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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권위 없는 자처럼 | 프래드 B. 크래독 | 요약

yt1981 2023. 9. 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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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납적 설교의 이론과 실제: 권위 없는 자처럼 프래드 B. 크래독

 

Fred B. Craddock (1928-2015) 필립스 대학교(Phillips University, B.D.)와 밴더빌드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 Ph.d.) 튀빙겐대학교, 예일대학교(Post-Doc) 등에서 공부했으며 미국에 모리대학 신학부에서 설교학과 신약학 교수로 가르쳤다. 줄곧 신약학을 가르치던 그는 1965년 필립스 대학교에서 신약학과 더불어 설교학을 맡게 되었고, 해석학과 언어 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등의 문헌들을 읽으면서 설교학 이론들을 성립해갔고, 그 결 과로 나온 책이 바로 “권위 없는 자처럼” (As One Without Authority) (1971)이다. Newsweek가 선정한 영어권 12대 설교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I. 설교의 현재 상황 1장. 어두운 그림자에 뒤덮여진 강단 비판 받는 설교와 회복 의지 설교에 대한 혐오감은 세상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나 매주 설교를 듣는 그리스도인들도 설교를 시대착오적 산물로 비판하고 있다. 1) 설교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1세기 때부터 있었다. (고후10:9-10) 2) 설교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던 시대도 있었다. 3) 현재는 설교의 약화로 인해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4) 신학교의 문제: 설교에 대해 신학교에서 웅변술이나 헬라 수사학과 같은 가르침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신학적 요소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여 설교의 형식과 내용의 분리시켜 버렸다. 5) 설교가 전통적인 제도의 한 부분이 되어 자기 울타리 안에 안주하려고 한다. 미국의 행동주의 신학 설교가 낮게 평가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미국교회의 특성 : 적극적 행동주의 – “말이 아니라 행동”을 모토로 한 사회복음 운동은 설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했다. 2) 유럽의 교회들이 신학적인 입장을 변호하고 주장하는 일에 힘을 쏟을 때 미국교회는 2 “행동”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중요하게 여겼다. 3) 설교자와 청중의 심령을 건드리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말씀이 반복되었고, 기대감이 낮은 곳에 성취감도 낮아지게 되었다. 4) 설교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현실 속에 설교가 안주하게 만들었다. 언어의 위기 시대와 교회 언어의 실패 현대는 “언어의 위기”시대이며 “말의 힘이 상실”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것 은 “설교의 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언어의 의미와 능력을 상실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어의 의미가 쇠퇴하였다: 전자 미디어의 영향으로 새로운 형태의 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2) 전통적인 종교 언어의 본질 때문: 종교적 언어에 대한 불신을 넘어 경멸이 거세지고 있다. (1) 믿음의 세계를 보다 생명력 있게 전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보다 전통과 과거의 언어에 얽매어 벗어나길 두려워하기 때문 (2) 과학 언어의 우세 때문: 현대 과학 혁명은 우리의 의식과 언어 개념에 영향을 끼쳐왔다. 그것이 종교적 언어(비유, 신화, 개념 등)를 제한하였다. 3) 영상시대: TV와 같은 기기의 영향으로 인간의 지각기관(sensorium)이 변했기 때문 강단은 전통적으로 말과 이야기, 역사를 사용했는데 TV는 이미지와 그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4) 설교자들이 확실성을 상실하고 불확실성에 사로잡혔기 때문: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보다 다원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임시변통성과 확실성의 상실이 기본 요소가 되어 교회는 공간에서 시간으로 관심의 전환이 일어난다.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는 역사적 이해로 대체되고 있다. 5)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가 이전과 다르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 더 이상 설교자들은 성직자로서의 권위와 직제에 대한 권위,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여전히 독백(연역적 설교)을 하는 설교자가 존재한다. 6) “설교의 위기”: 이것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다.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의미 있고 중요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교의 변화 효과적인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 가진 신학과 일치한 방법론을 요청한다. 설교가 인간의 삶과 사회 구조 속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해석이 옳은 것을 넘는 설교의 갱생이 필요하다. 3 2장. 