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절로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목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2장 1절로 10절까지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너희는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가운데서 우리 육체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긍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이르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9월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절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온 땅에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온 땅에 짙은 어둠이 내려 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다 선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선포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응하게 하시고 다시 한번 이 어둠을 뚫고 분연히 일어나게 하시며 이 두려움을 이기고 생명을 전하는 믿음의 전도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에 종교의 키워드는 선행이에요. 그러나 신앙의 키워드는 구원입니다. 선행이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죠.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죠. 선행은 인간에게 선한 면이 있다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구원은 인간 안에는 선함이 전혀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은 과연 구원이란 무엇이냐 구원공동체로 부름받은 교회란 무엇이냐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정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부름받은 존재가 되었고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냐는 것이죠. 우리는 단지 조금 더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전혀 선한 면이 없기 때문에 아니 우리 안에는 절망이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죽음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 길을 하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이 에베소스 이 장 말씀을 통해서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나 아니 무엇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1절 말씀 다 식습니다. 시작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인간 이해를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인간 이해를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았다고 하나 죽었던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출발점은 여기예요. 우리는 다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은 죽었던 존재라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죽었어요. 다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는데 그러면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소통이 안 되는 거를 말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슨 사건입니까?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은 내가 정령 죽으리라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뭐 뱀이 안 죽는다고 속삭였죠 하와가 먹었죠. 죽었습니까? 아담에게 먹였어요.
죽었습니까? 멀쩡히 살았어요. 1000년 가까이 살았어요. 자사 아주 손손 낳았어요. 그런데 왜 죽었다는 거예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게 죽음이란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단절되는 사건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점 에덴의 동쪽으로 가면서 죽음의 정상들을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들은 살았다고 하나 죽음의 길을 걷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죠.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악한 존재가 하는 일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끊어놓는 거란 말이에요. 관계를 단절시키는 거란 말이에요.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거란 말이에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한 몸이 되었던 부부가 깨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가인과 아벨이 형제지만은 둘이 하나 될 수 없고 그걸 사이를 이관시켜서 살인하게 만드는 관계란 말이에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한테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단절 이간 살인 이런 수많은 죽음의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사도마울은 가차 없이 선언합니다. 너희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 이 말이에요. 죽었기 때문에 생명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살아나는 사건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도 부활 사건이 경험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렸단 말이에요. 여러분 죽은 사람 살리는 게 뭐가 종교예요. 여러분 우리가 뭐 응급실에 가서 숨이 늦어지면 심폐소생술 하죠. 그래서 죽은 사람 살려놓습니다. 그게 종교적 행위입니까? 사람 살리는 게 뭐 아프리카에 무슨 뭐 부두교나 그런 이상한 토속 신앙에서는 그런 걸 종교적 주술적 행위로 얘기하겠 이해하겠지만, 여러분 죽은 사람 살리는 건 종교적 행위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심폐소생술 소생술을 해서 여러 사람 살려놓고 나면 사람은 교주가 됩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나 사람이 교주가 될 수 없는 까닭은 살려놨더니, 또 죽을 거란 말이에요. 의사가 아무리 심폐소생술을 하건 암환자 중환자를 살려놓건 그들은 또 죽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건 종교적 행위가 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러나 죽은 사람을 영원히 살려놓았다. 이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죽은 사람이 영원히 살게 되었다. 이게 복음이란 말이에요. 이게 구원의 소식이란 말이에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 영원히 살아났다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데 무슨 거대한 체제가 필요하고 거대한 제도가 필요합니까? 아니 이 사람 죽었다가 살았다는데 이렇게 해서 살아났다는데 그걸 전하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뭐가 그렇게 이렇게 야단스러워요 아니 죽었다 살아났다는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얘기예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걸 말씀해 주실 것이죠.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놓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실 것 아닙니까 요한복음 모장 24절 잘 아는 말씀 다시 읽습니다. 시작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일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노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건 이게 구원사건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일생의 가장 큰 사건이 뭐예요?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사건 그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요. 그보다 더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왜 죽었는지를 지금 얘기한 거라고 죄와 허물러 죽었다고 말합니다.
