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잠언이라고 할 때 이 잠자가 바늘 잠자입니다. 말씀 언 자예요. 바늘같이 사실 우리를 콕 찔러대는 말씀이에요. 듣기만 꼭 좋은 것도 아니고 편한 것도 아니고 늘 우리를 일깨우는 말이기 때문에 말은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는 말씀 그래서 자문이 꼭 이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죠. 지혜가 세상에도 있고 또 하나님의 지혜가 있듯이 세상은 세상대로 지혜롭다고 말하는 그리고 지혜롭게 여기는 그런 말들이 있어요. 그래서 격언이라든지. 금은이라든지. 그런 얘기들이 다 어떻게 보면 잠언의 부류에 들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또한 어떻게 보면 우화나 또 예화나 뭐 그런 비유나 또 수수께끼나 이런 것들도 다 자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길지 않은 거리지마는 많은 말이 아니지만, 짧은 걸 짧은 말 한두 마디로 우리의 생각 전체를 뛰흔들어 놓고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는 말들이 다 자문의 부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문을 솔로몬이 모을 때 당시에 고대 중근동에 있는 많은 나라에서 이 잠원들을 모아 왔어요. 이스라엘에만 있는 말들도 아니고 사실은 널리 세상에서 자문을 구했던 것을 편찬해 놓은 것이죠. 오늘 말씀은 보면은 이 잠원이라고 하는 지혜의 말씀 우리를 일깨우는 지혜롭게 하는 그런 말씀들을 사람에 비유해서 마치 사람이 우리를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화라고 하죠.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듯 성령님께서 우리를 두들겨 깨우듯 그렇게 지혜의 말씀 이 잠원이 우리를 부른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말씀으로 부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말씀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으면 늘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각하고 있으면은 사실 도처에서 들리는 말도 들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드리시고 깨우시고 인도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어요. 우리의 양심 가운데 사실 우리는 인너 보이스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 말들은 때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때 귀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말씀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내 인생이 지금 이 길목에서 헤매지는 않을 것인데 그런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점점 따르면서 주님을 알아가면서 주님 안에서 듣는 말씀 말씀을 듣기 전에도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에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하나님께선 우리를 늘 두드리고 계셨고 도처에 우리가 깨어 있기만 하면 관심을 기울이기만 하면은 들을 수 있는 지혜 말씀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지혜가 마치 어디에나 사람들이 있는 번잡한 곳이건 시장이건 세상의 어느 곳이건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라는 그런 표현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말씀이죠. 그러면 지혜는 우리가 눈 뜨기만 하면 어디에나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인행위면은 필요하사라는 논의 말이 있지만 그래야 우리가 앞서가는 세 사람 중에 누구든지 내 스승이 있다. 아니 배울 마음만 있다면 세 사람 다에게서도 배울 수 있어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고 우리의 마음이 낮기만 하다면 겸손하기만 하다면 배우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뭐 티비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마는 정말 어쩌다가 정말 보다가 빨려 들어가는 달인들이에요. 그 달인들의 삶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40년 50년 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정말 그 정말 구할 사람이 갈 수 없는 경지에 가 있는 걸 보게 되죠. 우리가 지중세 시대 로렌스 형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뭐 대단한 사역을 해서 그의 영성이 알려졌습니까?
설거지 열심히 하고 그냥 그릇 열심히 닦고 그리고 사무실에서 행정적인 일을 할 때 늘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그의 삶 전체가 어느 누구보다도 영향을 끼치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죠. 수도 마리스크가 수도 뭐 책임자도 아니었고 수도성들을 훈련하는 무슨 교수다 교사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의 삶 전체가 한순간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브라더 로렌스 형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고 하는 짧은 책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죠.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어쩌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말없이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어쩌면 우리에게 늘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어디에서건 누구로부터건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귀가 무디기 때문에 때로는 확성기처럼 우리의 상황과 고통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마는 우리가 예민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오고 가는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서도 지혜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오늘 지혜는 마치 광장에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외치듯 그렇게 우리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는 것이죠.