다시 주목받고 있는 설교강단 현대 언어 연구 현대는 과학적인 방법이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언어에 대해 제한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더 이상 언어를 당연한 커뮤니케이션의 매체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언어가 가지는 명료함은 사라졌다. 이에 따라 바람직한 강화마저도 퇴락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발견이 가지는 중요성이 커졌다. 일상생활에서의 말의 중요성 우리 문화 속에서 말로 전하는 것이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말과 관련된 중요한 순간들을 기억한다. 우리의 생은 듣고 사용하는 말로 구성되어 있다. 진실한 말은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요소이기에 설교자는 희망을 잃을 필요가 없다. 구두 커뮤니케이션의 역할 심리학이나 심리요법과 같은 영역은 건강한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에서 점점 중요 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전자시대는 점차 본래적(primitive)이고 문자적인 시대에서 벗어나 구두적이고 청각적인 요소에 민감해지는 소리의 세계가 새롭게 살아날 것이다. 크래독은 마샬 맥루한을 인용하면서 연설이 쿨 매체에 속하는데 이것은 모든 부분이 연설자에게만 달린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이 청취자에 의해 완성된다고 하였다. 들려지는 소리는 언제나 현재적이며 실재하는 경험이다. 기록된 언어와 달리 구두로 들려지는 언어는 우리들 사이에 의식을 가지게 하며 신뢰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연다. 전자시대에서는 기록된 말보다는 구두로 전하는 말이 우세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여러 발전들이 뒤따르게 된다. (1) 어떤 이슈에 대한 대화와 토론이 결론을 내리는 대신 개방성을 가지게 된다. (2) 개방성이 있는 토론과 대화는 깨어진 인간관계를 치유받기 원하는 자들에게 유용하다. (3) 개인의 내적인 영역, 자신의 믿음의 영역과 가치 판단에 대해 드러내는 일들이 고통스럽지만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4) 교육의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발성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영향을 받았다. (5) 설교는 말하고 듣는 세계를 향해 발전해 가는 현대의 경향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설교 강단은 심리학자, 임상치료사, 커뮤니케이션 학자, 4 설교자들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변화가 요구되는 설교 방법론 기존의 설교는 기록된 설교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논리적 발전, 명확한 논증, 완벽하면서도 결정적인 표현법으로 채워졌을 때 좋은 설교로 여겨졌다. 그리고 청중에게 완벽한 책임을 지우는데, 설교가 내린 결론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 절할 것인가 양자택일하도록 요구한다. 오늘날 상황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결론을 열어놓는 형태의 대화’(open-ended dialogue)는 말씀의 권위를 버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목회자가 청중과 함께 대화의 과정으로 설교를 이해한다면 강압적인 성직자의 권위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고 기뻐할 것이다. 언어에 대한 철학적 접근 방법 1) 과학적 방법론의 타당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 말은 검증할 수 있는 의미를 예시한 다. 따라서 터무니없는 진술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며 “하나님”과 같은 입증할 수 없는 것에는 중립을 취하였다. 루드비그 비트겐스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말과 표현들은 방치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실재로 사용될 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과학적인 방법 에만 매달려 있던 언어 사용을 해방시켜 주었다. 2) 대부분 단일 관점의 횡포를 극복하려는 시도: 말이란 발견될 수 있는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 시각을 극복하려고 한다. ‘원시적 (primitive) 운동’을 통해 언어가 과학기술 문화에 의해 유연해지기 전, 언어가 가지 고 있던 본래적인 힘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본래 언어는 인간 영혼에 무한한 봉 사를 했으며, 춤, 노래, 유혹, 괴롭힘, 규명, 울고 변화시키는 일들을 했다. 또한 언어는 유비, 은유, 수수께끼, 역설, 시, 전설, 신화 등과 정교하게 손을 잡았다. 성경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사람이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것들을 물리적이고도 지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 본래적이고 장엄한 진술, 신화와 예언의 형태로 말씀이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후기 유대주의는 헬라종교와 함께 철학적으로 전환하면서 말씀을 하나님과 분리하여 본질적 실재로 말하게 되었고, 창조하고, 유지하며, 세계를 이끌어가는 일을 중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역에서도 ‘들려진 말씀’은 중요했다. 