허물이란 어디로부터 떨어지는 상태를 말해요. 죄란 바른 방향이 아니라 빗나간 방향을 말해요. 왜 죽었냐 왜 죽었냐를 설명하는 게 죄와 허물인데 그건 위에서 떨어져서 죽었고 잘못 길을 들어 죽은 거예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말은 있어야 할 자리 잊지 않고 툭 떨어져 죽은 거예요. 가야 할 길 가지 않고 엉뚱한 길 가다 죽은 거예요. 왜 그렇게 하다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졌기 때문에 아니 제 발로 하나님을 떠나더니, 그런 사건을 경험하더니, 그래서 결국은 죽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우리가 죽음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이 모르면 이게 뭐 믿을 이유가 없죠 구원이 필요가 없는데 죽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 이해가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자 부부와 함께 잘 살아요. 잘 살다가 둘이서 왜 다툴니까 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여자가 불륜을 저질러서 그러면 한 집에 살지마는 각 방을 쓸 거 아니에요. 둘이서 다투고 얘기가 될 겁니까? 입을 닫아버리겠죠. 그래서 멀쩡히 잘 살던 부부가 하나가 되어서 잘 살던 부부가 그런 사건 죄라고 하는 것들이 경험되니까. 분리되고 나누어지고 그리고 끝내 깨져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 집에 있어도 우리가 같이 살아도 같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같이 사는데 같이 사는 게 아니에요. 애들도 그렇죠. 어느 순간 부모 말을 들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제가 슬그물이 들어와서 아이한테 속삭이기 시작을 하면은 부모와 자녀가 분리되어요. 부모 말을 안 듣습니다. 나중에는 화를 내고 할 때는 눈빛이 달라져요 어조와 어투도 달라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이미 아이는 부모와 분리되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부모와 자식이 한 집에 살아도 한 집에 사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부모와 자식이 호적의 부모 자식으로 등록이 돼 있는데도 이미 부모와 자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다 뭐가 들어오면은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걸 한 단어로 지금 죄와 허물 사실은 같은 뜻이에요. 자 그러면 그렇게 죄와 죽어서 우리가 죽었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걸 죽었다고 말하자 말이에요. 살기는 사는데 죽어서 사는 삶이 있단 말이에요. 어떻게 사는 거냐 그게 이 절 말씀이에요.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때 너희는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너희는 가운데서 행했다고 해요.
허물과 죄 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 살아가는 건 허물과 죄 가운데 사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따를 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간다고 하지만은 내 마음대로 가는 곳은 없어요. 뭔가를 따라가고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누군가를 엉뚱한 데를 따라가는 거예요. 그게 뭘 따라간다고 세상 풍조를 따라간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떠나면은 세상 풍조를 따르게 돼 있어요. 세상 풍조란 뭡니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모든 사람들이 결정하는 대로 결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판단하는 대로 판단하는 게 세상 풍조 세상이 인생관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세계관을 따라가는 이 삶을 내 마음대로 산다고 착곡할 뿐이란 말이에요.
