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히브리서 10:26-39

yt1981 2023. 9. 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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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히브리스 10장 26절로 39절까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법을 패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정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낸 것을 생각했다. 

혹은 비방과 환란으로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미라 그러므로, 너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리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고 하지만은 사실 믿음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죠. 

믿음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믿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행동의 주체가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또 마음에 붙들고 있는 말씀이 나를 인도해 간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안식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은 사실은 안식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믿음 내가 어떻게든지 해보고자 몸부림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를 지킨다는 것을 알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고 또 믿음을 배반하거나 저버리는 일이 그렇게 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번 예수님께서 우리를 9월하셨다는 진리를 알고도 그걸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뭐 배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죠. 1절 26절부터 29절까지 한번 듣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할 불만이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피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받고 자기를 거룩하기 위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구원을 가볍게 여기고 구원을 모독하는 행동을 한다면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받고 있는 그런 형벌에 비한 얼마나 더 큰 형벌을 받겠느냐 그렇게 우선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도 왜 의도적으로 그게 의식적으로 또 죄를 범하느냐는 것을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그렇게 값 없이 버리느냐 내지는 진리의 길에 들어섰음에서도 불구하고, 일부러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진리를 부인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렇게 입으로 날마다 얘기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한다면은 그거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든지 아니면 주림이라고 불렀으면 주의 종된 삶을 살든지 그래서 예수님을 입으로 주여줘야 하는 자가 늘 화건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야 뭐 사람이 실수를 한다. 누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고 예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작 부인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거는 그냥 묵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신앙 안에서의 두려움을 다시 갖게 되는 것이죠. 모를 때야 어떻습니까? 모를 때야 겁없이 사는 것이죠. 하룻상알이 범무수인 줄 모른다고 그러고 살지만 그러나 우리가 정말 진리의 세계에 들어섰으면서 진리의 가치를 우리가 정말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하는 삶을 살면서 정작 가치를 부인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처럼 모순되고 그것처럼 자아당착적인 일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죠. 근데 우리가 그런 일을 그렇게 흔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그걸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놓고 나서 그래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고도 두세 사람 증인이면은 그가 반드시 죽임을 당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뭐 가늠을 했다. 하는 그런 걸 두세 증인만 있으면 돌로 쳐죽이는 일이 있었는데, 모세의 율법을 어겨도 그런 처벌을 받았거늘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고 동물 제사의 피를 헛되게 만들어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헛되게 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있겠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겪는 고통을 자꾸 그런 점에서 인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은 사실 참 무서운 일이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연구예요. 

뭐, 뭐 빌라도가 뭐 십자가에 직접 못 박았습니까? 사실은 유대인들이 하도 끌고 와서 말이죠. 살인에 처해 달라고 사형해 달라고 난리를 치고 말이지 당신이 이 예수를 처형하지 않으면 당신이 가히사에 대한 반역이다. 그렇게 몰아대는 군중들의 협박 겁박에 몰려서 예수님을 내어줬지만은 정작 빌라도는 어떻게 됩니까? 뭐 두고두고 그냥 사도신경의 이름이 오르락 내려와서 지난 2000년간 그렇게 고난을 겪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오고 올 세대들한테까지 이름이 기억되는 그런 일을 겪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진리를 부인하게 되면 영원한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예요. 모를 때는 구원의 기회가 남아있지만 구원을 받고도 다시 뭐 되돌아가 버리면은 그건 진짜 영원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그런 말이죠. 30절 이하를 읽습니다. 

시작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느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정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삶을 구원받은 자답게 살 때는 하나님의 계명에 사실은 충실해야 하는 것이죠. 신명기 32장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2장 35절 36절 말씀입니다. 

시작 그들이 실족할 그때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이 환란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일이 속히 오리로다 참으로 여하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노인자가 없음을 보시는 대로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께 보복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시고 하나님께서 보복해 드릴 우리에게 보복을 갚아줄 그런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그런 보복의 악순환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구원받은 백성의 삶은 다시 죄의 악순환으로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죄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악을 선으로 갚기 위해서 구원의 대사이클이 시작이 돼야 되는데 우리가 악을 보고 악으로 다시 그걸 갚게 되면은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물줄기가 틀어지고 마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뭐 억울한 일을 겪건 뭐 그런 일을 겪은 그건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보복하는 것 원수 갚는 것 하나님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악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악을 징취하기 위해서 그래서 여러분 뭐 아수를 바벨로닉도 멸망하고 바벨로닉도 뭐 헬라가 멸망시키고 헬라가 또 뭐 로마가 멸망시키고 맨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돌아가는 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악의 악서클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무위로 만들어버린 게 일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이클에 들어가면 안 된단 말이에요. 우리는 선순환의 삶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저는 우리가 그런 이 정말 빠져나올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그게 축복입니까? 

