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오늘 말씀 같이 보겠는데 마감복음 11장 말씀입니다. 1절로 10절까지의 말씀 같이 한 목소리 읽습니다. 시작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남산 뱃바게와 배단 위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기에 따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 적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며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러신 대로 말한되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위에 얹어놓으네 예수께서 탓이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밴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위 그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어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날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아멘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16장으로 된 책 가운데 10장은 예수님께서 이 길을 준비하시는 길이었다면은 이제 11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어린 양으로 재물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소명을 성취하시는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의 전기나 위인전기가 마지막 생애 1주일에 거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할애하겠습니까? 16장 가운데 6장을 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수난의 시간을 기록하는 데 할애했겠어요. 성경은 의도적인 책입니다. 소설도 아니고 단순한 역사서도 아니고 이 성경은 오직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초점을 둔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전체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을 우리가 읽기가 때로는 버겁고 힘들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되는 까닭은 구약 속에 곳곳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 정말 아름다운 영로한 빛깔로 박혀있는 예수님을 발견하고자 함이지요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셔야 했나에 관한 얘기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분이 이 땅에 오실 것인가에 대해서 어떤 모양과 형태로 언제 어느 역사 시간에 예언하셨는지에 대한 기록들을 찾는 놀라운 흥분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예수님 오실 것은 예고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일을 했을 때부터 이 땅에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고 예언하셔서 곳곳에 성경학자들은 한 200여 군데에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그리고 그분의 성취하심에 관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발견해 가는 과정 그런 것들이 사실 구약을 읽어가는 놀라운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올해도 성경 하반기에 두 번째 성경을 읽으면서 이제 신약이 거의 끝나갑니다마는 여러분들 다 읽으시고 나면 휴가 중일지라도 꼭 이 성경통독에 참여하셔서 다시 한번 구약으로 돌아갈 때 오셨던 예수님이 어떻게 오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지 예언은 어떤 모양으로 성취되었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확인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울 예수님께서 보니까,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습니다. 감남산 건너편에 뱃바게와 배단 위에 이르러셨습니다. 이 뱃 바게는 베이트 파게라는 말에 어원이 있어요. 파게는 테나라는 두 단어와 함께 무화가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니까 베이트는 집이니까.
뱃 바게라 라는 것은 무화가의 집이라는 뜻이고 베다니는 베이트 아나니라는 말로 가난한 자들의 이 집이라는 뜻이죠. 어떤 분은 또 베다니를 베이트 테나의 줄임으로 봐서 꽃도 무화과의 집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어쨌건 예루살렘까지 와서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은 이 근처 이곳에서 유숙을 했다고 합니다. 불과 예루살렘에서 한 이 3키로 떨어진 곳이어서 어떻게 보면 오늘날 위성 도시처럼 베드타운처럼 뭐 수원이나 안양처럼 이렇게 서울에 들어가기 위한 도시 그런 거리에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뱃바게와 배단이도 그런 동네예요.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이렇게 올라오신 길이죠.
오늘 이렇게 오셔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투를 불러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한번 이 절 3절 말씀 다시 다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시작 이러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을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십니다. 제자들 둘을 보내시면서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마을에 들어가면은 어린 나귀 새끼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한 마리 매였을 것인데 나귀 새끼를 풀어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인이나 사람들이 왜 그걸 가져가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정말 작은 사건 같지만은 여기에 여러 가지 큰 뜻과 의미가 우리가 가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십니까 왜 어디 나귀새끼 한 마리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용한 점재기라서 그렇습니까? 아니 어떻게 어디를 보고 계시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를 아시길래 마을에 가면 어린 나귀 새끼 아직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다는 것까지 말씀을 하십니까? 이걸 오늘날 정말 우리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은 이걸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마가복음을 따라오면서 이 복음서 전체를 우리가 기억한다면은 예수님께서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이 땅에 모든 것들의 주인이 되시고 모든 것들을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이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의미를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를 향한 걸음이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로 허투루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분이 우리를 다 알고 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 해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분은 참새 한 마리가 우연히 떨어지게 하지 않는 분이고 우리 자신도 내 머리카락 수를 셀 수 없지만, 모르겠습니다. 뭐 대개 다 빠지신 분은 쇠고였는지 앉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도 다 아신다는 거예요. 그래 저는 우리 몸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몸에 누가 있는 모세혈관까지 길이를 합하면 전체 혈관의 길이가 지구 두 바퀴를 돈대요 그 작은 혈관 눈에 보이기도 찾기도 어려운 혈관들이 하나도 엉키지 않고 몸 전체 고루고루 퍼지게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어요. 여러분 누가 어떻게 우리 몸에 있는 길이의 혈관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배치를 하겠습니까? 알지 않는다면 그래요. 이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님 마이 로드라고 고백하는 분이고 그분이 우리가 마이 킹 또 혹은 킹 오브 킹스 앤 로드 오브 롤즈 왕 중의 왕이시고 주의 주님이시라고 우리가 부르는 분이에요. 어디 가서 나귀새끼 한 마리 있는 것도 크고 뭐 아실레나 그리고 나귀를 풀어올 때 누가 어떻게 말할지도 아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응대하면 그분이 그걸 허락하리라는 걸 아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이게 우리에게는 얼마나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얼마나 위로가 되십니까 왜 얼굴이 위로의 표정이 전혀 안 보이고 그렇게 떠악한 표정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건 주님이 우리가 그분을 알아간다는 건 너무나 제한적이에요. 