뭘 내 맘대로 살아 뭘 알아야 내 마음대로 살지 세상이 내게 가르쳐 주는 건 세상이 내게 심어준 것 세상을 기껏 따라가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내 마음대로 살고 싶대요 뭘 내 맘대로 살아요. 세상 풍조를 따를 뿐인데 근데 사도바울은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공중의 권세자를 따분 거라는 따르는 거라고 말해줍니다. 너희들이 세상 풍조를 따라간다고 따라가지만 사실은 세상 풍조를 지배하는 세상 풍조를 만들어가는 그런 거대한 세력의 배후가 누구라고요. 공중권세 잡은 자라는 거예요. 저는 이게 갈수록 이 말이 재미있어요. 공중권세 잡은 것 미디어를 장악한 자나 마찬가지죠 공중무세 안 보이는 권세를 잡았대. 이 모든 SNS를 비롯한 이 미디어를 장악하는 거예요. 여기 모든 인간들이 지금 묶여 가지고 헤어날 길이 없어요. 다 이거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애들이 지금 직업에 무슨 뭐 꿈이 이거 되는 거 이거 공중 권세 잡는 거예요. 크 하루 종일 뭐 들여다보고 앉아서 공중 권세 잡은 자에 그냥 꼭두각시가 되고 있는 것이죠. 근데 이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사도 바울은 또 한마디 표현으로 우리가 알려줬던 그게 뭐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떠나버린 아들들을 불순종으로 이끌어가는 영적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공중 권세자본 자요 그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아들들을 쥐락펴락하는 영적 존재 곧 사탄이란 말이에요. 사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호소자 참소자예요. 그저 다니면서 누구 험당하지 않으면 못 살아요. 누군가를 비난해야 돼. 누군가를 욕을 해야 돼. 좋은 얘기를 못 해요.
입만 열면 누구 나쁜 얘기를 해요. 그게 고소자의 참소자요 그게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역사는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나는 이후로는 내 입은 그저 남을 힘들게 하는 입이요. 남을 상처 내는 입이요. 남에게 낙심 시키는 임이요. 남을 절망시키는 입이 입 노릇을 할 뿐이란 말이에요. 그게 지금 무슨 증거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탄을 따라가고 있는 증거란 말이에요. 슬프게도 그렇게 그래서 지금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를 해줍니다. 상태를 갖다가 요한복음 15장 19절 이렇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15장 19절 보면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 5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면은 인제 이렇게 뭐 공중고세 자부자를 따라가고 하면은 문제가 없어요. 근데 이걸 안 따라가겠다고 하면, 이들과 다른 삶을 살겠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단 말이에요. 안타깝죠 그래서 오늘 보면은 지금 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는 영을 따라다니면서 사는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게 3절이에요. 그럼 어떻게 우리는 도대체 살고 있을까요?
불순종 하면서 사는 모습 3절 3절 시작 전에는 우리도 다 가운데서 우리 육체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우리가 전에 사는 것 그러니까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에요. 그때는 다 우리가 사는 게 육체 욕심을 따라 산다는 거예요. 우리가 뭐 교양 있는 듯이 살고 뭐 점잖은 듯이 행동하고 뭘 하지만은 결국은 이거 다 한꺼풀 베껴보면 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거예요. 그 이걸 갖다가 사도 요한이 정확하게 우리가 한마디로 이걸 정리를 해준 게 요한에서 2장 16절 말씀이에요. 육체 욕심을 따라서 하는 게 뭐냐 2장 16절이 시작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언 것이 아니 5세상으로부터 헌 것이라 이 육체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게 그저 육신의 정욕을 채우는 것이고. 안목 보기에 좋은 정욕을 채우는 것이요. 그저 내 자랑거리 만드는 것 이게 육체 욕심을 따라 사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뭐 자랑할 거리 없나 자랑할 거리 없나 자랑할 거리에 그냥 목이 말라 있어요. 뭘 좀 자랑해야 될 텐데 그래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 찾아서 일평생 또한 살아가는 이 모습을 한마디로 사도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것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란 마음이 원하는 것이란 쉽게 말하면, 생각나는 대로 사는 거예요. 생각나는 대로 그저 자기 생각이 옳다 생각 하나 기준 가지고 모든 게 자기 생각을 따라 사는 거예요.