그런 삶을 안 살기 시작하는 거 그 악어를 악어로 묵상해야 하는 삶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이게 복 중의 복이란 말입니다. 제가 그러지 않습니까? 뇌물의 사이클에 들어가면 안 주고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무슨 이렇게 딱 뽑아서 어디 딴 데 둔 것처럼 그런데 상관없는 자리로 이렇게 한직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야 하나님 내가 주님 믿고 아침마다 새벽 예배했는데 어떻게 승진은 못할 망정 좌1000이 됩니까? 그러다가 보십시오. 나중에 정권 바뀌면 살아남은 고백을 듣지 않습니까? 뇌물의 사이클에 들어갔다가 그냥 원치 않는 그런 구속을 당하고 그 난리를 겪는 것 그런데 그걸 보고서도 또 불나방처럼 거기에 뛰어들어요. 여러분 사람들 잘 되는 게 잘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뇌물 받지 않는 자리에 가 있는 게 복인 줄 알고 시간 나면 성경 더 보세요. 

괜히 사람들을 뇌물 받을래도 가서 만나서 얘기 들어줘야 되고 거절하는 것도 또 찾아 돌려줘야 되고 일이 복잡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일도 없고 그럼 성경 좀 더 보고 앉아 있으면 되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 이 다음 일을 예비하시는 걸 만나게 됩니다.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 안 하시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분주한 사이클에 들어가 가지고 뭐 사람들 매일 만나고 약속 아침 저녁으로 있으면 좋아 보입니까? 피곤하기만 해요. 피곤하기만 해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멍하니 있지 말고 10편 한 편, 더 외우고 그러면 얼마나 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텐데 하나님 나는 어찌 자리를 안 보내고 이 자리에 있게 하십니까? 그러고 앉아있으면 세월아 네월아 하면 얼마나 비참해요.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이 때를 따라 쉬게 하는 것을 은혜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32절 이제 알리겠습니다. 시작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란으로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낮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압니다. 이게 빛을 받았는데 고난을 겪는 거예요. 구원을 받았는데 고난의 길을 겪는 것입니다. 출핵업했는데 광야길이에요. 그런데 광야에 감추어진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축복을 발견해야 돼요. 자 뭡니까? 많이 오지는 않아 하루 그냥 안 굶어 죽을 만큼 내렸는데 만나의 축복이 있어요. 떼 부자가 되는 건 아니야. 그러나 굶어 죽지 않는 축복 아니에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 반성물이 터져요 야 얼마나 시원한 샘물입니까? 고기 그냥 고기 먹겠다고 난리를 치니까 메추라기가 지레 쌓여서 또 고기도 먹긴 먹어 매일 먹지는 못해도 그런 축복이 있단 말이야. 아니 그리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축복이 어딥니까 갈 바도 모르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는 광야길을 갈 때 하나님이 친히 길을 인도하시는 축복 그게 다 복이라는 걸 우리가 알게 하는 게 광야의 삶이란 말이에요. 광야가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이죠. 이 큰 도시에 살면 다 자기가 벌어먹고 사는 줄 알아요. 

시골에서 농사지어 봐야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씨만 뿌렸지 지가 하는 게 뭐 있는데, 잡초 좀 해주고 뭐 비도 하늘에서 내렸고 뭐 땅의 지력으로 아이 제가 아내가 뭐 어디 가서 뭐 이게 라벤다 이 쪼그만 거하고 뭐 로즈마리를 하나 이게 아니 얼마나 자랐는지 내가 보는 날마다 신기해 만져보고 조그마한 꽃도 보이지도 않는 꽃을 피워요 라벤더와 로즈머리가 얼마나 크는지 아니 땅속에 심겨져 있을 뿐인데 흙 속에 있고 햇빛 좀 센 거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랄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생명이 자라는 원리를 알아야 우리가 초조하지 않단 말이에요. 

그걸 놓치면 그냥 초조해 지가 해야 뭐 자라는 줄 알고 지가 해야 뭘 먹고 사는 줄 알아 꼭 비행기 안에서 뛰어 띄고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가만히 있으면 뉴욕에 도착할 텐데 그냥 안에서 뛰는 거예요. 그냥 빨리 갈 거라고 빨리 같이 입니까? 또 짐을 맡겨놓고 짐 걱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가방에 올려나 검사하면서 또 누구 뭘 가져가지 않을까? 그냥 내리면 가방은 와 있어요. 이게 참 인간이 말이죠. 이게 고난의 과정을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은 앞으로 일이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겠어요. 