우리가 죽는 날까지 그분을 어떻게 반의반에 반이라도 알겠으며 1000분의 1만 분이라도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나귀를 왜 타느냐는 것이죠.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드러나게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좀 잠잠히 하라 조용히 해라 입 닫아라 숨겨라 감초라고 하셨던 분인데 이제는 나귀를 타고 공공연히 입성을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자 때는 정확히 유월절 6일 전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때가 되었고 자신을 드러낼 때가 되었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밝히 자신을 드러내야 될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를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에요.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지만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오셔서는 인간의 시간을 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시간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분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것도 본인이 공생회를 시작한 지 3년 후에 유월절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어떤 시간입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양을 제물로 드리는 그런 때입니다. 당시 요세쿠스라는 역사학자는 25만 마리 이상의 양이 재물로 들여졌다고 말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시점에 양을 제물로 들여서 2월절을 지키는 기간에 당신 스스로 유월절 재물이 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재물이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죽음이 어린 양의 피를 넘어가는 시간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죽음에서 구원한 사건이죠.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음을 맞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초태생 창자들은 요월절에 어린 양을 인방에 발랐을 때 죽음에 그림자가 그곳을 넘어갔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아니 죄 싹신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그 본질적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이분께서는 오셨다는 것이고.
구원의 사건 해방의 사건을 위해서 지금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시점에 지금 여기에 이르렀고 또 왜 하필 낙이겠습니까? 당시에 왕이 탈 것은 두 가지입니다. 오늘날은 뭐 무슨 뭐 차종이 많지만 그때는 차종이 단순해요. 말 아니면 낙입니다. 그런데 말은 전시에 타던 동물이에요. 그래서 왕이 말을 타고 나타나면 전쟁을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지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나귀를 타면 평시 평화시예요. 평상시입니다. 이때는 나귀를 탔어요. 예수님께서는 전쟁을 치르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를 지금 떠난 길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치렀으면 하는 기대예요. 사실 누구와 전쟁하기를 원합니까?
로마의 지배 계층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이 사람들 쫓아내기를 원하는 그런 기대가 그런 대망이 가슴속에 다들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쟁하러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군사적 투쟁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 땅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전쟁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렇죠. 그분은 평화로 전쟁을 이기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권력을 이기시는 분이에요. 그분은 희생으로 제도를 무너뜨리는 분이십니다. 위탄 가운데 오셔서 나귀를 다신 까닭은 그런 이 평화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신 살람의 왕 그분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정확히는 또 스간에서 9장 9절에 예언된 대로 그분은 이 땅 가운데 나귀를 타고 오시겠다고 예언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겠다는 것이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서갈에서 구장궂은 말씀을 한번 제가 읽어드리면, 그래요. 시온에 따라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에 따라 즐거이 불을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내게 임하시나니 그런 공유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큰 나귀 다는 것도 아니고 낙이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리아스의 이 예언은 정확히 예수님 오시기 520년 전의 예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서 한 생애를 통해 그래서 500년 전 1000년 전 아니 1500년 전 아니 훨씬 이전부터 예언되었고 예언이 성취된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나 인간의 계산으로나 인간의 예측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에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520년 전에 예언된 이 예언대로 그분은 나귀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데려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되었어요. 나귀를 가지고 왔어요. 근데 예수님께서 저는 오늘 이 말씀 가운데 이 보니까, 이렇게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비리로 보내준다는 거예요.
즉시 곧 바로 순종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이 나귀 사건을 놓고 여러분들이 오늘 깊이 묵상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이 나귀 새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제발 좀 불러가셨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것이 제자리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이 어디에 있어야 제자리입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불러서 쓰시는 자리가 우리 인생의 가장 바른 자리 옳은 자리 제자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여기 여러분들이 한 분 한 분들이 정말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주님께 불러서 쓰시고자 한다는 목적과 소명을 확인하고 그리고 주님 손에 붙들리고 주님 등에 태워 가는 인생 그게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분이 쓰시는 바로 자리 그분과 함께 있는 자리 그게 바른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쓰임받고 소용이 되는 것도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주님 손에 붙들렸을 때 바로 순간 우리 인생은 가장 활짝 꽃 필 것이고. 그리고 그분이 쓰시고 있는 고 상황마다 여러분들은 인생에 지금까지 경험 마지 못한 놀라운 기쁨과 흥분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리고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가 인생의 최고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붙드셔서 여러분들 주님 손에 붙들린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손에 붙들릴 때 여러분 우리 인생은 정말로 요샌말로 대박난 겁니다. 우리가 무슨 쓸 만한 인간입니까? 우리 안에 무슨 선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뭐가 제대로 된 게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쓰실 때 놀랍게도 마치 인생의 퍼즐들이 맞아 들어가듯이 그렇게 지금까지 의미 없던 것들에 의미가 생기고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전혀 우리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통제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나귀처럼 주님께 붙들린 인생이 되기를 바라고 나귀 이 어린 나귀에다가 제자들이 겉옷을 이제 실어서 안장 대신 본인들의 겉옷을 실어주는 것이죠.
