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마가복음 16장 1

yt1981 2024. 2. 1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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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 16장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응답받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제일 마지막 장입니다. 마가복음 16장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과연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고 하는 걸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죠. 여러분 이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자 복음의 정수입니다. 복음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하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하는 것은 과연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내 삶에 근원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살아온 과거의 날들을 어떻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나 그리고 어떻게 나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할 수 있는가 아주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 중에 핵심은 부활입니다. 

그래서요 저는 부활 주일에만 부활이 선포되고 외쳐지는 게 아니라 1년 내내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들이 이 일요일 주일 예배드리는 날이 바로 작은 부활주일이거든요. 매번 이 부활이 선포돼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십자가의 복음만을 선포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부하를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매일매일의 삶이 중요할 텐데요. 보겠습니다. 오늘 1절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거와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자 안식일이 되기 전날 금요일날 예수님이 십자가를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자 그런데 안식일에는 아무도 움직일 수가 없죠 심지어 일정 기간 이상은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나서 움직였는데 안식일이 지나서 언제 움직였나 보니까 이 절에 보시면 안식구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에 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셨음에도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그분과의 만남을 사모하면서 안식일이 끝나가는 시점에 이들은 출발한 거예요. 안식구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에 무덤에 갔어요. 여러분 이들이 있던 곳이 아마 배단위였을 것으로 추적이 되는데 배단위에서 골고닥까지가 약 3.2키로 정도 됩니다. 그러면 일찍이 해 돋을 때 도착하려면 출발은 언제 해야 돼요. 깜깜한 밤에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 돋을 때 출발한 게 아니에요. 해가 없을 때 캄캄한 새벽에 출발한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이 여인들의 믿음이었고 이 여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정승네 집 개가 죽으면 문턱에 달아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살아 있을 때는 권력이나 힘의 사람들이 굴복하고 신뢰하고 추항합니다. 그런데 죽으면 끝이죠. 아무도 돌아보지 않죠 그런데 여러분 참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저주받은 자로 죽으셨는데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캄캄한 새벽을 뚫고 무덤으로 찾아갔다는 거예요. 이게 놀라운 일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는가?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의 캄캄한 새벽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주님과의 참 만남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현재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소망이 바로 예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 마가는 세 명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이 부활이 그냥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바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벌어진 사건이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세 명의 이름을 막아낸 정황 기록하고 있죠. 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또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이 절에 안식후 첫날이란 단어예요. 안식후 첫날 동그라미 해보세요. 이 표현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중에 어디에 나올까요? 네 다 나옵니다. 

맏태 마감 누가 요한복음에 다 나와요. 안식후 첫날이란 표현이 왜 이제 안식후 첫날이 무슨 날이에요. 주일이 되었어요. 이날이 부활절이자 이날이 주일이에요. 즉 지금까지는 안식일에 모였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 안식일 전날이었고 그럼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었어요. 자 안식일은 그동안 왜 중요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만에 창조하시고 7일째 쉬었죠. 그 개념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쉬신 그것을 기념하여 오류도 쉰다 우리가 창조받은 자로서 피조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이 안식일이 추레굽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병 중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그렇기 때문에 안식이 중요했는데 이제부터는 정말 중요한 날이 뭐냐면 안식 후 첫날이 되는 거예요. 

안식 후 첫날 그래서 기독교는 안식하는 종교가 아니구요. 안식 후 첫날의 예, 예배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새 출발을 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안식일 논쟁이 참 많았잖아요. 왜 안식을 똑바로 안 지키냐 왜 안식일날 사람 고치냐 왜 안식일날 생명을 구원하느냐 이거 가지고 굉장히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 이전에 유대교는 안식이 중요한 종교였어요. 가만히 있어라 라고 하는 종교였어요. 좀 율법을 지키고 나서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 수 없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안식일에 야 생명을 죽이는 게 옳으냐 살리는 게 옳으냐라고 물으실 정도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을 뛰어넘는 더 큰 가치 더 활발한 생명력을 예수님 주장하셨거든요. 

그분이 바로 안식을 뛰어넘는 안식 후 첫날의 주인이 되신 것이죠. 그것이 부활입니다. 또 마가는 때를 어떻게 표현하냐면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에 라고 표현해요.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에 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굉장히 잘 보여주는 말인 거예요. 안식 후 첫날 더 이상 안식하지 않아도 되는 날 안식할 수 없는 날 안식을 뛰어넘는 날 매우 일찍이 아주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하게 해돋을 때에 서광이 비쳐오는 바로 그때의 무덤으로 갔다 여기서부터 부활의 사건이 출발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뭐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외치는 거예요. 너희가 가만히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가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우리가 교회 오지 못하고 집에 있지만 집에서도 유튜브를 통해서 영상을 통해서 예배하면서 여러분 정말 가슴이 터져라 찬양 부르세요. 기도하세요. 말씀에 아멘 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에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믿음 자 그런데 그 세 분 세 명의 여자가 왜 달려갔느냐 그게 중요하죠. 1절에 나옵니다.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 그랬어요. 예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다 이 말은요, 여러분 죽은 사람에게 학품을 바르는 그런 풍습이 원래 유대교회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누구에게만 발라주는 거냐면 왕에게만 발라요. 왕은 죽은 시체에도 향품을 바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냥 기름만 바르고 땡이거든요. 