마틴 하이데거는 들려진 말씀에 대한 원시적 이해로 회귀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서 언어는 도구가 아니며 언어를 말하고 듣는 능력은 근본적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 존 재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사건일 뿐 아니라 인간 존재는 언어를 통해 발견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대화의 존재이다. 5 신학연구와 성경 연구 신학과 설교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하나님 말씀에 집 중하게 되었고, 해석학과 선포는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며, 실재하는 인간에게 실재하는 하나님의 실 재적인 소환(a real summons of a real God to real persons)’이었다. 성경의 주 제들은 과거의 관점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되던 그 확신을 가지고 지금의 회중에게 나 눠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트만은 성경에 대한 선입견과 비과학적인 것을 난도질을 하고 걷어내었다. 이것은 “인간 중심주의의 유령”이다. 이런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하이데거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언어를 존재와 진리를 이해하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인간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존재의 본질” 그 자체로 보았다. 언어는 이해를 선재한다. 이를 대입해보면 우리는 성경의 용어를 정의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 이전에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며, 불분명한 우리 삶의 상황에 희망의 빛을 비춰줄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이 성경 본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간 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는 데 성서신학 연구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설교자가 명심해야 할 일 설교자의 마음 속에 다음 세 가지의 함축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이 성경 본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선포의 양식을 가져야 한다. 2) 설교자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3) 기독교회의 초창기에 말씀을 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이해해야 한 다. 설교의 근본적 본질은 말씀의 선포이며 말씀 공동체를 이룬다. 말씀은 생명력 없는 기록이 아닌 무엇인가 일어나는 행동이다. II. 새로운 설교 방법론에 대한 제안 제3장 설교에 있어서 귀납적 움직임 설교의 생각이 움직이는 데는 근본적으로 연역적인 방법과 귀납적인 방법,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연역적인 방법은 일반적인 진리에서부터 시작해서 특별한 적용이나 경험으로 이동한다. 귀납적인 방법은 그 반대로 움직인다. 설교에 있어서 연역적 방법 설교학적으로 연역적인 방법은 설교의 주제를 언급하고, 그 주제를 대지나 하부주 6 제들로 나누어 그 대지들을 설명하고 예증하며, 청중의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전통적인 설교의 움직임이다. 그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날 유럽에서 우세한 방법이다. 중심 대지가 먼저 주어지고 다시 상세한 소지들로 나눠지고 있다. 이것은 내용이 전개되기 전에 먼저 결론이 나타나는 것으로써 자연스럽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형식이다. 이 방법은 설교자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청중의 삶과 믿음에 적용할 수 있는 권리나 권위를 가졌으며 청중은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 방법이다. 이것은 설교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도 없고 대화도 없으며 설교자가 듣는 것도, 청중이 공언하는 것도 없다.”, “여기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110) 연역적 개요에서는 설교의 움직임에 심각한 방해물을 확인할 수 있다. 2b에서 대 지 II로 넘어갈 때 만만치 않은 장벽을 넘어야 한다. 연역적 패턴으로 구성된 3대지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세 봉우리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는 여행을 하게 한다. 한 편으론 세 편의 작은 설교들을 접착제로 엉성하게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귀납적 방법 귀납적 접근은 설교 중심 사상이 청중에게 아주 익숙하게 들리는 개개인의 경험에 I. A 1. a. b. 2. a. b. 7 서부터 일반적인 진리나 결론으로 움직인다. 설교에 있어서 귀납적 움직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할 때 귀납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연구 한 대로 청중들도 주일 오전에 설교자와 함께 출발하며, 설교자가 발견한 결론에 청중도 함께 도달할 수 있다. (2)귀납적 방법이 잘 행해질 때 청중의 삶에 어떤 결론을 다시 적용하려고 하지 않 아도 되기 때문이다. 청중이 설교자와 함께 귀납적 여행을 했다면 설교자의 결 론은 청중의 결론이 되고, 각자의 상황이 함축한 것은 분명해지고, 개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3)모든 사람은 연역적으로가 아니라 귀납적으로 살아간다. 요리하는 사람은 일반적 요리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특별한 불고기나 케이크 요리에 관심을 갖는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서 메시지가 전해질 때 교회는 살 아있는 공동체가 된다. 귀납적인 설교는 권고적이기보다 설명적이고, 명령적이기보다 단정적이다. 또한 연 역적 방법과 같이 권위적이지 않고, 청중과 공유하는 경험을 가지고 설교한다. 따라서 귀납적 움직임에서 기본은 ‘청중과의 동일시’(identification)와 유비(analogy)의 창조적 사용이다. 