그리고 백성들은 나뭇가지를 펴서 종려나뭇가지를 펴서 그분을 환영합니다. 이 환영의 소리는 얼마 후에 곧 비난의 소리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호산나라고 부르짖습니다. 주님께 호산나라는 이 부르짖음은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뜻이지만 이분들의 부르지즘이 어떤 구원을 기대했는지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베풀고자 하는 구원과는 다른 구원이에요. 이 사람들의 구원은 백성들이 호산나라고 부러지며 원하는 갈망하고 대망하는 구원은 정치적 구원이고 군사적 구원이고 경제적 구원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풀고자 한 구원의 본질은 우리를 근본적인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이 기대가 달랐기 때문에 이 간극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변하게 되고 돌변해서 그렇게 호산나 외치지만 어느 순간 그걸 십자가에 못박을 하고 고함시는 군중으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참 사람들의 마음은 조변석기 아닙니까 이번에 뭐 이 또 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민심은 어디 있는 거야. 그래요. 민심은 사실 아침저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안심하십시오.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우리에게 정치적 군사적 해방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더 깊은 문제 존재 근원적인 문제 인간의 뿌리에 닿아 있는 문제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제도와 인간의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본질적인 죄 문제로부터의 해방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것을 이루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기대는 여전히 돈이고 여전히 다른 물질적인 것이고. 여전히 개인의 것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것 주님이 이 땅에서 구원을 베풀고자 하신 구원의 대상과 목적은 분명하게 기억하십시다.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기대가 우리도 어긋나면 어느 날 교회를 떠나겠죠.
교회 다니면 뭐하나 교회에서 내가 얻은 게 뭐 있나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 주시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분명한 약속을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저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인생 복된 인생 그리고 흥분된 인생이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자유를 맛보시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를 맛보다가 나중에 5시에 또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식사 돈을 내는 것들 자유로 하게 되시기를 바라고 그리고 마음껏 드시는 자유를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 한번 우리가 마음을 쏟아놓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이 땅 가운데 주신 진정한 죄로부터의 자유 다시 한번 한번 누리고자 합니다. 죄책감으로부터 죄의식으로부터 자유키하신 놀라운 선물 오늘도 가슴에 가득 안고 이 자리 떠나고자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딘가에 묶여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주인 손에 못 듣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께서는 저희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데리고 오라 내가 쓰겠다. 예 주님 제가 순종하며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주님 그리 하십시다. 제가 순종하는 것 위해 할 수 있는 헌신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아침에 다시 한번 저를 드리고자 하오니 주님 손에 붙들린 인생이 되게 하시고 주님 쓰시겠다고 가져가는 인생이 되게 하시고 주님이 제자리에 돌려놓는 인생이 되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저와 함께하는 놀라운 순간순간마다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사람에게 붙들린 인생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께 붙들린 인생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이 땅 가운데 것들 가운데 대답이 있다고 해답이 있다고 답이 있다고 쫓아가는 그런 헛된 인생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정한 답과 진정한 결론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아침에도 주님 다시 한번 발월을 시작합니다. 8월을 시작합니다.
조 앞에 헌신된 한 달 조 앞에 헌신된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하오니 주님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묶인 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 쓰이는 기쁨 놓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죄 끔찍한 죄 주님 죄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땅 가운데 오셨고 십자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가셨습니다. 주님 걸어가는 걸음 끝에 한 마리 나기 새끼를 부르셨습니다. 주님 그 부른 나귀 새끼 저가 되기를 원하고 저희들 같은 사람 묶여 있을 때 주님 제자들 보내셔서 풀어서 주님 원하시는 곳에서 원할 때 마음껏 써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람 손에 묶여 있는 것보다 주님 손에 묶이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묶이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묶여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들 부르셔서 주님 원하시는 곳에 마음껏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그렇게 주님 쓰시다가 주님 곁에 언젠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주님을 각자의 인생 간섭하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우리를 부르신 우리 9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안하신 사랑과 성령에 충만하게 하심이 이 아침에 사람 손에 묶여 있는 나귀 새끼가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온전히 곧 그렇게 순종했던 나귀처럼 그리고 나귀를 풀어준 주인처럼 우리 인생 주님께 풀어드리기를 원하는 이 자리에 고기 숙인 모든 믿음의 형제들 자매들 위해 그리고 베이식 교회 이 땅의 모든 교회와 모든 선교지 위에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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