그 뭐 다 그렇게 사니까 뭐 누구 나무랄 것도 없죠 뭐 그렇게 안 사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이 세상은 육체 정역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란 말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성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보고 듣고 배우고 학습하고 그래서 그대로 살아가는 곳을 이 세상 악한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어디 뭐 학교 가서 뭐 공부를 하네 뭘 배워내 뭘 하네, 뭐 다 하는 게 이 육체의 정욕과 이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 뭐 대단한 게 있는 곳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라는 게 근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냐 이거예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더니, 이렇게 육체를 따라 살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수준대로만 살아가는 이런 존재가 되고 말았냐 이거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원래 하나님과 관계 맺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잔혁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가 하나님을 떠나더니, 죄와 허물로 죽더니, 기어이 따라간 곳이 사탄을 따라가더니, 그렇게 했으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본질상이나 지금의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지금 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꼬락서니가 기껏해봐야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왜 진노의 자녀라고 해요. 여러분 이 사탄이라는 존재도 하나님을 떠난 존재예요.
자기를 찬양하다가 뭐 루시퍼 같은 게 경우는 떨어진 존재 아니에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존재란 말이에요. 추락하고 타락한 존재죠 그러면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존재에 가장 큰 마음의 상태가 분노예요. 분노 늘 분노에 차 있어요. 그래요. 그는 진노의 자녀들을 입양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자신이 분노에 차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다 데리고 와 가지고 분노 학습을 시키는 거예요. 사람들을 늘 분노케 해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든단 말이에요. 사람을 다독이고 사람을 가라앉히고 사람을 무의로하고 사람에게 평안을 갖다주는 게 아니라, 그저 다니면서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어요.
한마디로 사람을 어떻게 분노하게 할 거냐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분노하게 할 거냐 이게 다 사탈이 하는 일들이에요. 다 진노의 자녀로 만들어 놓는다는 진노의 자녀 평강은 사라지고 내 마음 가운데 불붙는 진노 분노가 타오를 뿐이에요. 사람들 마음에 건드리면, 다 폭발 직전이란 말이에요. 그러다가 뭐 폭발하면 남을 죽이든 자기를 죽이든 하지 않습니까? 폭발 사건이에요. 진노의 폭발 사건 에너지가 나를 향하면 내가 나를 자살할 것이고. 남을 향하면 나를 살인하는 것이오 그렇게 되는 것 아니에요. 이게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실상이란 말이에요.
허물과 죄로 죽은 채 죽은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의 실상 이걸 알아야 왜 이 세상에 구원이 없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지 왜 이 세상은 구원에만 오직 소망이 있는지를 우리가 알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오늘 4절 5절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작 긍연히 풍수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는 은혜로 권을 받은 것이라 우리는 그냥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곧 마귀의 자식들이 되고, 만 거예요. 다 뭐 나이스하게 뭐 얼굴 꾸미고 살아가니까 그렇지 이게 여러분 얼굴 한꺼풀 벗기면 다 마귀 얼굴이란 말이에요.
퍼 우아하게 뭐 미소를 짓고 지내도 속을 열어보고 속뚜껑을 열어보면 안에는 그냥 뭐 시커먼 뱀이 우글우글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 본 사람이라면은 사도 바울의 이 표현에 대해서 적어도 우리가 동감하지 그렇게 뭐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을 거예요. 여러분 하루 종일 좀 어디 좀 조용한 데 가서 나 자신을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나라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정말 끔찍한 존재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 참 뭐 정말 얘기해 주신 것이죠. 진실로 뭐라고 해주셨냐면은요, 그쵸. 이제 뭐 마귀 아버 너희들 마귀알이다. 이거죠. 마귀압이다.
이런 거 너희들이 바로 이 마귀의 자식들이다.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게 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갖다가 하나님께서 정말 왜 살리셨냐를 우리에게 지금 또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근데 오늘 우리가 이 4절을 읽을 때 조금 이렇게 주목해야 될 부분 뭐냐 하면은 요기 원어 성경을 보면은 그러나가 하나 들어가 있어요. 그 우리가 지금 일 이 3절까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쭉 얘기를 했는데 4절부터 우리는 이런 존재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 이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런 상태로 죽어 있었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 그래서 이 앞에 4절 앞에 헬라 그르는 대라고 하는 이 접속사 예 접속 전치사가 들어가 있어요. 접속사가 그러면 이 그러나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인간은 이런 모습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은 이렇게 죽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래서 누구는 그래요. 이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은 이라는 이 두 단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의 하나다 이런 말씀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이렇게 소망이 없는데 하나님조차 소망이 없으면 구원이 안 되잖아요.