고난의 과정을 다 통과했다면, 그때는 비방도 받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도 같고, 또 이런 형편없는 사람들하고 사귀는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그러나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 이거 하나 알면 끝난 거예요. 인생의 비밀은 이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압니라 그러면 뭐 자리를 좀 뺏기든지 무슨 좀 뭐 돈이 좀 없어진지 뭐 건강이 심지어 좀 상하든지 그게 그렇게 우리를 어렵게 만들지 않는단 말이에요. 영구한 소유 변치 않는 그런 영광을 우리가 보면 이 땅에 사라질 영광들에 우리가 눈을 들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태양을 본 자들이 촛불에 연연하겠냐는 말이에요. 

태양의 빛을 빛이라고만은 우리가 경험한 사람들이 촛불을 보고 너무 밝다 형광등 하나를 보고 이런 빛은 본 적이 없다. 이런 소리를 하겠냐는 말이에요. 그 우리의 삶의 기준은 영원한 것에 이미 두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야 뭐 고난이 좀 있건 바람이 좀 불건 태풍이 5건 심지어 미세먼지가 좀 끼건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35절입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근데 이 상을 받는 게 뭐냐면 우리가 믿음의 상은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의 상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상이 있음을 믿고 나아가야 되는데 예 그때 뭐가 필요합니까? 36절입니다. 

시작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받기 위함이라 자 씨앗이 열매를 맺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오직 믿음과 인내가 필요한 거란 말이에요. 씨앗이 우리의 손에 들려서 땅에 파묻힐 때 씨앗이 믿음으로 견뎌야 돼 이 주인은 나를 땅에 파묻는 건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게 아니라, 열매 맺고자 함이다. 이걸 믿어야 돼. 씨앗이 무슨 발악할 리는 없지만, 손에서 안 떨어지겠다고 발악을 하면 그래 가지고 땅에 안 심기면 돌밭에 떨어지고 길가밭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단 말이에요. 가시덤불이 떨어져서 그냥 생각하다가 날아서 먹어버리고 만단 말이에요. 주인의 뜻을 믿고 땅에 그냥 파묻히더라도 땅에 파묻힐 때 죽을 때 죽어야 된단 말이에요. 자 그러면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건 뭡니까? 죽음의 시간들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자 씨앗이 싹트는 것도 씨앗이 싹이 틀려면 씨앗이 몸에 찢겨져야 돼 몸이 찢겨져야 뿌리가 나는 거예요. 싹이 트는 거예요. 가지가 자라더라도 줄기에서 가지가 나는 것도 몸이 찢겨지는 일이에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가지가 찢겨져야 또 가지가 가지를 낳고 또 가지가 찢겨져야 잎이 생기고 모든 생 혁명의 과정은 희생과 헌신과 이게 고통이 따른단 말이에요. 그래야 꽃이 피는 거예요. 그러면 꽃은 뭔데 꽃은 뭔데 잠시 폈다지는 건데 그러면 꽃이 져야 이제 또 꽃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을 보면은 고통과 인내 과정이란 말이에요. 씨앗이 하는 건 그냥 큰 열매를 맺을 때가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이 죽음과 같은 고통이요. 

고통과 같은 그런 인내라는 거라 인내 그러니까 이게 어리석은 사람은 인내를 못 하는 거예요. 그저 졸갑하고 조합증을 내다가 사실 끝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 로마서 말씀을 보십시오. 로마서의 5장 3절 4절 한 번 더 읽어요. 로마서 5장 3절 4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할미로다 환란 중에 왜 즐거워하는 말이에요. 세상 사람도 환란 중에 그냥 통곡하고 환란이 오면은 그냥 다 죽은 것 같이 이렇게 엎드러지지만 우리는 환란이 와도 기뻐할 수 있는 까닭은 환란을 견디는 까닭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는 까닭은 그게 인내를 불러오기 때문이고 인내를 하다 보면, 반드시 소망을 이루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의 소망은 인내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믿음의 열매란 인내를 통해서만이 얻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그게 뭐 시간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니에요. 37절 이야기를 끝 마칩니다. 시작 잠시 잠깐 후면 오시리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스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며 내 마음이 그런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감 멸망할 자가 아니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을 가진 여러분 잠깐 있으면 여러분 인생 끝납니다. 뭐 이 나이 될 줄 알았습니까? 제가 금방이다. 금방 72에요. 금방 이제 뭐 103살려나 하여튼 뭐 하여튼 금방이란 말이에요. 이게 금방금방 지나간다는 걸 이걸 우리가 알기 때문에 여기 지나가는 과정 전체 너무 우리가 이게 뭐 죽을 것만 같다 이렇게 매달려 있지 않는단 말이에요. 