설교자는 다른 사람의 삶에서 도출한 유비를 제시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대지를 통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청중에게 적용, 권면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이 설교의 형성과 움직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귀납법에서의 전제조건 (1)설교자는 청중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야 하며, 메시지는 그들의 것이 된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에게(to) 설교할 뿐만 아니라 청중을 위하여(for) 설교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증거하는 것에서 청중이 활발하게 의미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2)전도 설교에서조차도 청중을 완전히 하나님과 멀어진 존재, 하나님 경외신앙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귀납적 설교 방법에 있어서 기 본적 내용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죄인 됨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의 존 재와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관계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성립된다. 귀납법에 있어서 기본 요소 (1)특별한 구체적 경험은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청중과 일체감을 갖게 하고, 유비에 의거하여 결론에 도달하며, 새로운 관점들을 얻게 하며, 결단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런 과정이 이 구체적인 생각과 사건들을 기초로 이뤄 진다. (2)회중에게는 설교의 움직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런 능력이 있다. 회중은 설교자가 제시하는 결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메시지를 통해 자 신들이 내리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귀납적 움직임은 결론부터 말하며 김을 빼는 연역적 움직임과 달리 청중의 8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그 관심을 지속시켜 준다. 귀납적 설교 방법에 대한 비판 (1)귀납적 설교는 설교자 편에서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문을 열어 둘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2)귀납적 설교방법에 윤리적인 요소가 결여된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회중들 에게 비밀스럽게 주제를 감추고 서서히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3)하나님 말씀을 청중에게 지나치게 예속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청중의 귀에 들려 질 때만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여겨진다. (4)과연 귀납적인 설교 방법론이 오늘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주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이런 질문들은 (1)귀납적인 논리의 특징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과 (2)청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전통에 반하여 청중 자신이 스스로의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결론을 청중에게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생긴다. 귀납적 전개를 위해 특별한 관찰이나 유비, 동일시와 같은 기재를 사용하는 것이 삶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1)일반적 인 진리에 해당하는 대전제(‘모든 인간은 죄인이다’와 같은) 역시 귀납적인 형태를 통 해 여러 자료들과 내용들이 가진 권위에 의해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2)논리적인 설교의 첫째 대지가 던져질 때 관심이 없는 이들이 훨씬 많다. “위험과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감행하는 것이 모든 것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141) 제4장 귀납적 설교와 상상력 상상력과 이미지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는 인간사고 과정이 진행되는 방식을 “비행기가 나는 것과 같다. 특별한 관찰이라는 땅에서 이륙하여 상상력의 보편화라는 옅은 공기를 통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성적인 해석에 의해 밝히 드러난 새로운 관찰이라는 땅으로 다시 착륙한다.”라고 설명했다.(143) 귀납적 설교 방법론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마음에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이 어떤 실재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나 배우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 “비행기를 타고 있는 성도”라고 말할 때 성도는 ‘비행기’와 ‘성도’라는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이 두 이미지를 융합시키기 보다는 하나를 취하거나, 둘 다 버릴 수도 있다. 9 이미지들은 개념이 아닌 다른 이미지에 의해서 대체된다.