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가복음 11장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응답받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가가 전하려는 복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죄를 계속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사망 권세를 꺾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 장이기도 합니다. 근데 이 장의 초반부에서 마가는 두 가지 장면에 집중합니다. 바로 하나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종류나무 가지를 깔면서 그분 앞에서 환호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 두 장면이 과연 어떤 관계가 됐을까요? 이 장면을 마가는 왜 오늘 이렇게 집중해서 보도하고, 있을까요?
과연 이 두 가지 사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읽고 어떻게 어떻게 은혜를 받아야 할까요? 오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같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배박에 와 배단 위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동 둘을 보내시며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누굴까요? 그들은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이겠죠.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명이 더 끼어듭니다. 바로 마지막 절 우리 10장 5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예르시도에 가라 냄비디미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를 따라오는 한 명이 포함됩니다. 바로 이 사람이 바디메오라고 하는 맹인인데요. 예수님이 지금까지는 고쳐주신 사람들 귀신 쫓아내주고 병 고친 사람들을 같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까지는 고쳐줬다는 사실도 비밀리에 하셨는데 이 바디메오는 처음으로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같이 따라오거든요. 이제 예수님이 뭔가를 작정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뭔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겠다. 이제는 공개하겠다라고 하는 뭔가 아주 결의에 찬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11장을 위해서죠 이 배박이와 배단이 예루살렘 바로 인근까지 온 거예요. 그 배박이와 베박이와 베단이의 이름 뜻이 중요한데 베빠게는 익지 않은 무화과들의 집이란 뜻입니다. 익지 않은 무화과, 즉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즉 때를 기다리는 곳이죠. 배박에는 그리고 배다리는 번민하는 자의 집이라는 뜻이 있어요. 번민하는 자의 집, 즉 번민하는 누군가가 와서 쉬어가는 집이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오셨을 때 유숙했던 집이 바로 이 집입니다.
여기 나사로 예수님과 마음을 나눴던 나사로의 집이 있는데, 나사로의 여동생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죠 그래서 마리아가 향유를 옥화브를 깨서 붓는 장면도 여기 배단에 나타나는데 묻는 병자 심원도 바로 여기 살았고요. 그래서 번민하는 자의 집 이름 그대로 예수님은 정말 번민하는 자로서 예루살렘이 오셨죠 과연 내가 이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맞는가 땀이 피 뻥을 되도록 기도하시던 장면에서 갯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번민을 드러내시잖아요. 그래서 아직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이 배박에는 익지 않은 무화가들의 집 아직 때가 아니었는데 배단히 법인하는 자가 오셔서 이제 이 지역의 분위기가 바뀌는 거죠. 이제 예루살렘에 드디어 메시아가 도착하시는 것이고. 그분이 십자가를지고 온전한 예루살렘의 평화의 도성을 이루시는 거죠.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정 둘을 보내십니다.
여기서 보내셨다라고 한 단어는요 원어를 보니까, 권위와 4명을 잔뜩 부여한 단어예요. 그냥 야 갔다 와 보낸 게 아니라, 뭔가 그들을 전령으로서 사자로서 왕의 권위와 4명을 준 거죠.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주었는가 이 절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그러셨어요. 예수님이 참 알 수 없는 말씀 하시죠. 아니 이렇게 정말 권위 있게 4명을 주면서 명령하시는데 가서 나귀새끼 한 마리 그거 끌고 오래요. 참 난감한 상황이죠. 여러분 만약에 이런 부탁을 누가 한다면, 여러분 들어주시겠어요. 아직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가면 있대요 그거 볼테니 끌고 와라 제가 어찌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인데 여러분 이 말씀을 왜 하셨는가 우리가 쭉 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이란 단어예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 그만큼 어리다는 말도 되고 아직 뭔가 사람들이 쓰기 전이란 얘기죠 아직 사람들이 손을 타지 않은 이라는 뜻이잖아요. 성경에서 보면, 어떤 신성한 목적의 동물을 쓸 때 이런 동물들을 씁니다.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동물을 쓰는데 민숙이 19장 2절 한번 볼까요? 민숙이 19장 2절에는 부정함을 씻는 잼문을 만드는 이 일이 나오는데 부정함을 씻는 잼물을 만들 때 무엇을 쓰는가 바로 이때 붉은 암송아지를 쓰거든요. 그런데 붉은 암송아지가 어떤 붉은 암송아지냐 민숙이 19장 2절 한번 보겠습니다.
