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론(Interpretation Theory) - 폴 리쾨르
저자소개
1913년 프랑스 동남부 발랑스에서 태어나, 렌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1950-1955년 스트라스 부르 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 소르본 대학, 1966-78년 낭테르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한편 이 기간 중에 시카고 대학 교수를 겸임하기도 했다. 그 후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현상학 및 해석학 연구센터' 소장으로 있었으며, 2005년 5월 20일 생을 마감했다.
제1장 담화로서의 언어
•
담화
A.
언어의 로고스(logos)는 적어도 하나의 명사와 하나의 동사를 필요로 하며, 바로 이들 두 단어의 상호 얽힘이 언어와 사고의 최초 단위를 구성한다(22).
B.
참과 거짓은 담화의 "효과"이고, 담화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기호들, 곧 하나의 명사와 하나의 동사를 필요로 한다(22-23).
•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구조적 모델
A.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랑그로서의 언어와 파롤로서의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에 의존하고 있다. 랑그는 약호(code) 혹은 약호들의 집합이다. 그 기초 위에서 특정한 화자(Speaker)는 특정한 메시지로서 파롤을 생산한다(25).
1.
메시지는 개인적, 약호는 집단적이다(25-26).
①
메시지는 시간의 통시적인 측면을 구성하는 사건의 연속 속에서 시간적인 사건이 된다. 자의적이며, 우연적이다.
②
약호는 동시적인 요소들의 집합, 즉 공시적체계로서 시간 속에 존재한다. 체계적이며, 주어진 언어 공동체에 대해서는 강제적인 것이다.
2.
언어활동(불어: langage)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 측면을 랑그라고 하였고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파롤은 같은 내용의 언어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 발화 행위이며, 이러한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랑그이다(26).
①
우리가 '개별적' 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원칙을 랑그라고 한다(26).
•
의미론 대 기호론: 문장(33)
A.
구별될 뿐만 아니라, 위계적인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기호론의 대상, 즉 기호는 단순히 가상적인 것이다. 오직 문장만이 말하기만큼 실제적인 것이다. 문장은 그 부분들의
2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적인 그 무엇이다. 문장은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문장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자체는 기호가 아니다(34). 기호론과 의미론의 구분이 전체 언어 문제를 탐구하는 열쇠와도 같다(35).
•
사건(Event)과 의미(Meaning)의 변증법
A.
사건으로서의 담화
1.
담화의 의미론이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체계의 단순한 가상성과 반대되는 사건의 실제성에서 담화의 존재론적 선차성을 이끌어 내어 여기에 파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36).
2.
우리는 첫번째 기준(사건으로서의 담화)을 좀더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재정식화해야만 한다(37).
B.
술어(Predication)로서의 담화
1.
문장은 술어를 가진다. 주어는 없을 수 있지만, 술어가 없어서는 안 된다(37).
2.
개별성 확인과 보편 술어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양극성은 명제를 발화 사건의 대상으로 개념화하면서 여기에 특수한 내용을 부여한다. 담화란 것이 파롤과 랑그의 단순한 대립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합리적인 존재로서 단순히 금방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아님을 보여 준다. 담화는 그 자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그런 분석적인 의미에서의 구조는 아니다(38).
C.
사건과 의미의 변증법
1. 담화는 문장 내에서 사건과 의미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구체적 전체에 의존한다(39).
2.
사건으로서의 발화를 변호하는 모든 논의는 그것이 실제화의 관계를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낼 때에만 유의미하다(39).
3.
사건으로서의 특성이 실제화라는 문제 상황에서 더 확장되어 이해라는 또 다른 문제 상황에까지 적용된다면, 동일한 변호가 이번에는 독설(abusive)이 된다(39).
4.
만약 모든 담화가 사건으로서 실제화된다면, 모든 담화는 의미로서 이해된다(40).
D.
발화자의 의미와 발화 의미
1.
담화의 자기 - 지시
①
전자는 화자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의도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확인 기능과 술어 기능의 결합이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41).
②
의미는 노에이스(noesis)적이면서 동시에 노에마(noema, 지향성의 대상적 상관자)적이다(41).
