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를 향하신 주님의 뜻 (14-17)]
흩어진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사도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오늘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예루살렘을 사수하고 있던 사도들에게 전해줬습니다. 사도들은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현장을 시찰을 해보니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이었다고 16절은 전합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하며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17절은 증거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두 사도는 왜 이같이 단정했을까요?
사마리아에 도착한 두 사도는 이번 안수 사건을 통해 전도의 대상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에게는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임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폐쇄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두 사도의 시선을 이방인에게로 즉 땅 끝으로 향하게 하시려는 성령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사도들의 안수 행위를 통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사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을 향하신 성령님의 섭리하심으로 사마리아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신 사건을 직접 체험한 두 사도의 이어진 행보를 25절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본문에 의하면 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마을에서만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물론 사마리아의 복음화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에 전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돌아갔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돌아간 이후에도 이방인 복음 사역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사마리아 사건을 통해 사도들의 소명이 땅끝으로 향하도록 역사하셨지만, 이들은 이번 일을 통해서도 성령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그리고 박해를 피해 흩어진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이방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두 사도가 이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요?
예루살렘에서 아름답게 공동체를 가꾸어가고 있던 기독 공동체는 유대교의 대박해라는 상황이 맞이했고, 그들은 신앙의 보금자리를 떠나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결국 그들이 안주했던 보금자리로부터 흩어짐을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의 순교와 유대교의 대박해와 흩어짐과 두 사도의 행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성령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모토 삼고 있는 우리 스스로에게 ['삶의 자리에서 예배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배의 현장을 교회로만 국한했던 우리의 좁은 시야를 땅 끝인 우리 삶의 자리로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인자하심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소망하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시몬 (18-24)]
마술사였던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이 권능을 갖게 해달라고 돈을 지불하려 했다(18)는 사실에서 사도들의 안수 후에 어떤 외적인 현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마술사 시몬이 탐낸 성령이 임한 외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외적인 현상을 추구한 시몬을 향한 베드로의 질타를 기록했습니다. 성령님의 외적인 은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은사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시몬을 꾸짖은 이유는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는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빌립이 전한 복음을 통해 시몬은 회심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을 분깃 삼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분깃 삼았기에 그는 외적인 현상을 추구했습니다. 외적인 현상을 추구하는 신앙은 건전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현상을 추구하는 신앙의 결말을 베드로는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이 성령님이 임한 외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는 이유도 성령님의 은혜로 주님을 믿게 된 우리가 시몬과 같은 어리석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코로나19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마지막 때 알곡과 가라지를 속아내기 위한 주님의 섭리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임무는 주님께서 많은 알곡을 추수하실 수 있도록 복음을 통해 주님의 자비하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인자하심을 믿고 신뢰하면서 추수 때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고 세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도는 왜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나요?
3. 사마리아를 방문한 사도들을 향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뜻을 깨달았나요?
4. 성령님이 임재하신 가시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5. 시몬의 행동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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