자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윤례를 이제 에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자 어떤 암송아지냐면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내게로 끌어오게 하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성한 목적, 즉 부정함을 씻는 재물을 만들 때에는 그냥 암송아지가 아니라 온전하고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써요 이것처럼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날개새끼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목적에 쓰이기에 합당하다는 거죠. 여러분 이 모습은 흠없는 제물로 이제 단번에 십자가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들어가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아직 명에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처럼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그새끼와 함께 예루살람이 입송하시는 거죠.
자 여기서 보리니라고 하는 단어를 동그라미 한번 해보세요. 보리니가 뭐냐면 그냥 눈으로 본다는 말이 아니라 이 단어는 놀라운 일을 볼 때 쓰는 말이에요. 와 하나님의 놀라운 일 하나님의 나라 정말 야 놀라운 사건 와 이런 기적을 보다니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여기서 본다는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날로새끼가 있다고 하는 것이 지금 예수님은 지금 거기까지 안 가본 상황에서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가면 진짜 있네라고 놀라게 될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놀라게 된 나그새길 어떻게 해요. 풀어서 끌고 오라 말씀하는 거죠. 풀어서 끌고 오라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실까요? 지금까지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셨어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맹인 바디메오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도 허락하시고 그와 함께 동행하시고 그러면서 자기가 이제 메시아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자기가 어떤 일을 하러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나귀 새끼를 지금 말씀하는 거예요. 매어있는 나귀새끼 매어있는 것을 보리 뒤 풀어 끌고 오라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죠. 나귀새끼 한 마리도 매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 나귀새끼 한 마리 별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매일 되어 있는 것이 예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거예요. 매어있는 것을 풀어 끌고 오는 것 풀어주는 것 그를 자주케 하고 해방케 하는 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다. 이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고 잘 못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어요. 특징이 뭘까요? 차이가 뭘까요? 마음이 착하면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못돼먹은 사람은 잘 안 받아들이나요?
그렇지 않더라고요. 공부를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 돈이 많은지 적은지 별 차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뭐가 중요하냐?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요, 내가 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매어 있구나 내가 죄에 매어 있구나 내가 두려움에 매어 있구나 내가 게으름과 음란함에 매어 있구나 나의 몽신가에 매어 사는 지배받고 있는 나 세상의 권세 가운데 지금 눌려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보험을 금방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매어있는 나를 풀어 끌고 오시는 나에게 자유주신 예술인을 받아들여요. 그런데 중요한 건 자기가 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돈에 매어 있고 내가 명예와 남의 눈과 체면에 매어 있다는 걸 모르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중요한 건 내가 매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은 풀어 끌고 오라 하셨어요.
자 그런데 3절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당연히 묻겠죠. 아니 그거 왜 당신 것도 아닌데 끌어갑니까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라구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 아니면, 즉시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자 여러분 주 퀴리우스란 단어인데 우리가 봤었죠. 퀴리오스란 단어가 중요하다고 근데 예수님이 자기를 퀴리우스라고 드러내는 장면이 여기가 처음이에요.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나귀 한 마리 때문에 자기가 주라고 드러내는 것 우리가 어찌 보면 정말 참 예수님 스케일에 맞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지금 뭘 보여주는 거냐면 나귀 한 마리라도 매어있는 것은 옳지 않고 그것을 풀어내는 자가 난데 바로 내가 주다, 즉 여러분 나귀 한 마리도 풀어내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왜 우리의 매어있는 영혼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왜 그분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겠습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말은 우리의 매여있는 죄성과 우리의 못난 모습을 풀어서 예수님의 일에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쓰시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의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절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보니까, 나귀 새끼가 무덤 거리에 매어 있는지라 진짜 있어요. 그것을 푸니 그랬어요. 풀었다 여러분 제자들이 그것을 푸니 제자들이 그것을 푸니 이게 제자들의 일이에요. 제자들은 무엇하는 사람이냐 매여있는 것을 풀어주는 사람이에요. 자유키하란 사람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꽁꽁 매는 사람이 아니라 매어있는 걸 풀어주는 사람들이에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자유롭게 하는 사람 풀어주는 사람이 우리예요. 그러니까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가 교회는 문제를 만드는 그룹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내는 그룹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