마치 주님이 우리를 부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듯 오늘 지혜를 그렇게 의인화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만 한다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은 우리는 배우지 못할 사람이 사실 없지요 반면교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실족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보다도 그들로부터 더 배우는 마음이 된다면은 세상에 나무랄 일이 뭐 그렇게 많겠으며 그렇게 흥분하고 비난할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정말 이 세상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한지를 한번 보십시다. 22절 말씀입니다. 시작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이 지혜가 세상을 향하여 오늘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 않아요. 어쩌면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들 그리고 거만한 자들 그리고 미련한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편만한 지혜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지혜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고 가르침을 가까이 하지 않고 깨우침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사실 그들은 날마다 어리석어지고 날마다 교만해지고, 날마다 미련해지기가 쉬워요 나이 든다고 지혜롭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많이 배운다고 지혜롭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라는 게 갈수록 교만하고 지식이라는 게 갈수록 혼미약해 하는 것이지.
여러분 바른 지혜 없이 우리가 지식을 아무리 쌓아봐야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지 깜짝깜짝 놀랄 일이에요. 그들은 진정 정말 배우고자 하는 어떻게 보면 마음을 이미 놓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엔 점점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어요. 점점 교만하고 거만한 길을 걷습니다. 점점 더 미련하고 그야말로 우둔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죠. 오늘 사람들을 향하여 지혜가 지금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겠느냐 그리고 오늘 23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듯이 이렇게 오늘 지혜가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문의 말은 대개 책망의 말 경계의 말 깨우침의 말이 많습니다. 말을 듣고 돌이키라는 것이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좋은 말이다. 그렇게 들으면 뭐합니까? 전 우리 제가 언제 한번 설교 시간에 얘기했지만, 우리 외할머님이 일제시대 때 학교를 못 다녔어요. 일본학교 가기 싫다고 소학교를 안 갔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 어떻게 보면 무학이나 마찬가지인데 제가 90에 이르기까지 할머님 쪽 얘기를 들어보면은 여러분 삶에서 묻어나는 지혜가 바랄 수 없 제가 그동안 정말 한 6년간 쓴 트위터 자문록에 뿌리는 우리 할머님이 저한테 한 말씩 툭툭 던져주는 그야말로 잠원과 같은 말씀 때문이었어요. 그냥 이렇게 꼭 나무라지 않으세요. 저를 불러놓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치듯이 한마디씩 툭툭 던지고 지나가는 거예요. 뭐 예를 들면, 그런 거예요. 뭐 이렇게 좀 큰 사람이 되라 이런 걸 앉혀놓고 뭐 5분 10분 잔소리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가듯이 그냥 한마디 툭 던져요 집 좁은 데서는 살아도 사람 좁은 사람하고 못 산다 그러면 말을 하루종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일생 기억하지 않아요. 조개는 자라도 쓸 데가 있지만 사람은 잘면 못 쓴다 여러분 작은 조개는 먹거리에 먹긴 하지만 작은 사람 어따 쓰겠어요. 그렇게 한마디가 제 귀에는 그냥 그렇게 일생을 저를 이렇게 가르치는 말이 된 거죠. 긴 말도 아니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마디가 말이죠.
학교를 안 다니셨지만 정말 뭐 어렵게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보면은 일제시대 때 뭐 쌀 다 뺏아갈 때 쌀 좀 가지고 이리 이집 집 다니면서 팔고 그래서 자녀들 그렇게 뒷바라지했던 그런 할머니지만 인생에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 가운데서도 삶이 녹아있는 삶의 전체가 묻어있는 그런 지혜로운 말씀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오늘날 이 시대가 이렇게 풍요하고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결정하고 사는 것을 보면 어리석어도 이렇게 어리석은 세상에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있는 그런 지혜 말씀 가운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여러분 배운 바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겠고 그리고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보일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사실 내 말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깨닫게 하리라 그런 말이에요. 여러분 이게 지금 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의도 아닙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고자 한 일이 두 가지 아닙니까 내가 내게 말씀을 주셨고 그리고 말씀을 깨닫도록 성령을 주신 것 아닙니까 지혜자가 하는 말이 뭡니까? 내가 내 영을 부어주겠고 내 말을 알게 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스님은 지혜자예요.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야말로 말씀과 성령으로 이 세상을 넉넉히 헤쳐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 불러서 구원하는 게 어떤 삶일까요?