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장 식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상상력을 통해 전달되는 설교는 신학적으로 무게 없는 것으 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력은 희망과 연관되어 있으며 성경도 ‘사자와 어린 양’, ‘떡을 떼는 것’ 등의 이미지를 통해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이미지는 설교에서 흥미 있는 서론이나, 청중을 환기시키기 위해 본론이나 결론에 만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 설교 내용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설교의 형태에 있어 서도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상상력과 민감성 설교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으로 시작된다. 한 사람의 삶을 보고 듣고, 맛보는 민감성을 요구하며 설교의 상상력이 실제적인 것이 되기 위해 설교자는 삶을 삶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울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것은 아버지의 나귀를 찾아다니는 동안에 일어난 것처럼 일상의 삶을 향해 문을 여는 설교자에게 웅장한 규 모의 삶이 다가온다. 문학 작품을 통해 삶에 개방적인 수용성을 갖는 것도 민감성 유지에 도움이 된다. 민감성 있는 설교의 위험성 다른 사람의 경험에 개방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하는 설교의 위험은 타인의 삶을 설교 속에서 드러냄으로써 설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상상력이 너무 압도적이라는 데 있다. (1) 대상에 따라 요구하는 다양한 필요에 모두 반응할 수 없어서 생기는 어려움이 있다. 10대와 나이든 세대는 다르며, 모든 사람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애매하고 일반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 (2)통일성이 부족하면 많은 그림들만 넘쳐나는 만화경과 같은 설교가 될 수 있다. (3)보다 극적일수록 인간 삶에 보다 가치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굳이 설교가 뉴스매체처럼 폭력, 전쟁, 도덕적 방탕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연출할 필 요는 없다. 작은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설교에 있어서 감정과 주정주의 감정을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 극단의 특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설교자는 정직하지 못함과 기만, 감정주의에 의해 교묘하게 행동을 하는 것의 위험을 인식해야 하며 청중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모방적인 마술이나 위장된 눈물, 웃음, 그 밖의 것들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효과적인 설교는 현저하게 감정적이 되며, 사람들이 인생 여정에서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삶의 광경들에 대해 개방적인 수용성을 얼마나 효과 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10 미학적 요소 수용에 대한 이견 설교에 대해 미학적(aesthetic) 요인을 용인하는 것은 장식적이며 사람들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변화를 가져오는 힘은 약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설교가 전인에게 설교하기 원한다면 어떤 사실 위에 상상력이 작동되도록 해서 혼미해진 정신을 깨 워야 한다. 삶을 바꾸는 설교의 혁명적인 힘은 미학적으로 삶에 접근하려는 정신과 함께 존재한다. 유머감각 삶의 이미지의 솔직한 수용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상적으로 웃음에 의해 증가된다. 보편적 진리를 제시하면서 시작되는 전통적인 연역적 설교는 유머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귀납적 설교는 우리 삶이 가지는 유머의 차원을 향해 직접적으로 문을 열어놓는다. 유머감각은 삶의 상상력을 주고받는 자유에서 나오며 유머는 설교자에게서나 회중에게 있어서 경축의 형태이며 사귐과 친교의 표현이다. 이미지 전달 방법 1)회중에게 널리 알려진 경험 세계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나누라. 또한 이러한 이미지 들은 실제적이고 현실 세계에서 인식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라. 만일 순교자의 삶을 나눈다면 현대의 회중에게는 너무 멀고 감당할 수 없게 느껴질 것이다. 2)설교자는 가능한 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관계와 반응들을 이미지화할 수 있는 말과 구절을 사용해야 한다. 모성에 대한 분석적이고 일반적 언급보다는 어릴 때 맡은 젖냄새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것이 훨씬 강력한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3)말의 사용에 있어서 경제적 원리는 지켜야 하며, 형용사와 부사 사용에 있어서 그 래야 한다. 청중이 채워야 할 이미지를 설교자가 모두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들의 지적 사고력을 모욕하고 손상하며, 새로운 의미와 통찰에 이르는 과정의 생 생한 부분을 빼앗는 것이다. 4)이야기와 서술함에 있어서 모든 자의식의 방해거리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발견합니다.”,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와 같은 말은 설교자가 책과 청중 사이에 방해를 하게 된다. 5)사용되는 언어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적 용어로 설교를 가득 채울 때 의사소통에 방해가 된다. 설교자의 언어와 회중의 언어는 유사해야 한다. 제5장. 귀납적 설교의 움직임과 통일성 귀납적 설교는 더 많은 사고 훈련과 연구를 필요로 한다. 설교자가 준비를 잘 한 증거는 메시지의 통일성에서 나타난다. 통일성은 설교의 움직임에 있어서 필수적 요 소이다. 단일 주제로 통일될 때의 유익 11 설교의 기본 구조를 이루기 위해 몇 개의 대지를 찾으려 하면(연역적 대지설교) 설 교의 움직임은 효과적일 수 없다. 