오늘날 코로나19 사태로 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있고 교회가 많은 왜 이럴 때 모이냐 왜 이럴 때 자꾸 이 모여서 집회한다고 그러고 왜 자꾸 비말이 튀어서 언제 또 집단 간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왜 그러냐 사람들은 교회에게 뭔가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교인도 발끈하죠.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 근데 여러분 이게 우리가 발끈할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풀어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간단하죠. 어떻게 하면 문제를 묶는 것이고. 어떻게 푸는 것인지 우린 다 알아요. 그런데 왜 그걸 안 따르죠 자존심 때문에 왜 종교를 탄압하느냐 여러분 종교 탄압이 아니고 교회가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을 우리가 스스로 찾아서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볼게요 5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자 보세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분홍색으로 한번 쳐보세요.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즉 나귀새끼는 쓸만한 데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 나그새끼는 그냥 매어 있는 것 아직까지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면서요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면서요, 즉 아무도 타보지 않을 정도로 이 나그새끼는 그냥 별거 아니었어요. 거의 그냥 배경처럼 있는 존재였던 거예요. 굳이 풀어서 뭘 쓸 만한 게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세상이 우리를 보는 시각이에요. 야 굳이 저게 사람 노릇 못할까 굳이 저게 뭐 대단한 일을 할까 저게 뭐 굳이 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풀어오라 풀어 끌고 오라고 말씀하시죠. 왜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주가 쓰시겠다. 세상에 바라볼 땐 별거 아니어 보이는 우리가 예수님 보실 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긍정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6절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에 허락하는지라 그랬어요. 자 여러분 놀라운 일이죠.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허락을 했을까?
아마도 그 당시에 예수님 주라고 하는 퀴리오스를 인정하는 사람들 아니었을까? 하는 거죠. 예수님의 당시 행적을 충분히 알고 믿고 그분의 어떤 유명세 또는 그분의 행위와 그분의 말씀에 허무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자 그런데 여기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사람들이 풀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귀 이 새끼가 거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나귀 새끼에 거기 있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보시고 그것을 이렇게 말하면 풀어줄 거야라고 하는 것까지 아시는 예수님은 마치 나귀 새끼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운명을 다 아시고 운명을 마치 보시면서 하나하나 풀어가신 예수님처럼 보이죠.
이것이 예지력 아닙니까 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귀에 대한 예지력을 보여주시는 이유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냐면 예수님이 나귀새끼에 대해서 이 정도 의지력이 있다면 과연 자신에 대해선 없었을까요? 자신의 미래는 몰랐을까요? 자신이 예루살람에 지금 입성하면 십자가지고 모함받아 죽으실 걸 모르셨을까요? 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장면을 미리 보여주시는 거예요. 봐라 나는 이러한 운명에 대한 미리 아는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은 실수로 어쩌다 잘못돼서 계획이 틀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리 알고 알면서도 내가 죽음의 길을 가는 내가 이 길을 지금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이 장면을 해석할 필요가 있어요. 7절입니다. 나귀새끼를 예수께서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위에 얹어 놓으며 예수께서 탓이니 그랬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겉옷을 얹어놔요 예수님이 타셨어요. 예수님 타신 이유는 아시죠. 우리가 마태복음 21장을 하면서 충분히 설명했어요. 600년 전에 스가라 헌지자가 예언했던 거 스가랴 9장 9절에서 다시 오실 메시아 왕은 어떤 분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의 어린 것 나귀 새끼를 따신다 그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걸 타신 거죠. 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모습이 나와요. 바로 아까 말씀드렸던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8절에 보시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밴 나뭇가지를 길에 표묘라고 했어요. 이 나뭇가지가 뭐죠 어떤 나무죠 종묘나무죠 잘 알죠 종묘나무 키위의 종료나무가지와 화려한 꽃송이를 뿌리면서 자 종녀 주일마다 부르는 찬양이잖아요. 그런데 오죽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림 입점하는 날을 종려나무 종려주일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데 중요한 건요 여러분 왜 종류나무를 폈을까? 하는 거예요.
