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마가복음 16장 2편

yt1981 2024. 2. 1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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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막아보고 마지막 장 16절에서 16장 1절에서 8절까지 말씀 찍도록 하겠습니다.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안식일이 지나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오 하더니, 눈을 들어본 적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내가 거기서 배우리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아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이 부활에 대한 사실을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죠. 

이 시대 지성인이라고 불렸던 한 분께서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믿어지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창조 성령 부활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지성인이지만은 여러분 눈이 열리지 않으면 안 보이고 안 들리고 안 믿어집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에 우리로부터 비롯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게 그냥 믿어지지 않습니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여럿 있어요. 그렇지만 부활은 다르지 않습니까? 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오늘 부활하신 장면을 누가 목격했습니까? 제자들이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이 목격한 게 아니에요. 여자들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시에 여자들은 목격자로서 증인으로서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을 하거나 사법적인 절차가 진행될 때 증인으로 심문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성경은 정확히 증거능력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통념상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여성들이 첫 목격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이긴 때문이죠. 꾸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등장시켜야죠 여자들은 빼버리고 그냥 베드로와 요한이 먼저 발견한 것으로 기록하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왜 여자들이 먼저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1절 이 절 3절입니다. 

시작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구부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구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주리오 하더니, 여기 보니까 에 어제 저기 본문 가운데 15장 47절에 보니까 막달라 마리아와 요새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눈여겨 보아 두었습니다. 어느 돌 무덤에 묻히는지를 눈여겨본 것이죠. 그리고 돌 무덤에 무덤의 문을 돌문을 굴려서 닫혀 놓는 걸 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들이 돌문을 열 수 있는 힘은 없어요. 돌문의 무게가 적어도 수 톤 이상이 나갈 거기 때문에 어쩌면 뭐 남자들 장정 너 대씩 굴려도 간신히 굴릴 만한 그런 큰 돌문입니다. 무거운 돌문이에요. 

여자들 몇이서 열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가면서 아마 걱정을 하고 갔겠죠. 근데 간 이유는 오늘 보니까 막달란 말이야. 이 여자는 어떤 분인지 아시죠. 마지막까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귀신 들렸던 여자이기도 하고요.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야고보 예수님 제자들 중에 둘이 있죠. 대야고보 소야곱으로 굴리해서 부릅니다. 그 소야고보는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큰 야고보는 글로바의 아들로 보기도 하고 또 이게 야고보가 둘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또 살로메가 있는데, 살로메는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야구보와 요한에 어머 아니죠. 그게 새배대 안에 살로매입니다. 

어쨌건 이 여인들이 예수님께 시신의 발을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그걸 이제 시신 처리할 때 아리마데 요셉이 리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할 때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을 했겠죠. 아니면 본인들이 상품을 바르기 위해서 사다 두었으나 안식일이 시작됨으로써 일을 못한 거예요. 그래서 안식이 끝나고 나서 향품을 더 발라야 되겠다. 너무 시신을 정성스럽게 향유를 바르지 못하고 에 그걸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안식이 끝나면 어떻게 하든지 달려가서 예수님 시신의 양품을 발라야 되겠다. 그런 마음에 사람과 정성을 가졌기 때문에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것이죠. 안식일이 끝나는 게 이제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보니까 해돋을 때 무덤으로 가면서 서로 걱정 수업을 하면서 가게 됩니다. 누가 그 돌무덤에 돌문을 열어줄 것인가? 이걸 이렇게 홈을 파서 문을 굴려야 되는데 그걸 여인들이 굴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 가는데 근데 4절 보십시오. 4절 시작 눈을 들어본 적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돌이 심히 크더라 가서 보니까 벌써 돌문이 열려 있는 거예요. 그니 아마 어쩌면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분명히 돌문이 닫히는 걸 보고 자리를 떠났던 여인들인데 문을 누가 굴려주겠느냐 그렇게 걱정을 하고 갔는데 보니까 문이 벌써 열려져 있는 거죠. 그래서 어떤 제가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돌문을 누가 도대체 열었냐 이걸 가지고 책을 쓴 사람이 있어요. 