설교자가 단일 주제로 제한하여 준비할 때 상상력 은 작동하며, 설교의 움직임이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설교의 주제를 하나로 제한할 때 메시지를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그리고 청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며 의미를 더해준다. 오늘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은 다음에 또 설교할 기회가 있음을 믿고 설교해야 한다. 단일주제로 다루기 어려운 이유 1)성경 본문이 여러 주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해진 성경 본문을 온 전히 석의 작업을 하면 그 속에 나타나는 여러 주장들이 결국 주요한 한 가지 주제 에 종속되고, 그 주제를 떠받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본문을 완벽하게 다루려는 바람이 설교자를 본문 안에서 주변만 맴돌게 하는 경우 가 있다. 그 결과 단일성과 명확성을 잃게 된다. 3)설교자가 다음 두 가지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1)성구집(concordance)이 주는 유혹: 설교자가 정한 설교의 주제, 혹은 주제의 중심 단어를 담고 있는 모든 성경구절을 성구 색인집에서 찾아서 그것들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을 성경적 설교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공통적인 단어만 나열하는 것일 뿐 통일성을 가질 수 없고, 그것으로 설교의 개요를 얻을 수 없다. (2)자신이 설교하기 쉬운 본문에만 이끌리는 것이다. 대지로 나누기 쉬운 본문을 택 하면 깊은 고민이나 연구 등이 없이도 설교 준비가 가능하다. 본문과 제목, 설교의 개요가 설교의 통일 성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통일성은 설교자가 하나의 확정적인 문장 안에 그의 중심적이고 근원적인 설교의 중심사상을 진술할 수 있을 때 얻어진다. 설교는 두 축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가지고 있다. 1)전례적 관점에서 질서정연한 순서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자연적 자발성을 가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2)교육학적 관점에서는 설교는 마땅히 제시되어야 할 내용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증 거 되는 것)과 배워야 할 행위로 이해하는 것(복음을 제시하는 행위) 사이의 긴장을 가진다. 전자는 설교의 메시지가 설교자와 교회에게 주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후자 는 설교자가 흥미, 설득력, 명확성을 가지고 복음을 명료하게 전하도록 부름 받은 커뮤니케이터인 것을 강조한다. 3)해석학적 관점에서는 “말씀하신 것”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밝혀왔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라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게 되면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인간의 말로 구분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설교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면서 설교자의 힘을 약화시킨다. 12 제6장 귀납적 움직임과 성경 본문 귀납적 성경 연구와 연역적 설교 석의에서 설교로 나아가는 통로는 전통적인 방법에서는 어려움이 생긴다. 석의 과정은 귀납적인 구조를 가진다. 본문의 어휘, 어법, 범주, 인물, 문학적 형태, 배경, 저자, 독자들, 날짜, 장소 등을 분리해서 살펴보기도 하고,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도 한다. 설교자는 도전하는 기쁨과 정상에 대한 기대를 하며 석의를 마친다. 하지만 연역적으로 설교를 하면 청중들은 올라갈 필요가 없다. 명제와 주제로 시작되는 설교의 결론부를 먼저 제시하는 정상에서 시작하여 연역적인 움직임으로 내려 올 것이다. 성경적 설교 이해에 있어서 문제점 설교자들은 설교를 준비할 때 본문에서 시작할 것인지, 사람들로부터 시작할 것인 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말씀의 경험을 본문에서부터 청중에게로 나아가는 여행이 아 니며, 사람들로부터 본문으로 나아가는 여행도 아니다. 일방통행이 아니라 두 가지 요소를 역동적으로 함께 포함하는 움직임을 통해 작성된 설교를 권장한다. 성경 본문에 대한 귀납적 접근 방법 설교자가 메시지를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본문에 다가가야 하는가? 1)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본문을 연구하기 위해 너무 빨리 주석이나 성경 사전을 봐서는 안 된다. 이미 준비된 주석이나 성경 사전을 먼저 보면 회중과 텍스트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얻기 어려울 것이며, 성경 본문도 침묵할 것이다. 본문 자체를 먼저 보아야 한다. 2)성경 본문에 제시되는 실제적인 질문을 생동감 있는 것이 되게 해야 한다. 설교자 가 너무 빨리 답을 해서는 안 되며, 때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인가?”라는 질문과 같이 본문에서 제시되는 말씀에 반대되는 진리가 있는지 질문할 수도 있다. 이것을 통해 지나친 단순화, 성급한 결론, 명백한 반절의 진리, 단일 차원의 도덕화 를 극복할 수 있다. 3)성경 본문에 신중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확언이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꿔 진 술한다. 설교자들이 훈계와 명령의 분위기로 일관하며, 본문에게서 듣는 것을 방해 받기 때문이다. 4)본문에서 “우연히 듣기”(overhearing)를 할 필요가 있다.