종묘나무가 유월절에 상징인가요? 아닙니다. 장막절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지금 유월절인데 왜 종묘나무를 여기다 폈을까요? 유대인들이 헷갈렸을까요? 아닙니다. 굳이 종려나무를 핀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면 이 종묘나무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BC 167년 경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마카비 가문의 상징하는 문양이 종료나무 문양이에요. 이 마카비 혁명은 어떤 일이었냐면 이스라엘을 헬라가 다스렸잖아요. 헬라 제국을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알렉산더가 죽은 다음에 네 개의 제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때 프톨레미 왕조가 처음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종교적인 탄압이 없었어요. 그래서 비교적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종교적으로 자기네 종교를 계속해서 지금 할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프톨레미 왕조가 셀루쿠스 왕조라고 하는 왕조의 전투에서 패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제 셀루쿠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셀루쿠스는 강력한 헬라와 정책을 폈어요. 그래서 이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아주 협박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티오 코스 4세는 굉장히 유명했어요. 안티오 코스 4세 때 거의 뭐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는데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해버리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또 지성소에 직접 들어가서 약탈을 장행하고 매월 25일이 되면 왕의 생일을 기념해서 돼지를 재단에 올리게 했어요. 아주 정말 이스라엘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죠. 자 그래서 이 일 때문에 마카비 가문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마카비 가문이 이 거의 나라의 독립까지 이룰 뻔했어요.
물론 다시 제압 진압당했지만, 그래서 얼마 안 되지만 이스라엘이 독립을 유지했던 때가 바로 마카비 왕조인데 그때 이 마카비 왕조가 들고 일어난 독립 기념일을 하노카라고 부르는 수전절입니다. 수전절의 성경엔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노카는 굉장히 큰 명절이에요. 이때 이 마카비 가문의 문양이 종료나무 문양이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예루사르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이 종려감을 가지를 편 이유는 뭐냐면 바로 우리의 마카비라는 거예요. 이분이, 즉 우리의 정치적인 지도자요 군사적인 지도자라고 하는 것을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보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9절에 앞에서 가고 뒤에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르루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어라고 외치죠 호산나는 세이브 어스 나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이에요. 지금 당장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금 당장 로마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군사적으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예요.
10절에 찬송하루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바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 이것은 다윗의 나라의 때 가장 군사적으로 강성하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나라를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그런 나라를 달라고 하는 거죠. 다시 또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즉 그러니까 여러분 이 두 장면을 비교해보면 사람들은 흥분해서 종류나무 가지를 깔면서 우리의 마카비가 오셨다 우리의 정치적인 지도자 우리의 독립운동을 하실 투사가 왔다라고 외쳤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바로 나귀를 타신 모습을 통해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겸손한 왕 그래서 뭔가 정말 작은 하나의 생명 나귀의 자유함 자유함을 지금 풀어서 쓰시는 사용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위 땅에 오신 진짜 이유가 뭔지를 십자가를 지우고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짜 선물이 뭔지를 밝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제 우리가 이 마가봄 11장을 읽으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독립과 우리의 재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매어 있는 나 죄에 매이고 두려움에 매이고 지금 여러 가지 부정함에 매여있는 나를 풀어 하나님의 일에 써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계획과 뜻을 더 강화하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헛된 노력을 벌이려는 겁니다. 그래서 매어있는 우리가 내가 매어있구나 깨닫게 되고 이것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그분께 쓰임받는 것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님께 쓰임받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다시 한번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매여있는 우리를 돌아보길 원하고 우리를 풀어 사용해 주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발견하길 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욕망이나 우리의 야망이나 우리의 꿈을 위해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풀어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분이다라고 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기고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정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복음의 주인공을 높이는 것 그것이 우리의 4명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어 있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 죄악으로 지옥의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지금 당장 나를 구원해 달라고 경제적인 메시아로 군사적인 메시아로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둔갑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러한 무지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바르게 알고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제를 만들어내고 묶어두는 자들이 아니라 풀어내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삶에 편안함을 내려놓고 불편함을 선택하고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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