2.
언표 행위와 언표 수행 행위
①
어떤 것을 말하는 것(언표 행위, locutionary act) 외에도, 말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것을 행하며(illocutionary act), 그리고 말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낳는다(언표 효과 행위, perlocutionary act)(43).
3.
대화 행위
①
사건과 명제적 내용의 변증법에 기여하는 또 다른 항목은 대화적 행위(interlocutionary act) 혹은 훈시적 행위(allocutionary act)라 불리는 것인데, 이는 발화 행위의 언표 수행적 측면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44).
3
②
담화의 중요한 측면 하나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담화의 수신인으로서 또 다른 화자가 있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짝을 이루어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된다(44).
A.
언표 행위와 언표 수행 행위는 그것이 무엇인지, 즉 개별성의 확인인지, 보편적인 술어인지, 선언인지, 명령인지, 바람인지, 약속인지를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이며 따라서 사건이다(49).
E.
의미(Meaning): "의미"(Sense)와 "지시"(Reference)
1.
발화 의미는 명제적 내용이라는 점에서 의미의 "객관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발화자의 의미는 문장의 자기-지시, 발화 행위의 언표 수행적 차원, 그리고 청자의 인식 의도라는 세 요소와 관련해서 볼 때 의미의 "주관적인" 측면이다(51).
2.
우리는 담화의 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하며, 담화가 가리키는 그 "무엇에 관해서"를 의미하기도 한다. 담화의 그 "무엇"은 "의미"이며, 담론의 그 "무엇에 관해서"는 "지시"이다. 의미와 지시를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뜻과 의미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글을 쓴 고틀로프 프레게에 의해 근대 철학에 도입되었다(51).
F.
몇 가지 해석학적 함의들
1.
해석학을 심리학화한 개념은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말-사건의 신학을 키워 냈는데, 이 신학에서 특히 사건은 발화 사건이며, 이 발화 사건이 케리그마, 곧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원형적인 사건의 의미는,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통하여 그 의미를 우리들 자신에 적용하게 되는 현재적 사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56).
제2장 말하기와 글쓰기
•
말하기로부터 글쓰기로
A.
담화 이론 속에, 특히 사건과 의미의 변증법 속에 말하기로부터 글쓰기로 이행하는 가능성의 조건이 있음을 밝힐 것이다. 다음에는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지향적 외재화의 문제와 해석학의 핵심인 소격화의 문제를 연결 지을 것이다(60).
1.
말하기로부터 글쓰기로
①
야콥슨은 의사 소통적 담화의 여섯 가지 주요 "요소들"(화자, 청자, 매체 또는 통로, 약호, 상황 또는 컨텍스트, 메시지)을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기능들"(정서적, 욕구적, 교감적, 메타 언어적, 지시적, 시적 기능)과 연결 짓는다(60).
2.
메시지와 매체: 고정시키기
①
말하기로부터 글쓰기로 이행할 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메시지와 그 매체 또는 통로 간의 관계와 연관된다(61).
②
의사 소통 매체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단순한 변화로서 글쓰기의 문제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외재적 담지체(돌, 파피루스, 종이 등) 속에 담화를 고정시키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목소리, 얼굴 표정, 몸짓 대신에 이러한 매개물들을 이용하는 기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굉장한 문화적 성취이다(61).
4
③
담화가 말해졌을 때에는 도망가고 글로 씌어졌을 때에는 고정되는 것은 그것이 오직 담화의 잠재적이고 현재적인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61).
④
글쓰기는 말하기를 대체한다. 즉 담화의 의미와 물질적 매체 사이에 일종의 지름길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 그대로의 문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담화의 운명은 이제 목소리에서 글자로 옮겨진다(64).
3.
메시지와 화자
①
첫번째로 변경되어야 할 것은 메시지와 화자의 연관이다. 이 변화는 사실 대화적 상황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대칭적인 두 가지 변화 중 하나이다. 의사 소통 사슬의 한쪽 끝에는 메시지와 화자의 관계가 있고 다른 한 쪽 끝에는 메시지와 청자의 관계가 있는데, 이 두 관계의 극은 모두 말로 맺어지는 직접적인 관계가 글쓰기와 읽기라는 좀더 복잡한 관계로 대체될 때(이는 담화가 글로 직접 기록된 결과이다) 근본적으로 변화된다(64).