인간은 이렇게 절망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렇게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크기 때문에 인간한테는 도대체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긍일한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셨다 이게 좋은 소식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왜 살리셨냐 무엇 때문에 살리셨냐 이걸 오늘 두 단어죠 긍열이 풍성하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셨어요.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살리셨어요. 하나님께서는 긍율이 풍성하시다 히브리아에서 말하는 헤세드와 같은 뜻이죠.
인자 자비 자애 배려 뭐 사랑 이 모든 게 뭉뚱거려져 있는 이 긍렬함 이게 하나님께 성품에 있으시기 때문에 이 긍렬함 때문에 우리를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그리고 또 큰 사랑 어떤 사랑이죠. 이걸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랑은 경험되어야 하고 위로부터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독특한 단어로 표현한 게 아가페 사랑이란 말이에요. 이건 인간의 조건과 관계없이 사랑하기로 결정한 의지 자체를 말하는 거란 말이에요. 나는 당신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사랑할 거야. 당신의 어떤 보상과 어떤 뭐 희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끝까지 사랑할 거야.
하는 이 큰 사랑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랑 이 아가페 사랑 때문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6절 한번 같이 읽을까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자 구원을 세단어로 말해 보였어요. 살리다 일으키다 앉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다 일으키다 그리고 또 앉히다 살렸다 그다음에 일으켰다 하늘에 앉혔다 이게 구원 전체를 말하는 거예요.
이건 묘하게도 구원의 삶 시제와도 관련이 있고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핵심 개념인 칭의 어렵다 하심 성화 거룩하게 하심 영화 영광스럽게 하심 이 단어들이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권이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돼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살아남은 어떻게 돼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돼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돼요. 관계 복원 관계 회복 이게 사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의롭 하심을 입게 돼요. 이제 비로소 우리는 의로운 관계로 들어가요 하나님과 의롭다고 하는 관계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렇게 세우신 것은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또 죄를 지어 또 잘못을 해요. 그래도 주저앉아 있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이렇게 세운단 말이에요.
일어나라 넌 일어나라 그렇게 주저앉아 있지 말고 낙심하고 있지 말고 일어나라 이렇게 세우시는 분이에요. 9월에는 이 개념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그다음에 우리는 이 땅의 삶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앉히신단 말이에요. 하늘의 거처를 마련해 두시고 우리를 그곳에 앉히는 건 이게 글로리 파이 되는 글로리PK션 영광스럽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9월이 완성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살리시다 일으키시다 안치시다는 것은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와도 같은 것이고. 칭히 의롭게 되었으면서 날마다 우리가 거룩하게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고. 또한 어느 날 우리는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이게 구원에 들어있는 관념이에요. 개념이에요. 근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다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다 9월은 어느 순간도 개인적으로 우리 혼자서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혼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앉을 수 있는 것 그게 구원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뭘 자랑할 게 있어요.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는데 그래서 저기 숯불전 목사님은 그런 표현을 써요 구원을 내 힘으로 내 선행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종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려 가는 것과 같다 그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자기 힘으로 뭐 고뇌 이만큼도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에요. 아마 한강 정도에 우리가 수영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있죠. 현해탄도 한번 건너가 보겠다고 시도하는 사람이 있죠. 그러나 누가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나 난빙양을 헤엄쳐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군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란 말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라도 어떤 선행을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업적과 우리의 선행으로는 구원의 트럭만큼도 다가갈 수 있는 일이 없다. 오직 구원은 은혜로 인한 것이다. 구원은 은혜로 인한 것이다. 어떻게 구원받으셨다고 무엇으로 구원받습니까? 믿음으로요 아니요. 정확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분의 긍렬하심 그분의 풍성하신 긍률하심과 그분의 큰 사랑이라고 하는 은혜로 우리는 9월을 받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고 일으키고 앉히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선행 인간의 믿음만 가지고도 되는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 아무리 믿음 가지더라도 이 전기선 다 끊어지면 여러분들이 벽에 가서 기도 아무리 하고 불아 들어올지어다 불이여 들어올지어다 안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여러분 불은 발전소에서 전기가 생산되어야 되고, 이게 고압선을 타고 와야 되고 변전소에서 전기가 감압되어야 하고 가정집으로 들어와서 전기와 전설이 연결돼야 되고 전기선이 마지막까지 저기 벽에 있는 스위치까지 연결되어 있어야 전기가 들어오는 거지 우리가 스위치만 올린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믿음이란 고작 스위치용은 올리는 거란 말이에요.