홈 무브드 스톤 이 돌물을 누가 이 도대체 옮겼냐 이걸 연구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거 좀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누가 도대체 이 돌문을 굴렸을까? 근데 이 여인들이 안에 무덤 그다음에 들어갔습니다. 무덤은 뭐 사람 키보다 조금 아마 이게 낮을 거예요. 그래서 약간 머리만 숙이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문이었다고 가보면 여러분들도 알게 됩니다. 자 무덤에 들어가서 누굴 보게 됩니까? 5절 6절입니다. 시작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랍니다. 

느그 청년은 놀라지 말라 나사를 예수를 너희들이 찾지마는 그분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 돌무덤에 계시지 않이 아니라 이 돌무덤은 아직도 써본 적이 없는 아리마데 요셉이 준비했던 가족묘 세 가족묘이기 때문에 무슨 유골이 따로 있다거나 유골함이 있다. 다른 시신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분명히 여기에는 지금 예수님 시신이 단 한 번 한 차례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있어야 되는데 없어진 거예요. 자 이런 상황을 대했을 때 우선 이 여인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이 청년은 도대체 누군가 흰 옷 입은 청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빛이 나는 옷이라는 뜻이에요. 광채가 나는 옷이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나타난 것이죠. 그리고 이 여인들에게 얘기해 줍니다.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다. 여기 계시지 않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다 부활의 첫 증인들에게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다 저는 이 말이 얼마나 여러분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안심이 되는 말인지 모릅니다. 무덤에 계시지 않다 여러분 어떤 위대한 인간이라도 죽은들 무덤에 없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다는 거예요. 무덤에 계시지 않다는 거 이게 우리가 소망을 갖는 근거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나 저나 일생 또한 예수님의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 부활하셨다는 것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해도 우리가 좌절이나 낙심에 빠져있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고 이 말씀을 미리 다 제자들에게 일러주셨고 특별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눈물 짓는 마르다에게 마리아에게 이 일을 얘기 다 해주셨고 그리고 본인이 죽음이 인간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죠. 보여주신 것이죠. 알게 하신 것이죠. 이 사실 하나만 우리가 기억해도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많은 장례식에 참여하겠지만, 먼저 떠나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마는 믿음의 사람들이 떠날 때 우리가 예 그냥 장례식이라고 부르지 않고 뭐 연결식이라고 부르지 않고 천국 환송 예배 그런 소문 성 대예배라고 부르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무덤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덤을 더 이상 바라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비록 시신을 무덤에 우리가 묻을지라도 화장할지라도 가루를 뿌릴지라도 유골함을 둘지라도 거기에 이 믿음의 사람들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 한 가지만 기억하고 갈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의 감정으로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을지라도 그러나 감정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비록 시신을 눈앞에 두고 일지라도 더 이상 그곳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길이 되어서 우리가 무덤을 가볼 수도 있고 그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그런 예배를 드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무덤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마다 제사 지내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가족들이 모여서 그분의 생존의 삶을 추모하고 그분이 가 계신 영원한 곳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가 모이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만은 다시 그 제상에 우리가 뭐 절을 한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분명히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을 읽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 이 찾아서 우리가 큰 목소리로 한번 이 아침에 읽고 예 선언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또 암송하고 함께 선언해야 될 말씀이고 같이 익슨과 시작 예수께서 이러시되 나는 부하리오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물어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이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이걸 믿는 게 우리의 신앙이다. 뭐 이 땅에서 좀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기도 제목이지만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은 거는 바로 이 죽음을 이기는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어요. 나는 부활이오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다. 주님이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 생명이다. 

여러분 이게 있어야 이 생명이 우리한테 와야 우리가 주님 만나러 갈 것 아닙니까 주님이 계신 곳 내가 가면은 너희들 거처를 마련해 놓고 내가 다시 보낼 터인데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주님이 마련하신 거처로 데려가실 터인데 그 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부활 생명이 주어져야 간다는 것이죠. 그러니 부활 생명이 우리한테 오면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살겠고 그러니 안심하고 죽으십시오. 우리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됐단 말이에요. 