②
텍스트의 의미론적 자율성은 사건과 의미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이 점에서 그 관계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드러낸다(66).
4.
메시지와 청자
①
의사 소통 사슬의 다른 편 끝에서 텍스트의 메시지와 독자가 맺고 있는 관계 역시 텍스트의 메시지와 화자가 맺고 있는 관계 못지 않게 복잡하다. 말해진 담화가 대화적 상황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인 반면, 글로 씌어진 담화는 익명의 독자와 글을 읽을 줄 아는 미래의 잠재적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66-67).
②
텍스트의 청중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텍스트의 의미론적 자율성이다(67).
③ 무한한 독자들에 대해 그리고 해석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은 텍스트의 몫이다(67).
④ 무한한 독서의 기회는 텍스트의 의미론적 자율성에 대한 변증법적 대립물이다(67).
5.
메시지와 약호(간단하고 알기 쉽게 나타내어 만든 부호)
①
텍스트는 기록되고 씌어진 것으로서의 담화이다(70).
②
담화 작품들을 생성하는 특정한 약호들과 글쓰기 사이에 놓여 있는 특유한 친화성이다. 이 친화성은 매우 밀접한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시적 또는 서사적 작품들의 구술적 표현들이 글쓰기에 상응하는 과정들에 의존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70).
6.
메시지와 지시
①
글쓰기 덕분에 인간은, 아니 오직 인간만이, 하나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된다(72).
②
이러한 확장은 구술 담화의 신체적 토대를 물질적 표지들로 대체하는 것이 정신적인 함의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텍스트는 그 지시를 상황적 지시의 한계들로부터 해방시킨다(72).
③
지시의 범위를 확장하는 두 번째 경우는 해석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 두 번째 확장은 글쓰기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담화 양식들의 열려진 또는 명시적인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글쓰기보다는 문학에, 즉 문학의 통로로서의 글쓰기에 더 깊이 연관된다(73).
5
④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넓혀야 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술적인 지시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명시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기술적이지도 않은 지시들, 즉 시어법(poetic diction) 같은 것에 대해서도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74).
⑤
나에게, 세계란 내가 지금까지 읽고, 이해하고, 사랑해 온 모든 텍스트, 기술적인 것이든 시적인 것이든, 그 모든 텍스트가 열어 주는 지시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환경(Umwelt)으로부터 하나의 세계(Welt)를 만들어 내는 모든 의미 작용을 우리의 상황에 대한 술어들 속에 끼워 넣는 것이다(74).
•
글쓰기를 위한 변명
A.
글쓰기에 대한 공격
1.
플라톤은 신화적 형태를 빌려서 글쓰기에 대한 비난을 개진한다(76)
2.
글쓰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도 이에 못지 않게 흥미롭다. 글쓰기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어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76). 글은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한다. 글이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할 뿐 그것이 다가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논쟁이 생기거나 부당하게 결명받게 되었을 때, 글은 여전히 그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글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해낼 수 없다(77).
B.
글쓰기와 도상성1
1.
프랑수아 다고네가 그의 책<글쓰기와 도상학>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같이, 글쓰기의 문제도 도상성(iconocity)에 관한 일반 이론의 한 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79)
2.
인식의 대상이라는 것은 주체의 시선을 기다리는 죽어 있는 사물이 아니며 그것 자체가 일종의 관계 양상이라는 것이다. 가령 신체의 각 기관들의 경우에 이들은 각각의 독자적인 기능들과 일 대 일의 대응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총체적 구성 내에서 그런 기능을 획득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0)
3.