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올 것이다. 하는 게 믿음 정도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어린아이가 하 그냥 자기가 이걸 켜고 나서 불이 들어왔다고 좋아해서 내가 불을 켰다고 할 때는 칭찬해 줄 수 있어요. 어리니까 모르니까 그러나 멀쩡한 어른이 불을 켜놓고 내가 불을 켰어요라고 웃으면 정신 나간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 설교하는 전화와 찬양하는 여러분들이나 우리가 잘나서 하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목젓 하나만 건드리면, 소리 안 나와요. 뇌신경 하나 터지면 피아노 건반 못 쳐요 뭘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말이야. 내가 했다. 내가 했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지만 소리 좋아요. 설교 잘하네 그런 소리 듣고 우쭐거릴 수 있지만 적어도 철이 들고 어른이 되면 그런 소리 들을수록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단 말이에요.
뭘 한 게 있는데, 그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그래서 구호라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7절 말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시작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왜 그렇게 우리 같은 이런 그냥 내버려 두면 죽고 말 인간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해 세도록 구원을 하시냐는 말이에요. 그건 하나님께서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를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여러 세대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교회로 부르신 까닭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지 얼마나 은혜로 오신 분인지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가하기 위해서 우리를 값 없이 그냥 건져주신 거예요. 사망해서 생명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렇게 사망해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의 모임을 공 교회라고 그랬어요. 그러면 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다음 세대에도 이걸 전하기 위해서 그래서 교회란 공동체성과 다음 세대를 위한 비전을 잃어서는 교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신지를 다음 세대 또 다음 세대에 그다음 세대에 계속 전하기 위해서 교회를 허락하셨는데 교회가 이 세대조차도 자기 소명과 부르심의 4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자 오늘 그래서 8절에서 재차 구원에 대해서 정의하고 강조하는 것을 듣습니다. 8절입니다. 시작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대로예요. 하나님께서 이걸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럼 선물을 받는 태도는 어때야 됩니까? 그냥 감사로 받으면 돼요. 끌러보고 이거 아니네요. 내가 원하는 거 아닙니다. 하고 반품할 일이 아니라 믿음이란 나한테 꼭 필요한 것을 주셨겠거니 하고 그냥 끌러보지 않고 받는 태도를 믿음이라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은 우리의 받는 입장에서는 그냥 두 손을 펴서 감사함으로 받는 걸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그렇죠. 은혜에 구원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헤이 참 선물 좋아하시는 분들은 선물 받는 선물은 주는 사람한테 달려 있지 받는 사람한테 달려 있지 않나 그러니까 받는 사람은 하나도 추정할 게 없어요. 자격도 없어요. 뭘 달라고 주장할 게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개념과 하나님의 선물을 잘 받는 사람은 기도도 뭐 주시옵소서로 기도하지 않아요. 그렇게 매일 주시옵소서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말없이 앉아서 감사만 감사가 흘러넘치는데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기에도 바쁜데 뭘 더 달라고 할 게 뭐 별로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뭐 사도마우리 아유 만세전부터 창세전부터 저를 택하시고 아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리를 구속하시고 그런 성령까지 보내주셔서 우리를 인치셨는데 뭘 더 달라고 하겠습니까?