날마다 나를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는 삶이고 날마다 내 생각을 쫓아가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쫓아가는 삶 아닙니까 오늘 지혜자는 그야말로 마치 우리를 주님이 부르듯 그렇게 부르신다는 것이죠. 그러나 내가 불렀으나 네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 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 내가 비웃으리라 여러분 이 세상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는 향한 말씀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오래된 옛말이라고 그냥 치부 넘어갈 만입니까? 아니잖아요.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고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야말로 이 시대에도 꼭 들어맞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게 무슨 들을 만한 일이냐 그렇게 하지만은 결국 재앙을 만날 때 그리고 두려움이 임할 때 우리는 실체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게 했고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게 했고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 나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러나 그때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뭐 이렇게 지금 토라지듯 삐지듯 말씀하시는 게 뭐예요? 여러분 그 어려울 때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화 받으면 또 어려운 부탁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연락 없다가 꼭 힘든 일만 있을 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꼭 자기 돈 있을 때는 실컷 놀러 다니다가 돈 떨어지면 돈 빌리러 오는 사람 같아요. 그게 뭐 무슨 마음이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거 뭐 그렇게 기쁘겠습니까?
무슨궂은 일이 있으나 뭐 좋은 일이나 때마다 와서 그렇게 무슨 이런저런 위주알 고주알 얘기를 하다가 한 번씩 부탁을 해야지 아무 말도 없다가 그냥 불쑥 부탁만 하면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날마다 저는 여러분들이 주님 만나는 것을 정말 축복합니다. 여러분 자주 만나시다가 일이 해결이 되는 것이 자주 만나면 얘기 안 해도 알아요. 제사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주 만나는 사람 뭐가 필요한지 다 압니다. 왜 주님을 가까이 하라고 그러겠어요. 주님을 가까이 하고 있으면 주님이 우리가 피로를 뭘 하고 있는지 다 아시고 주님이 얘기하기도 전에 우리가 입을 뻥긋하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피로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탁은 내 부탁이 아니고 그걸 주님께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부탁하는 것이죠. 그분들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유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교훈을 받지도 않고 책망을 업신여기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뭐예요?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죠. 여러분 악이란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부재 상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헤맨다는 것은 방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셔서 방황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지 않기 때문에, 방황이 시작된 것뿐이죠. 그러다가 우리에게는 캄캄한 어둠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친목하실 때 우리는 신고약 중간기 400년을 하나님께서 친목하신 시기라고 말합니다. 왜 그때 예언자들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예언자들의 입술에 말씀을 주지 않았습니까?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따로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
여러분 그때가 암흑기 아닙니까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는 정말 암흑을 향해 치닫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경고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우리가 듣기만 하면 귀 기울이 돌이키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지금은 되는 시대예요. 돌이키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마치 지혜자가 약속한 것처럼 내가 내 영을 부어줄 것이고. 그리고 내가 내 말씀을 내 입에 두리라 그렇게 약속하신 시대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마치 연했던 것처럼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말을 깨달았던 것처럼 이 시대도 깨닫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면, 32절 말씀이다. 어떻게 됩니까? 시작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그래야 어리석다는 것은 여러분 앞으로 가는 것 같은데, 뒤로 돌아서는 것과 같애요.