언어의 이러한 일반적 공간화는 인쇄술의 등장과 함께 완성된다. 문화의 시각화는 상호 현존의 근접성 안에 있는 목소리의 힘이 제거됨과 동시에 시작된다. 인쇄된 텍스트는 혼자서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결코 공동체를 끌어모으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관계들, 즉 말 그대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간의 의사 소통은 보이지 않는 대중의 흩어진 구성원들을 연결시켜 준다. (82)
•
기록과 생산적 소격화(Verfremdung)2
1 도상성은 언어의 형식과 내용 간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의미. ‘양적 도상성’은 언어적 재료의 양이 많을수록 언어 개념이 복잡해진다는 의미이며, ‘순서적 도상성’은 언어 구조에 시간적 순서가 우선성의 정도를 드러낸다는 뜻임. ‘거리적 도상성’은 개념적 거리와 언어적 거리가 비례한다는 뜻임.
2 소격화(Verfremdung)는 멀어지게 한다, 낯설게 한다는 의미로 문학 연극 등에서 낯선 표현 또는 낯설게 하는 것, 생소화 하는 것을 의미함.
6
A. 소격화와 전유의 변증법이 출현한다. 여기서 전유란 텍스트를 저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의미론적 자율성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전유한다는 것은 "낯설었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반적인 욕구가 있기에, 소격화라는 일반적 문제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리는 단순히 하나의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예술 작품들이나 담화 작품들의 외양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실제적인 시공간적 간극이다. (83)
B. 소격화는 양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낯설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와 관심 그리고 노력에 대한 역동적인 대응물이다.
제3장 은유와 상징
•
은유 이론
A.
은유 이론
1.
은유는 "축소시킨 한편의 시"(88)
①
은유에서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와 비유적 의미(figurative meaning) 사이의 관계는 문학 작품의 총체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의미 작용들의 복합적인 상호 작용을 하나의 단일한 문장 속에 축약한 것과 유사하다(89).
②
인식적 지위(cognitive status)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논리 실증주의 전통에서는 이런 명시적 의미와 암시적 의미의 구분을 인식적(cognitive) 언어와 정서적(emotive) 언어의 구분으로 취급하였다. 실증주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많은 문학 비평들은 인식적 언어와 정서적 언어의 구분을 외연(denotation)과 내포(connotation)라는 어휘로 바꿔 말했다. 그런 입장에서는 외연만이 인식적인 것이며, 그리하여 의미론적 질서를 지닌 것이 된다(89).
③
은유의 여섯 가지 명제(92)
i.
은유는 일종의 비유로서, 명명과 관련된 담화의 비유
ii.
은유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로부터 일탈함으로써 이름이 갖는 의미를 확장시킨다.
iii. 이런 일탈이 가능한 것은 유사성의 원리 때문이다.
iv. 유사성의 기능은 이전에 문자적 의미가 사용될 수 있었던 바로 그 자리를 단어의 비유적인 의미로 대체하는 것이다.
v.
그러므로 대체된 의미 작용은 어떠한 의미론적 혁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은유를 번역할 수 있다. 즉 비유적인 단어가 대체한 문자적 의미를 다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사실상 대체(substitution)와 회복(restitution)을 더하면 제로가 된다.
vi.
은유가 의미론적 혁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실재에 대해 어떤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은유는 담화가 가진 정서적 기능이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
B.
은유에서 상징으로
1.
이중-의미의 문제를 상징보다는 오히려 은유를 통해서 다루게 되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은유는 오랫동안 수사학자들의 세밀한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둘째, 의미론이 이 연구에서 갱신한 점은 수사학이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 둔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는
7
것인데, 이것은 문제가 되는 현상에 동질적인 언어적 구성물을 제공하는 언어적 요소들에 한정되어 있다(98). 상징에 대한 연구는 두 가지 난점이 있음.
①
상징은 너무나도 많고 다양한 연구 영역에 속해 있다(98).
②
담화의 두 가지 차원,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두 종류의 세계(universe), 즉 언어적 세계와 비 언어적 질서의 세계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징이 이중-의미, 또는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를 함께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2.