죽어도 살겠고 그래서 이게 우리가 창세기에서 나오는 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이유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지 이 아이를 주신 아이고 이 아이를 통해서 열방 가운데 아비로 삼으셨으니까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생명을 허락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들을 들인 것이죠. 어린 양을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어린 양을 번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동일한 그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죠. 주님께서는 어린 양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보라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보라 세상 죄를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어린 양이 예수님께서 어린 양 이삭 대신에 죽을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저와 여러분을 대신해서 죽을 십자가에 제물로 오신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재물 대속물 속죄물 뭐 묵어 서로 지불하러 오셨고 실제 지불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지불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것은 값을 다 치렀다는 것이고. 재물이 받아 만들어졌다는 뜻이고 모든 것이 다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복음은 두익 메시지가 아니고 던 메시지가 된 거라는 거예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 거예요. 이미 다 끝난 일 그분이 다 십자가에서 다 치루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더 치뤄야 할 값은 없다는 것이죠. 그게 우리의 자유의 근거요 해방의 근거요 복음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분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 단 끝났기 때문에 감동해서 감격해서 예배도 드리고 무슨 뭐 아우리치도 가고 선교사로도 가고 하는 것이 뭘 하러 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뭘 더 하겠다고 십자가에 뭘 더 보탬 수 있습니까? 다 하셨다는데 거기에 뭘 더 보태면 덧칠이란 말이에요. 개칠하는 거란 말이에요. 애들이 쓰고 나서 위에 또 뭘 쓰고 말이죠. 우리의 신앙은 그분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 이미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 살아서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이 약속을 내가 믿느냐 믿으십니까 예 그러면 그러면 된 겁니다. 뭐 여러분들 더 걱정할 거 없으시죠. 

사도 바울이 이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죽음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없었기 때문에 그런 40의 감한 매를 5번씩이나 맞고 돌로 두 번 맞고 말이야. 예수의 흔적을 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임을 내가 부인한다 그러면 그런 안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 5번 태장을 신하고고에서 맞았어요. 맞아 죽더라도 자기는 산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실제로 채찍을 쇠조각 납조각이 닦인 이 쇠로 채찍으로 맞았기 때문에 채찍만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나그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5번씩이나 여러분 한 번씩 맞고 나면 다시는 못 맞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수를 보면은 고린도 전설을 보면은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렇게 갈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갔느냐 15장 53절 15장 53 고려대조서 15장 53절 55절까지를 읽습니다. 시작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잊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내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 죽음은 늘 마지막 승자처럼 여겨지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늘 죽음은 인간을 이긴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을 했고 죽으면 뭐가 남느냐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망아 내 승리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디 승리했느냐 사망아 내가 쏘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죄를 쏘았을 뿐이다. 죄를 힘입어서 죄 통로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을 이긴다고 말하지만 죄를 이기신 주님 죄를 사하신 주님 죄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신 주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죽음도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아침에 여러분들이 죽음을 툴툴 털어버리고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다 마지막 걱정은 죽음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게 그렇게 많아 뭐 하면 죽겠대 제가 요새 죽게 생겼습니다. 죽겠습니다. 심지어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일이 많아 죽겠습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죽음을 입에 달고 사는 거예요. 그러다가 죽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사망을 이기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죽겠다고 하지 말고 죽게 있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약간만 바꾸면 되는데 고걸 못 바꿔가지고 죽겠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죽게 있더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사는 존재 아닙니까 지금부터 시간표가 달라지지 않아요. 여러분 부활 생명은 우리의 모든 관점을 바꾸어 놓습니다. 신앙은 위대한 능력이에요. 여러분 돈이 사람을 좀 돈이 생겨도 사람을 바꾸거나 권력이 좀 있어도 사람의 걸음걸이가 다르고 표정이 달라요. 여러분 이 부활의 본능을 가지고 부활의 생명이 와도 사람이 안 달라지면 이 안에 생명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우리 안에 생명 이 부활 생명이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이 달라지게 돼 있어요. 시간표가 달라집니다. 저 인간 안 보고 살 수가 없어 영원히 볼 텐데 어떻게 빨리 화해를 하는 게 낫지 그렇잖아요. 