선물을 이미 넘치게 해 주셨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자 9절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무도 구원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네 나 구원받았네 하고 나가면서 자랑하고 다닐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 구원받았네 나 구원받았네 하고 골방에 앉아서 울 수는 있지만 통곡하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지만 구원 안 받았다고 사람들한테 타다니면서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 하고 그렇게 자랑삼아 말할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9월의 가장 큰 특징은 뭐냐 하면은 거저받았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너무너무 감사할 뿐이고 죽었다가 살은 것이 내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빚진 자의 마음이 되는 것이고. 빛진 자의 마음은 도저히 누구에게 해코지할 수 있는 생각조차 없어져 버린단 말이에요. 그 뭐 비교해 따지고 뭐 사람은 왜 저걸 줍니까 나는 왜 이만큼밖에 안 줍니까 이런 생각이 든 건 구원을 못 받아서 그래요. 구원이 뭔지를 몰라서 그래요. 왜 사람한테는 5달란트를 주고 이 사람한테 두 달란트를 줍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들어야 구원을 받은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우수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 5장 17절 한번 큰소리로 읽어야 돼.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런 적 무슨 말을 하겠어요. 고린도 우수 5장 17절 어디로 갔어요.
자 한번 크게 읽을게요 그런 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아래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피조물이란 창조여주에서 나온 개념이에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새롭게 빚어졌다는 말 나는 새로 탄생했다. 그래서 거듭났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새로운 피조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창조된 존재란 말이에요. 근데 어떻게 죽었다가 산 사람이 과거와 현재가 같을 수 있습니까? 예 그러나 하나님이 살리신 사람이 허물과 죽으러 죽었던 사람 존재와 어떻게 비슷할 수가 있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않았던 과거와 정반대라야 마땅하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생과 사가 반대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은 사람은 정반대라야 마땅하단 말이에요. 과거에는 내가 이랬는데 지금은 정반대라야 그게 구원이 제대로 임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구원을 얼마나 받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에요. 교회 한번 여러분들이 한번 찬찬히 둘러보십시오. 나 자신부터 한번 더 나 구원 받았나 사람 과연 구원받았나 한번 냉정하게 보시라고요. 이 교회가 너무 우아하게 사람 대접하다가 그런 걸 안 하다가 교회가 이 지경에 이런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차 없습니다. 에누리 없어요. 부자 간원이 찾아왔어요. 나 할 만큼 했습니다. 근데 이 친구 돈도 많고 뭐 자리도 높고 뭐 없는 게 없어 세상이 원하는 걸 다 가지고 있어요.
근데 이 친구가 조금 마음이 좀 캔기는 게 이 영생을 받았나 안 받았나 확실치 않아 그래서 예수님만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확실히 받을까요? 말은 곧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너 가진 거 다 팔고 나를 따라와라 따라왔겠습니까? 안 따라왔죠 왜요 슬픈 기색으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조금 내놓으라 그랬으면 될 텐데 다 내놓으라 그러니까 어떻게 내놔요 어디로 갔겠어요. 여러분 다 안 내도 괜찮소 하는 랍비를 찾아갔을 것이고. 적당히 내고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바리스인들과 만나서 예수님 욕하고 잘 살았을 거예요. 부자 관어는 예수님은 그렇게 비위를 맞추지 않습니다. 오늘 교회가 비위 맞추다가 쫄딱 망한 거 아세요. 성도들 비위 맞춰주다가 여러분들 귀를 간지럽히다가 교회가 이게 홀딱홀랑 망하게 생긴 거 아세요.