상징의 의미론적 계기(Semantic Moment)
①
상징적 의미 작용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문자적 의미 작용과 상징적 의미 작용이라는 두 가지 의미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단일한 운동, 즉 그를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이동시키고 또 문자적 의미 작용을 사용하거나 이를 통해서 그를 이차적인 의미 작용에 동화시키는 단일한 운동이 있을 뿐이다(102)
②
상징적 의미 작용은 그렇게 구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일차적인 의미 작용을 거쳐야만 이차적인 의미 작용을 획득할 수 있다. 이때 일차적인 의미 작용은 의미의 과잉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102).
③
이런 특징은 상징과 알레고리의 차이를 잘 보여 준다. 알레고리는 일단 그 역할이 끝난 다음에는 삭제할 수 있는 수사학적 절차에 불과하다. 사다리를 오른 다음에는 그 사다리를 내려 버릴 수 있는 법이다. 알레고리는 교훈적인 절차일 뿐이다. 그것은 배움을 쉽게 해 준다. 그러나 직접 개념적으로 접근할 때에는 무시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상징적 지식은 직접적으로 개념을 포착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거나, 또는 개념을 향해 방향 잡는 것이 일차적 의미 작용이 낳는 이차적 의미 작용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질 때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102).
④
상징은 닮은 것을 이해하기보다는 동화시킨다. 더욱이 상징은 어떤 사물을 다른 것에 동화시킴으로써, 그러한 동화에 의해 의미 부여된 것에 우리 자신을 동화시킨다. 바로 이것이 상징 이론을 그렇게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기만적인 것으로 만든다(102).
3.
상징의 비의미론적 계기(Non-Semantic Moment)
①
상징은 의미 작용과 해석의 관점에서 언어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을 허용한다(104).
②
상징의 특성들은 은유에서 이와 대응하는 특성들과 겹쳐진다는, 두 가지 상징의 특성을 의미론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한다면, 이제 상징의 비-의미론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104).
③
정신 분석학에서는 상징적 활동이 욕망(desire)과 문화의 경계선과 연결된 경계선 현상(boundary phenomenon)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 자체는 충동(impulse)과 충동의 위임을 받은 정서적인 표상 사이의 경계선이라는 것만 말하고 있다. 상징은 원초적 억압(primary repression)과 이차적 억압(secondary repression) 사이의 경계선이다(105-106).
i.
원초적 억압이란 억압해야 할 우리의 충동을 최초로 발생시키는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억압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차적인 억압이다. 이때 이차적인 억압이란 사후(after the fact)에 발생하는 것으로, 단지 파생물(derivative offshoots), 막연한 대체의 기호, 또는 기호의 기호(signes of signes) 등을 나타나게 한다 (106).
8
ii.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상의 간략한 논의로 우리는 왜 상징이 은유로 넘어갈 수 없는지 그 한 이유를 알게 된다(106). iii. 은유는 이미 정화된 로고스의 세계에서 발생한다. 반면 상징은 삶의 세계(bioss)와 이성의 세계(logos)를 갈라놓고 있는 분리선에서 망설이고 있다. 상징은 "담화"가 원초적으로 "삶" 속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상징은 힘(force)과 형태(form)가 일치하는 곳에서 태어난다(107).
④
시는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시도 세계에 묶여 있으며, 그것도 정확히 말한다면 해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묶여 있다(108).
⑤
상징의 이러한 속박된 특성이 상징과 은유 사이의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은유는 담화의 자유로운 발명품인 반면, 상징은 우주에 묶여 있다(111-112)
⑥
담화를 성스러움의 우주에 묶어 두는 것은 이러한 일치의 논리이다. 또는 일치의 논리 자체가 항상 담화를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112).
⑦
상징 체계는 그 구조가 해석될 수 있을 때 작동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상징 체계가 기능하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해석학이 요청된다. (중략) 어떤 상징 체계에 대한 해석은, 만일 대상이 되는 성현 속에 존재하는 외양과 의미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이 그 해석 작업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면, 아예 시작될 수도 없다(113).
C.
상징과 은유의 중간(Intermediate) 단계들
1. 결론적으로 나는 은유와 상징의 관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상반되는 명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보자면, 상징보다 은유에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에는 은유보다 상징에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121).
2.
