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의 이름을 부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셨어요. 고난을 이기신 주님 고난을 통과하신 주님 고난에 승리하신 주님 죽음을 깨뜨리신 권세를 이루었사오니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믿음의 권세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사방의 옥에 싸움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또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임을 믿습니다. 하나님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하리라고 하신 말씀 붙들고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과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주님 이 발걸음 가벼운 발걸음 되게 하시고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갈지라도 찬용이 찬송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십자가에서도 끝까지 우리의 죄를 사시기 위해서 강도한 사람까지도 붙들고 내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주님 그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에게 마음껏 쏟아부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에 깨닫게 하심이 오늘 말씀을 따라 사망 권세에 묶여 있는 이 세상 가운데로 걸어나가면서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풀려났다 사망한 너에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담대하게 세상과 맞서는 이 자리에 고개 숙인 모든 믿음에 형제들 자매들 주님께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은 주님의 형제자매들 위해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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