우리가 장차 다가올 영광에 비해서 이건 족히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에요. 영원이라는 시간은 여러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긴 밧줄이란 말이에요. 거기에 우리 일생이라는 건 100년이건 50년이건 점과 같은 경점과 같은 시간이에요. 이 시간에 뭘 그렇게 우리가 그렇게 콩당콩당하고 살겠어요. 제가 어제 아침에 무슨 뭘 생각하다가 혼자서 묵상하다가 여전히 괘씸한 놈들이 얼굴이 또 왔다 갔다 해 이거 내가 지금 이게 이미 목사가 도대체 몇 년인데 이게 아직도 이런 얼굴이 왔다 갔다 하나 근데 내가 금방 깨달았어요. 이게 요새는 사람이 이름이 가끔 생각이 안 나 앞에 두고도 이게 생각이 안 나서 제가 목사들 보고 니 이름이 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생각한 거야. 

이 인간들을 내가 조금만 있으면 이름도 기억을 못 하겠구나 근데 이름도 못할 인간들하고 싸우고 찌지고 뽑고 다투고 할 게 뭐가 있나 도대체 나중에 보면, 누구하고 싸웠는지도 기억도 안 되고 치매가 되면 다 잊어버릴 텐데 그래서 내가 야 인생을 허비하는 가장 지름길은 싸우고 찌지고 볶는 거구나 미워하고 사는 거구나 그렇잖아요. 곧 이름도 모를 인간들을 누군지 생각도 안 날 인간들과 왜 싸우냐는 말이에요. 왜 다투냐는 말이에요. 그냥 넉넉하게 살고 도와줄 수 있을 때 도와주고 한 번 보듬어 주실 수 있을 때 보듬어 주고 안아주고 그렇게 살다 가는 거죠. 장차 올 영광은 지금부터 누려야 돼 그게 구원받은 삶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삶은 인내의 과정 전 과정이 인내의 과정이에요. 

찢겨도 인내야 되고 쪼개져도 인내해야 되고 모든 과정들이 섭리 가운데서 구원을 이루고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자칫 그때는 이해가 안 되지만 왜 이런 시간을 나한테 허락하십니까? 그게 열매 맺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뒤로 가지 않는단 말이에요. 여러분 과거에 묶여서는 미래로 못 갑니다. 과거를 짊어지고 가는 것도 너무 힘이 들어요. 과거는 버려두고 미래로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도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걸음은 곧 영광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요. 여호와 니시 깃발 대신 하나님 보고 가는 거예요. 깃발은 땅에 꽂혀 있지 않습니다. 깃발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미래와 영혼을 바라보아야 깃발이 나부끼는 걸 보고 가는 것이죠. 저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부끼는 미래를 바라보고 걸어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 그렇습니다. 이름도 기억 안 날 인간과 다투지 않게 해 주십시오. 

기억나게 해주십시오. 뭐 괘씸한 생각도 그것도 내 생각이지 뭐 그 사람은 나를 더 괘씸하게 생각할 겁니다.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게 해주옵소서 그렇게 한번 기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와 동행하는 걸음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들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한 하루지만은 일과지만은 인간 속에 파묻혀 살지 않게 하시고 눈을 높이 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영광된 걸음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가다가 쓰러진 자가 있다면은 한번 이렇게 세워주고 낙심한 자가 있다면은 한번 위로해 주고 걸어가는 오늘 주님의 아들이요. 주님의 딸 된 영광스러운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내 일이 바빠서 내 일이 그저 중요해서 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 외면하고 갈 길이 아니라 오늘도 가다가 내 일이 바쁘고 급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현금 한편도 살펴보는 하루가 되게 해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그렇습니다. 바빠서 지나가는 사람 그리고 아까워서 지나가는 사람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지키느라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 몸에 피가 묻을지라도 응급 환자가 있다면은 응급실에 옮겨주고 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부주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넉넉하신 사람과 성령에 충만하게 하심이 오늘 하루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전에 고개 숙인 넉넉한 믿음의 형제들 자매들 위해 지금부터 여왕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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