상징보다 은유에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는 말은 은유가 상징의 암시적 의미론을 언어화한다는 뜻에서 그러하다. 상징에서 혼동된 채 남아 있는 것, 즉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의 동화, 우리와 사물의 동화, 결국 요소들간의 끝없는 일치 등은 은유적인 발화의 긴장 속에서 명료화된다(121).
3. 은유보다 상징에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은유는 단지 언어적인 절차이며, 저 기괴한 형태의 술어일 뿐이다. 그 속에 상징의 힘이 퇴적된다. 상징은 그 의미론적 측면이 비-의미론적 측면과 다시 관련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차원적인 현상이다. 상징은 은유가 속박되지 않는 방식으로 속박되어 있다. 상징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상징은 우리를 힘에 대한 흐릿한 경험 속에 던져 넣는다. 은유는 단지 상징의 언어적인 외피일 뿐이다. 그리고 은유가 인간 경험의 심연에서 의미론적 표면과 전-의미론적 표면을 관련시키는 힘은 바로 상징의 이차원적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다(121).
제4장 설명과 이해
•
독자가 텍스트와 마주쳤을 때 갖게 되는 태도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앞의 장들에서 강조점은 화자, 저자, 또는 청중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제기된 물음은 이런 것들이었다. 누군가가 말을 할 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을 쓸 때 의미하는 것은?(123)
•
낭만주의적 해석학을 넘어서
A. 글을 읽는 행위는 글을 쓰는 행위와 쌍을 이룬다(123).
9
1.
저자의 담화로서 텍스트가 갖는 내적 구조와 독자의 담화로서 해석이 진행되는 과정 사이에 지나치게 기계적인 상응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잠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이해와 읽기가 맺는 관계는 담화 사건과 담화 발화가 맺는 관계와 같으며, 또 설명과 읽기가 맺는 관계는 언어적인 텍스트의 자율성과 담화의 객관적 의미가 맺는 관계와 같다고, 따라서 읽기의 변증법적 구조는 담화의 변증법적 구조에 상응한다(123).
B.
대화의 의사 소통 과정에서 어렴풋이 지각되는 설명과 해석 간의 이 잠재적이고 맹아적인 양극성은 낭만주의적 해석학에서는 명백히 대립되는 이중성이 된다(125).
1.
설명이 가장 잘 적용되는 분야는 자연 과학이다. 관찰할 외적 사실들이 있고, 경험적으로 확증해야 할 가정들, 그 사실들을 망라하는 일반법칙들, 산만하게 흩어진 법칙들을 하나의 체계적인 전체로 묶어 내는 이론들이 있을 때, 그리고 가정적-귀납적 절차들을 포괄하는 경험적 일반화들이 있을 때, 우리는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다(125).
2.
반면, 이해가 적용되는 본원적인 분야는 인문 과학(독일어로 정신 과학 Geisteswissen schaften)이다. 여기서 과학은 우리 자신의 경험과 비슷한 다른 주체들이나 다른 정신들의 경험과 관계된다. 인문 과학은 얼굴표정, 몸짓, 목소리, 씌어진 기호 등의 표현 형태들이 갖는 유의미성에, 그리고 문서와 기념비 등에 의존한다(125).
C.
낭만주의적 해석학에서 이해와 설명의 이분법은 인식론적이며 동시에 존재론적이다. 낭만주의 해석학은 실재를 자연과 정신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누고, 각각에 별도로 적용되는 두 가지 방법론을 대립시킨다(126).
D. 나는 이 변증법을 우선 이해(understanding)에서 설명으로, 그리고 다시 설명에서 이해(comprehension)로 이행해 가는 단계로 나누어 기술 것이다.
1.
첫째 단계의 이해는 텍스트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소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127).
2.
둘째 단계의 이해는 설명적 절차들의 도움을 받아 한층 더 정교해진 이해이다. 처음에 이해는 하나의 추측(guess)일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것은 전유의 개념을 충족시키게 된다(127-128).
•
추측에서 확인으로
A. 추측이라는 개념은 다른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의미를 텍스트의 언어적 의미로서 추론하는 것이 곧 추측하는 것이다(130).
B.
