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의 회복이 안식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키우던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하자... 건져내지 않겠느냐? - 생명을 구하지 않겠느냐? - 생명을 구하는 기쁨 자체가 안식입니다. 쉼입니다. 그러한 안식, 그러한 생명을 위한 기쁨을 얻는 길을 출애굽 1세대는 원망하고 한탄하며 거절했습니다. 그게 큰 실수였습니다.
3. 이 안식을 우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믿지 못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이 안식은 공교롭게도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에... 순종할 때에 쉼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기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을 자꾸 시키시는 데 그것을 해낼 수도 없는 것 같고, 설사 해낸다 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할 거 같고, 나에게 손해될 것 같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안 믿는 거지요. 불순종은 여러 핑계를 대도 결국 안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그 해결책을 저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칼(Schwert)밖에 없습니다.
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어 읽어 봅시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날선 전쟁용 칼과 같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들어오셔서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십니다. 결국 모든 것이 그가 만드신 것이기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이야기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검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검이란 두 가지를 뜻합니다. 하나는 우리를 심판하는 말 그대로 군인의 검입니다. 우리는 그 칼이 휘둘러지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칼을 통한 수없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찔려 죽었습니다. 이 칼의 심판은 검의 말씀에 뒤따라 왔습니다. 곧 말씀이 실제 칼이 된거지요. 이에 찔리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검이 신약에서는 이 칼이 종양을 찾아 우리 육체를 파헤치는 의사의 수술 칼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칼을 쓰는 사람 중 유일하게 생명을 위하는 직접입니다) 병이 있으면 엑스레이나 CT, CRT로 우리는 육체의 안을 들여다봅니다. 약을 쓰기도 하지요. 그러나 치료가 안 되면 결국 의사가 칼로 우리 몸을 해부하기 마련입니다. 일단 수술에 들어가면 반드시 찾아내서 종양을 잘라내야 합니다. 열었는데 더 이상 칼을 대지 않고 바로 덮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는 사망을 뜻하기에 마지막까지 그 환부를 잘라내기 위해 우리의 마음 안을 헤집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4. 세상의 칼과 하나님의 칼 : 이 죽음과 생명 사이를 오가는 수술은 늘 우리 옆에 있습니다. 한국 정치가 늘 그렇지만 지금 몇 사람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치적이 아닌 성경적 접근을 해봅시다. 그 누구를 뒤집고 칼로 파헤쳐도 성공 신화(Erfolgsmythen)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급적으로 올라가기 위해, 경제적으로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혼자만 깨끗해서 되는 것도 아니어 보입니다. 사실 모두가 그렇게 성공 신화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깃든 어두움이며 종양입니다. 의롭게 심판한다고 이를 헤집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모두 다 이 우상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의 길에서 탈락할까 두려워합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사람의 모든 것을 칼로 해부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세상은 드러냄을 수치와 낙인(Brạndmal oder Schandmal)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드러남은 죄를 버리고 은혜를 얻기 위한 기초입니다.
5. 안식의 실제 -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세상 가운데 고민하다가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주님 저를 좀 치료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입니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 눈을 감습니다. 이 행동을 무엇이라 말할까요? 오늘 본문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원래 교회에 ‘봉사하러 또는 일하러 갑니다’ 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보좌”란 원래 구약의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에 대하여 대신 용서를 빌기 위해 나아가던 지성소를 뜻합니다. 거기에는 거룩한 말씀이 담긴 법궤가 있습니다. 들어갈 때에는 발에 밧줄을 묵고 방울을 달고 들어갑니다. 갑자기 털썩하고 소리가 없으면 그곳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죽은 것입니다. 왜요? 자신의 죄를 제대로 고하지 못하고 풀지도 못하고 죄 없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죄의 대가를 죽음으로 치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죽을 각오를 하고 회개하고 간구하며 지성소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이 “나아가다”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지성소 사역만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담대함이 없으면 그렇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곳의 은혜가 없다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를 담당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이제 이 나아감은 예배에 나아와 봉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속합니다. 찬양대, 교사,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애찬과 청소 봉사자 - 우리가 만일 이 자리에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죄를 속하지 못한 마음으로 사역한다면 구약 시대라면 하나님은 저희를 죽이실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이 중에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분의 은혜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겠지요. 예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 자리에 나와서 저희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저희 몸을 그 칼에 맡기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아가셔서 은혜로 새 몸을 입고 살아나셨고 저희도 그렇게 변화될 줄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6.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모로부터 그렇게 들었습니다. ‘세상은 살벌한 전쟁터라고 깜빡하면 실수하고 다 털린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하라...’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은 저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왔으면 다 주께 맡기고 주님이 하시는 대로 두라고...’ 그래서 우리는 근심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는 일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경험을 세상에서는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이기에 주일에 교회에서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깁니다. 제가 이 일로 심히 근심하지만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발로 뛰는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수술대에 올라간 환자가 다른 모든 것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쉼을 주십니다. 그 생명의 회복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66권 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 히브리서 10:1-10 (0) | 2023.09.17 |
---|---|
[설교] 히브리서 5:1-14 (1) | 2023.09.08 |
[설교] 히브리서 4:1-11 (0) | 2023.09.06 |
[설교] 히브리서 2:10-18 (2) | 2023.08.31 |
[설교] 히브리서 2장 (2) | 2023.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