저는 여러분들이 영원히 살기 때문에 이 시간표가 조정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냥 요 10년 20년 단위로 생각하지 말고 100년 1000년 단위로 생각하지 말고 생전과 사후로 생각하지 말고 영원한 시간표에 따라서 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시간을 살기 때문에 믿음이란 과거가 우리 현재 발목을 삼는 삶이 아니고 과거가 현재를 해석하는 그런 현실 인식이 아니고 미래가 현재를 소망케 하는 현실 인식을 가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부활 생명이 우리한테 오면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고 그게 부활의 소망이에요. 과거의 경험은 우리의 발목을 받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저렇게 했는데 이렇게 했는데 인간이 나한테 한 것 과거의 경험 과거의 생각과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바라보고 현재를 판단하는 삶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 영원한 인식은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에서 근심에서 염려해서 풀려나는 거예요. 과거의 경험은 우리를 끝없이 실패했기 때문에 끝없이 우리를 나락으로 끌고 가겠지만, 그러한 미래 부활의 소망 하나님 존전해서 해 예루살렘에서 새하늘과 새 땅에서 이 땅을 바라보면 여러분 이 땅이 부러울 게 뭐가 있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도 있고 저는 이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다 이 1004가 지금 그렇게 예수님은 여기 무덤에 계시지 않다 왜 무덤을 바라보느냐 너희들이 죽음에서 자유하다면 왜 죽음에 묶여 있느냐 사망아 내가 쏘는 것이 어디 있냐 우리도 이렇게 선언해야 되는 것이죠. 자 7절 8절 말씀입니다. 

시작 가서 그의 제절과 베도록에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배우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일러주라 이 여자들이 가서 제자들에게 일러주는 걸 나중에 보게 되면 알겠지만, 참 제자들은 그냥 무서워 들덜 떨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갈릴리에 가야겠다. 갈릴리를 베드로이 그걸 일러주라는 거예요. 갈릴리에 부르셨던 곳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던 곳에 가서 다시 주님께서 부르시기를 원하시며 즉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는 것이죠. 

갈릴리에서 시작된 공생회 그분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을 이렇게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실패한데 머물러 있지 않고 주저앉았는데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망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생명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한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처럼 사랑하다 말다가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강권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분께 맡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여인들은 몹시 놀라서 떨며 무덤에서 도망오고 무서워서 안 말했다. 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사실 막아보고면 여기서 끝이에요. 이 뒤에는 후대에서 더 첨부한 걸로 그렇게들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여기가 마가복음의 끝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좀 이게 좀 아쉬운 거예요. 뒤의 얘기가 그 아쉬운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기도할 때는 하나님 이 부활 생명이 제 안에 있음을 확인케 하여 주옵소서 두려움이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제가 과거에 익숙한 관점으로 현재를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게 해주옵소서 한번 담대하게 그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넘어졌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지금도 그를 우리를 묻들고 있지만 붙인 것에서 풀려나게 하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영원한 곳 담도 없고 울도 없는 세안을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예배를 드리는 환상을 가지고 이 현실을 바라보고 이 현실을 해석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죽음에서 풀려나는 자유를 경험하게 하시고 죽음이 우리를 묵지 못하게 하시고 사망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믿는 이 신앙이 부활의 신앙에 근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날마다 부활의 신앙으로 새로워지게 하셔서 죽음에 묶여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사망이 어디 있느냐고 호통치며 지날 수 있게 도와주시고, 또 한번 죽음에 묶여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묶여 있습니다. 무덤에 갇혀 있습니다.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고자 합니다. 어떤 무덤에 갇힐 것인가를 결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무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과 목소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죽어서 어떤 무덤에 묻힐 것인가를 걱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서 왜 무덤을 바라보느냐 하나님이 계신 영원한 거처를 왜 바라보지 못하느냐고 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셨사오니 하나님 오늘 하루도 부활 생명으로 걸어가는 하루가 되게 해주옵소서 육신의 생명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이 세상 가운데서 응원한 생명 부활 생명 주셨사오니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오늘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이 부활의 생명을 전하는 발걸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우리 9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부활 생명을 깨닫게 하심이 오늘 무덤에 와서 천사를 만났을 때 천사가 먼저 갈릴리로 가라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왜 분 빈 무덤을 바라보느냐 하는 말을 듣고 다시 새로운 소망의 걸음을 옮겼던 여인들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이 발걸음 오늘 하루를 시작하기로 결단한 이 자리에 고개 숙인 모든 영생의 믿음에 형제들 자매들 위해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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