추측에서 설명으로의 이행은 추측의 특정한 대상을 탐구함으로써 확보된다. 방금 전에 우리는 우리의 첫번째 물음, 곧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추측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했다(131).
1. 첫째, 텍스트가 갖는 언어적 의미를 추론한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추론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씌어진 것으로서의 담화보다는 작품으로서의 담화를 분석하는 데 더 의존한다(131). 텍스트의 건축물을 재구성하는 것은, 부분들을 인식하는 것에는 일정한 종류의 전체에 대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순환적 과정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다시 거꾸로, 우리가 전체를 추론하는 것은 그 세부들을 추론함을 통해서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지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필연성도,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중요성을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추측이다(132).
2. 둘째, 텍스트를 추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개체로 추론하는 것이다. 2장에서 보았뜻이, 하나의 작품이 속생적인(generic)-그리고 발생학적인(genetic)-규칙들에 따라
10
만들어진다면
, 그것은 또한 단일한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132).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지각된 대상을 재구성하는 것과 비슷한 관점적 측면을 갖는다. 동일한 문장을 텍스트의 초석이라 여겨지는 다른 문장들과 다양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133).
3. 셋째, 문학 텍스트는 잠재적인 의미의 지평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평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제화 될 수 있다(133). 일반적인 해석학 이론은 글쓰기와 작문을 포함하는 담화의 모든 문제를 망라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은유나 상징적 표현에 관한 이론들은, 일반적 의미의 문제에다가 복수적 의미의 문제를 추가함으로써, 여전히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들의 영역을 결정적으로 확장한다고 할 수 있다(134).
•
설명에서 이해(Comprehension)로
A.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다. 그것은 숨겨진 무엇이 아니라, 드러난 무엇이다. 이해되어야 할 것은 담화의 처음 상황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이 텍스트의 비-명시적 지시를 통해 하나의 가능한 세계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해는 저자나 그의 상황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해는 텍스트의 지시에 의해 열리는 세계-명제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다. 의미에서 지시로,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에서 그것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으로(from what it says, to what it talks about) 옮겨 가는 그 움직임을. 이 과정에서 구조적 분석이 수행하는 매개적 역할은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며, 동시에 주관적 접근을 정정해 준다(147-148).
B. 이것이 심층의미론에 의해 태어난 지시이다. 텍스트는 가능한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방향짓는 가능한 방식에 대해 말한다. 이 세계의 차원들은 텍스트에 의해 적절히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문자 언어에서 담화는 구술 언어에서의 명시적 지시에 상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고 보여 주는 기능을 넘어서며,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구술 언어와 연관된 명시적 지시의 기능을 초월한다. 여기서, 보여 주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존재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148).
맺음말
A. 나는 내가 나의 작업 속에 이러한 반-역사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의미의 객관성에 관한 그 주요 전제들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152). 그것은 나의 연구의 주요 개념들과 일치한다. 곧 씌어진 담화가 의미론적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과 문학 작품이 자기-충족적인 존재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말해진 담화 자체가 갖는 의미의 객관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152). 이 반-역사주의는 문학 비평과 성서 비평이 구조주의의 일정한 영향하에 응용하고 잇는 "설명적" 절차들의 암묵적인 전제이다. 이해에서 설명을 거쳐 다시 이해로 나아가는 변증법의 배경하에서, 소격화의 실존적 개념은 인식론적인 위상을 획득한다. 텍스트는 (객관화되고 탈역사화된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는 필수적인 매개이다(152).
B. 전유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해짐으로써 그 의미가 실제화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개념이다. 잠재적으로 하나의 텍스트는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해진다. 실제적으로 그것은 지금 여기서(hic etnunc) 나에게 말해진다. 해석은 읽기가 하나의 사건, 즉
11
지금
이 순간의 담화 사건을 산출할 떄 전유로서 완성된다. 전유로서, 해석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152).
C.