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듣기 위해 너무 다가가면 본문이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의도를 놓칠 수 있다. “우연히 듣기”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둠으로써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분문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청중들은 자유롭게 엿듣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경본문에 의해 도전 받고 권고 받는다. 5)본문이 정해지고 나면 본문의 여러 주장들 중에 어떤 내용을 중점적으로 전할 것인지 13 한 가지를 정해야 한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을 다룬다면 설교자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 회중에게 말하는가, 바리새인들의 편에 서서 예수님께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의 역할만을 해 왔다면 가끔은 다른 위치에 서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6)설교자는 말씀 연구에 있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제7장 귀납적 움직임과 설교의 구조 성경의 다양한 문학 양식과 설교의 양식 설교의 단조로운 획일성에 비해 성경본문은 문학적 형태가 다양하다. 시, 모험담, 역사적 이야기, 잠언, 찬송, 일기, 전기, 비유, 개인적인 서신, 드라마, 신화, 대화, 복음 등의 형식을 가진다. 이런 다양함을 수 세기 전 헬라 수사학자들이 사용하던 것을 답습해서 말씀을 전할 때, 설교의 내용과 형태 사이의 내적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하느냐 하는 설교의 형태는 ‘무엇’을 전하느냐 하는 설교의 내용에까지도 영향을 준다. 청중은 설교자 자신과 성경본문, 그의 설교, 그의 회중,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설교자가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귀납적 설교에서의 설교 구조와 개요 귀납적 설교의 구조는 움직임이라는 요소에 종속되어야 한다. 대지 설교는 움직임을 방해한다. 청중들은 대지에 따라 설교 시간이 얼마나 남았 는지를 가늠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또한 논지에서 다음 논지로 넘어갈 때 접속사를 넣고, 연결구를 사용해도 부자연스럽다. 귀납적 설교는 움직임에 종속되어 있는 개요를 요구하고, 그 개요는 청중이 자신의 경험에서 스스로 결론 내리도록 하는 지점을 향해 집약적으로 움직여 갈 것을 요 구한다. “설교 사건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나눔이며 여행이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나가는 여행이다. 결론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241) 설교자는 그와 회중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 이것이 결론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요점이며 자신의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지를 알게 해야 한다. 전통적 설교는 결론과 함께 설교를 시작하며 지성, 감정, 의지의 세 부분에 호소하는 다소 인위적인 설교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귀납적 설교는 인간 능력의 모든 부분 이 동원되지만 판매원이 물건을 구매하게 만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설교자는 커뮤니케이션을 원해야 하고, 사람을 위해 설교의 개요를 만들어야 한다.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은 플래시백(과거의 장면으로 순간적으로 전환하는 방식), 회상, 갈등묘사 등으로 다양하다. 이것들은 단순히 즐겁게 하거나 유익함을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14 것이 아니라, 설교에 있어 청중의 흥미와 참여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를 위해 설교의 구성과 구조를 위해 하룻밤을 즐기기 위한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노력들을 해야한다. 귀납적 설교의 다양한 형태 시, 에세이, 비유 등의 장르에서 움직임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1)움직임은 관심을 갖도록 해주며 기대감을 갖게 해 준다. 이 관심과 기대감은 청중의 주의를 끌 뿐만 아니라 설교의 중심적인 주장을 이해하고 그것이 다가올 때는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청중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인이다. 2)움직임은 설교에서 전해지는 내용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법과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전하는 순서를 바꾸면 전혀 다른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처럼 움직임에는 내용이 가지는 힘이 있다. 그 움직임은 설교의 길이를 늘인다거나 단어들을 더 많이 증대시키는 것에 의해 대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납적 설교의 다양한 형태 중에 대부분의 목회자가 지니고 있는 것 이상의 예술 적인 재능을 요구한다. “예술적 표현”이라 함은 설교의 중심주제가 그 내용과 분위기 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주의 깊게 전개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를 보면 전통적인 형태가 왼쪽과 같은 연역적인 형태를 가진다면 귀납적 형태는 이 방법과 역으로 뒤집어서 오른쪽과 같이 실험해 볼 수 있다. 연역적 형태 귀납적 형태 서론 1. 본론 2. I. A. A. 1. 1. 2. 2. B. II. 결론 I. 