나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점점 뒤로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진정으로 인생을 살다 보면은 내가 머물러 있는 때는 없어요. 내가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나는 그냥 나아간다고 생각하는데도 뒤로 가고 있거나 나는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뒤로 가고 있거나 여러분 길밖에 없어요. 제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강물이 마치 제자리에 있을 수 없듯 인생이 마치 제자리에 멈출 수 없듯 우리는 앞으로 가든지 아니면 뒤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고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안일을 좋아하여 안일 무사함을 좋아합니다. 별일 없기를 좋아해요. 여러분 인생에 별일 없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변에는 별일로 가득합니다.
오히려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내 주위에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일들인지 주목하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우리가 발견하고 그리고 내게 주시는 소명을 깨닫고 그리고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세상의 일과 나는 오벌과는 관계없다. 뭐 세상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아니요. 주님께서는 무사안위를 가장 싫어합니다. 공직사회 복지부동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정권 바뀔 때까지 한번 기다려보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내 시간이 지금 내일이 넌 너의 시간이냐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 이 시간 동안 우리가 안일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힘든 세상으로 여러분 걸어나가시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하며 뛰어들기를 바라고 그리고 일 가운데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면 여러분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드러나지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하면 하나님이 거기 왜 개입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십시오.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에 도전하십시오. 무사한 일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에요. 별일 없도록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무사 태평하도록 해주세요.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평안이라는 게 폭풍치는 한가운데서에 누리는 평안이지 바람이 없는 미풍도 없는 곳에서의 평안이 아니에요. 광풍일지라도 광풍을 바라보지 않고 광풍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자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지.
뭐 바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모든 일이 그냥 평탄하기만을 바란다면 여러분 무덤에 가 있는 게 제일 낫죠 뭐 하러 삽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혜가 필요한 까닭은 그런 광풍을 헤쳐나갈 때 어려움을 헤쳐나갈 때 세상의 방법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진실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때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간절히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일을 풀어주셨다 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세상에 전해지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요새는 유일한 길이에요. 뭐 성경 옆에 끼고 나온다고 뭐 전해지는 게 아니고 말씀대로 살 때 말씀의 능력이 드러날 때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들은 말씀 그냥 좋은 말 들었다 오늘 좋은 말 한마디 들었다 그걸로 끝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단 한마디라도 주님의 말씀이면 정말 지혜로운 말씀을 내가 살기로 결단했다면, 길로 가야지 그 길로 나서야지 일어서야지 허리띠를 동여매야지 주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 아니겠습니까? 그게 말이죠. 33대 진짜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33조 결론입니다. 시작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아멘하십니까?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아무 일 없는 게 평안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평안이라는 것이죠. 세상은 그걸 더 불안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평안입니다. 여러분 가장 평안한 것은 전능하신 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물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물이 너를 침몰지 못할 것이고. 불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런 담대함이 우리한테 생긴다는 것이죠. 그때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말합니다. 재앙이 없는 건 아니에요. 뭐 지금 터지는 게 뭐 어디서 또 터지고 저기도 터지고 여기서도 한국에서도 불이 나고 그러더만요 그러나 재앙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런 평안을 누릴 드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평화를 놓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에 담대함 으로 여러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 세상 속에 마음껏 걸어 다니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기도할 때 여러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여전히 미련하고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십시다. 함께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 주의 사람들로 이 땅이 차고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한번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늘 아침에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영혼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내 말씀을 내 입에 두리라고 약속하셨사오니 내가 입을 열어 말할 때도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게 하시고 내 안에 담대함이 전해질 때도 주님 성령의 기름보심과 거룩하심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한 분의 생애 가운데 동행하는 그래 능력 있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능력이 충만한 그리스도인 참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하루도 편한 날이 없고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지만, 그러나 광풍 속을 지날지라도 주님과 함께해서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해서 평안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일생 동안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고집스러운 사람 미련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주님의 지혜가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곧 주님을 증거하는 놀라운 증인의 삶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모두 남김없이 증언하신 우리 9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신 사랑과 날마다 나를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충만 기하심이 오늘 어리석은 자의 삶이 아니라 진정한 지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성령 충만하고 말씀 충만한 나루 살기로 결단한 이 자리에 고개 속인 모든 믿음 사람들 위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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