전유는 이제 더 이상 일종의 소유라든가 사물을 움켜 쥐는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이기적이고 나르시즘적인 자아를 버리는 계기를 함축한다. 이 버림의 과정은 설명의 절차들에서 강조된 보편성과 무시간성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 보편성은 모든 명시적 지시와 구별되는 텍스트의 탈은폐적 힘과 연결된다. 오직 텍스트의 명령에 순응하고, 의미의 "화살표"를 따라가면서, 이에 따라 사유하고자 하는 해석만이 새로운 자기-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 새로운 자기-이해에서, 나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형성된 자기(the self)를 그 이해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자아(the ego)에 대립시키고자 한다. 자아에게 자기를 선사해 주는 것은 바로 세계를 탈은폐하는 보편적 힘을 가진 텍스트이다(157).
•
부록1 폴 리쾨르의 생애와 저작
A.
그의 해석학은 딜타이(dilthey), 하이데거(Heidegger), 가다머(Gadamer)의 기획과 비슷한 방향으로 접근한다.
B.
상징은 사유할 수 있게 해 준다.
•
부록2 텍스트란 무엇인가? 설명과 이해
A.
텍스트란 무엇인가
1. 말을 글로 대체함으로써 글을 해방시키는 것은 텍스트를 낳는 행위이다(172).
2.
글은 담화를 보존하며 담화를 개인적이면서 또한 집단적인 기억의 저장고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들을 직선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언어의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표현들을 분석적이고 명확하게 옮겨 낼 수 있으며 따라서 언어의 효과를 증대시킨다는 점도 아울러 추가할 수 있겠다(172-173).
3. 텍스트가 말을 대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외시를 향한 지시의 움직임은 가로막히게 되고, 이와 동시에 대화도 텍스트에 의해 차단당한다. 나는 여기서 억압된다고 하지 않고, 가로막힌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앞으로 내가 절대적 텍스트의 이데올로기라 부르려는 것과 결별하고자 한다(174).
4. 텍스트와 텍스트의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지시하는 세계를 소멸시켜 버리고, 텍스트 또는 문학으로 이루어진 의사-세계(quasi-monde)를 산출한다. (175).
5.
이 세계는 말로 나타내진 세계가 아니라 글로 현재화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상상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상적 세계는 그 자체로 문학의 창조물이며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다(175).
6.
텍스트와 그 세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전복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다른 전복, 즉 저자와 독자의 주관성과 텍스트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전복을 이해하는 열쇠이다(175).
B.
설명인가, 해석인가?
1.
설명과 해석 사이의 엄밀한 보완성과 상호성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177)
2.
딜타이의 작업에서 초초의 대립은 엄밀히 말해서 설명과 해석의 대립이 아니라 설명과 이해의 대립이다. 여기서 해석은 이해의 특수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명과 이해의 대립에서 출발해야 한다(177).
12
3. 딜타이가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것을 들어 보자. "해석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179)
C.
텍스트와 구조적 설명
1. 우리는 텍스트를 첫번째 종류의 읽기로 취급할 수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가리킬 수 있는 세계나 또는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주관성들을 텍스트를 통해 차단해 버리는 행위를 수반한다(181).
2. 사실 언어학이 파롤과 대조되는 랑그를 구성하는 기호들의 단순한 체계에 적용하는 설명적 규칙에 따라 텍스트를 다루는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랑그와 파롤의 구분은 언어학에 일관된 대상을 제공하는 근본적인 구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롤은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에 속하는 반면, 파롤이 수행되는 게임의 규칙으로서 랑그는 언어학에만 속한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언어학은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갖지 않는 단위들의 체계만을 다룬다(182).
D.
새로운 해석 개념을 향하여
1.
이제 텍스트에 관하여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태도를 살펴보자. 우리는 앞에서 이 태도를 해석이라 불렀다(188).
2.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며 작업을 수행하는 바로 이 해석을 전유가 재포착하는 한, 전유는 자신이 갖고 있던 자의성을 버리게 된다 (198).
3.
우리의 탐구를 끝내는 시점에서, 이제 읽기는 텍스트의 운명을 완성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바로 읽기의 한복판에서 설명과 해석은 끝없이 대립하면서 또한 끝없이 화해한다(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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