예수님은 뭐 같이 합세요. 너 마귀 니 아버지가 마귀구나 이걸 누구한테 얘기해 제4장들이나 뭐 바리스인들한테 한 얘기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설교도 없고 내 위로받았다. 내 마음이 편하다면 잘못 들은 거란 말이에요. 어쩌면 강의를 들었지 명 강의는 들을 수 있겠지만, 설교는 안 들었을 거야. 아마 속이 뒤집혀서 못 들어야 그게 설교를 듣는 거지 자 10절 결론은 이렇게 나옵니다. 시작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진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배하사 우리로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이거 창조하신 거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재창조하시러 오셨단 말이에요. 우리 재창조하시면은 무엇 때문에 그러냐 구원의 목적이 뭐예요? 구원의 목적이 더 잘 먹고 더 잘 살자는 겁니까? 아니에요.
구원의 목적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일이란 말이에요. 선한 존재가 된 것 그 부자 발언이 선한 어떻게 해야 선한 일을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내가 영세을 얻습니까? 선하기는 뭐가 선해 선한 사람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셔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한 분밖에 선한 분이 안 계신 이 세상에서 선한 존재를 창조하시는 일 그게 구원이란 말이에요. 그 사도 베드로는 2장 12절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의 전서 2장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너희들을 구원해서 선하게 선한 행실로 빚어나 놓고 나면 악행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도록 하는 게 구원의 목적이란 말이에요. 한 절만 더 읽죠 디모델전서 6장 18절입니다. 6장 18절 시작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게 선한 사람이 되어가는 증거 증표 라는 말이에요. 이것 때문에 구원받을 까닭은 하나도 없어요.
뭘 많이 나누어주고 선한 사업을 많이 했다고 구원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이렇게 살게 된다는 거란 말이에요. 구원이 먼저 임하면은 이런 삶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이런 얘기예요. 그죠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위해서 애쓸 건 하나도 없지만, 구원받으면은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이게 알게 된다는 거란 말이에요.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이 교회를 보고 구원이 존재한다는 것 차라리 구원은 구원파를 통해서나 뭐 구원 소리를 듣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를 간절히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구원에 무슨 심각한 고장이 나 있는 거란 말이에요. 교회를 보고 구원공동체라는 생각이 안 들면 교회는 심각한 병이 들어있는 거란 말이에요.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망해서 생명으로 라고 하는 이 한 단어를 놓쳐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 구원 사건인 날마다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는 교회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왜 세례가 늘 꺼내지면 안 됩니까? 왜 우리는 늘 세례받는 일들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난 일들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에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죠. 저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어려운 시대 아무리 힘든 시대 내가 죽을 것만 같은 시대라고 하더라도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예수를 증가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린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앉히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게 세상에 아무리 뭐 이렇게 어려워도 우리가 해야 할 딱 한 가지 일이란 말이에요. 교회가 해야 될 한 가지 일이란 말이에요.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순교의 자리에 있을 거예요. 순교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딱 죽는 순교하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외치다가 죽는 거밖에 없어요. 오늘 우리가 이 구원과 구원 공동체인 교회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이 본질을 놓치지 않게 해주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주님 회복하게 해주옵소서 다 모든 불만들이 구원의 기쁨이 사라진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걸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불평이 많고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뭐 저부터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우리가 한번 기도할 때 하나님 구원받은 감격을 놓치지 않게 해주옵소서 구원과는 기쁨을 놓치지 않게 해주옵소서 그래야 이 구원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하시고 이 구원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게 해주옵소서 한번 같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구원받은 것만으로도 속합니다. 구원이 전부입니다.
구원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구원의 증거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이 구원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더 가져서가 아니라 더 올라가서가 아니라 더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어떤 것도 구원과 비교 갈 수 없을 때 주님 우리가 이 구원에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세상이 무엇 때문에 교우 구원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우리가 구원보다도 더 많은 것을 관심을 갖는다면 세상이 무엇 때문에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주님 우리가 구원에 집중하게 해주옵소서 늘 사방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데 집중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선포합니다. 오직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기억합니다.
주님 이 구원이 이 구원을 모르는 세상 끝까지 전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일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다 쏟아붓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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