명제가 주어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연역적 형태보다는 귀납적 형태가 명제를 향하 여 움직이는 인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가 여러 개의 대지를 가진다면 대지 와 관련된 문제들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 설교자는 종이 위에서 귀납적으로 보이려 노력하기보다 사상의 배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의 스피치 형태가 설교에 채택된다면 설교는 본문을 새로운 틀에 짜 맞추려 애쓸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이야기로 되어 있는 본문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로, 비유는 비유의 형태로, 전기는 전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로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윌더는 성경과 동일한 모방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대신 형태의 모방이 아닌 전략과 전달 수단에 15 대해 관찰하면서 배우는 것을 제시한다. 귀납적 형태를 선택하는 이유는 우리 시대의 화자 - 청자의 관계가 권위주의 시대 와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보다는 소수 몇 사람에게 권 위가 주어졌다고 믿고 설교자의 권위를 인정해 주던 이전 세기 우세했던 청중의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설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한 때 성직자를 권위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시대가 있었지만, 오늘날은 과학자가 교회 공동체가 인정하 든 하지 않든지 우리 사회의 권위자가 되었다. 귀납적 설교방법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귀납적 설교’는 문제 제시와 해결이라는 과학적 패턴을 모방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제시되는 귀납법은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행위를 넘어서 인간의 필요, 신체적, 정신적 기능, 경험의 영역을 채택한다. 이러한 귀납적 설교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제시한다. 1)설교는 ‘구두’ 커뮤니케이션이다. 이것은 기록된 매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큰 차 이가 있다. 가능하면 설교 준비는 말씀을 전달할 때와 같이 준비해야 한다. 구두적인 준비는 어떻게 그것을 말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준비되는 것이지, 단순히 어떻게 개요를 작성하고 설교를 써 내려갈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는 사항이 아니다. 2)대화를 나눌 때 어떤 아이디어들이 나눠졌는가를 생각해보거나 혼자 앉아서 설교사건 자체를 상상해 보면서 마치 설교가 지금 전개되는 것과 같이 단어나 문구, 짧은 문장을 통해서 설교에서 전개될 개념들을 순서대로 목록화해보라. 이 때 확인해야 할 것은 ‘주제가 전개되면서 끝까지 기대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설교의 자료들이 움직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3)전환부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찾아보라. 설교의 자료들이 별다른 변화가 없이 평이하게 움직이는 설교라면 지나친 단순화를 가져오며 현실감각이 없는 내용으로 청 중들은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느린방향전환 그러나 아직 언덕길 올라가게 하는 전환 더구나 또한 이것을 넘어서 사실 예리한 전환 반면에 정상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전환 그러므로 그래서 곧은 전개 그리고 이제 4)전환구들을 주목하면 설교자의 생각과 모양을 제공해주는 설교 구성이 가지는 움 직임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생각이 발전되어 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아직…” (it seems ..., but still...) 16 “물론 … 그러나 아직…” (of course ... and yet...)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 더 넓은 의미에서는…” (both this...and this ...yet in a larger sense...) “분명히 그것은 … 하는 경우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certainly it isn’t the case that ... however ... so perhaps...) “…말을 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you have heard it said..., but...) 귀납적 설교의 비판자들은 설교가 하나의 대지를 진술하거나 마지막에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는 긴 서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설교의 결론적 메시지를 포착하기 어렵고, 결론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귀납적 설교가 회중에게 흥미 가 있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예배는 끝이 났어도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고, 즐거움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회중에게 권위 없는 자처럼 설교를 할 때 가능하다. 부록 1. 설교 준비과정 1. 설교의 착상(생각 잉태하기) : 성경 본문에서 올 수도 있고 회중에게서 올 수도 있다.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에 인상을 남기도록 한다. 2. 설교의 아이디어와 놀기(유희하기) : 여기서 모든 재능을 다 동원해야 한다. 설교의 순서나 연속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착상된 설교의 아이디어가 생각, 느낌, 기억, 이전의 아이디어 등 모든 것을 촉발시킬 수 있도록 한다. 3. 명확성에 도달하기 : 본문으로 돌아가 상황을 분석하고, 정교한 주석적 작업을 한 다. 4. 나눔의 방법 : 지금까지의 과정 중에서 개인적 준비 방법과 공적인 선포의 방법이 움직임의 관점에서 동일하게 이뤄졌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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