그런데 향품을 바른다는 건 뭐냐면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다 십자가를 지셨지만 죽으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영원하신 왕이십니다라고 하는 신앙 고백을 하기 위해서 이 여인들은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그 무덤으로 갔다라고 하는 거죠. 게다가 여러분 마가본 14장에 보면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부은 순절한 아들을 부은 사건 오늘 봤잖아요. 사건 이후로 아마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여인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나의 죽음을 준비한 이 여인을 칭찬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이 여인들은 아마 그 여인처럼 하기 위해서 향품을 사 들고 달려간 게 아닐까 여러분 신앙은요, 신앙생활은 원조도 중요하지만 따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 원조도 중요해요. 누가 처음에 했냐 중요해요. 그런데 사람이 했으니까 나는 안 할래가 아니에요.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미 장례를 준비하며 항유를 부었으니까 우리는 안 보고 되게 째가 아니에요. 여러분 이 향품은 과연 싼 걸까요? 비싼 걸까요? 비싸죠 베다리에서 마리아가 부었던 향유가 300 데나리온이었잖아요.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삭시니까 300 데나리온이 일 년 연봉이에요. 그만큼 귀한 향유를 부었어요. 자 그렇다면 이 여인 세 명은 지금 향품을 사다 두었다 이 향품은 싼 것이었을까요? 아니요. 이것도 무척 비싼 것이었겠죠. 이 신앙이 다를까요?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 호갑은 귀하고 이 여인들의 향유는 향품은 별것 아니었을까요? 아니요. 둘 다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요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원조가 되면 좋죠. 그러나 따라 하는 거라도 잘해야 돼요. 

누가 벌써 했지만, 그러나 내가 그분을 따라서 선한 일을 행하고 귀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해야죠 이 여인들 보세요.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그거 발라드리러 갔어요. 베달이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따라 하려고 갔는데 그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 되었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선한 일에는 순서가 필요 없습니다. 따라 하면 어때요 여러분 모방하셔도 되구요. 나도 저렇게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 정말 훌륭한 분이 계시면 여러분 기도하세요. 우리 자녀가 저번처럼 되게 해주세요. 우리 가정이 가정처럼 될 수 있게 해주세요.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하셔야 되는 거죠. 여러분 이들이 그러면 믿음으로 갔느냐 믿음 없이 갔느냐 되게 중요한데 3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3절에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주리오 하더니, 자 예수님이 당시에 갇혀 있던 뭐 죽으셨으니까 갇혀있는 건 아니죠. 그냥 들어가 계신 거죠. 무덤은 큰 돌문이 있었단 말이야. 말이에요. 돌문이 수십 키로에서 100키로도 넘는 돌문인데 이 돌문이 이 안에는 공간이 돼 있죠. 동굴처럼 공간이 있고 무덤을 막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돌을 여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굴릴 수가 없는 거예요. 자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주리오 이 말은 뭐예요? 우리는 굴릴 수 없다는 뜻이죠. 근데 누가 굴려줄지는 모르는 거 아니에요. 자 여러분 보세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돈을 굴려주리오 우리는 무덤문을 굴릴 수 없어요. 그러면은 지금 가면 돼요. 안 돼요. 이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믿음이 있는 말인지 없는 말인지 보세요. 내가 못 굴리는 돌무늬 맞고 있으면 가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이 말만 보면 믿음 없는 말 같아요. 그런데 보세요. 이 절 끝에 부분에 무덤으로 가며 3절 처음에 서로 말하되 자 이어 이건 뭐예요?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예요. 아무도 이 돌을 굴려줄 사람이 없어요. 나도 돌을 못 굴리고 누가 굴릴지 몰라요. 그런데 가고 있어요. 가면서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뭐냐 우리는 돌 굴릴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굴릴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에요. 나는 우리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지만, 그러나 가는 거예요. 그러나 향품을 준비해서 사다 두었다가 들고 가는 거 이게 믿음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문 돌 굴릴 힘이 없지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굴려주리오 누가 과연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거죠. 그걸 믿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 가는 행위가 결국 희망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이고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4절 보세요. 눈을 들어본 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네 할렐루야 노란색 들고 표시해 보세요. 눈을 들어본 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보세요. 그러면 서로 말하면서 가면서 말하는 거죠.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물에서 돌을 굴려주리오 하다가 눈을 들어봤는데 벌써 돌이 굴려져 있더라 여러분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야 이거 어떡하지 하는데 눈을 들어보니까 벌써 돌이 굴려져 있어요. 벌써 돌은 옆으로 피해져 있더라는 거죠. 그런데 돌이 힘이 크더라 그랬어요. 여러분 우리는 돌이 크다는 것만 생각해요. 

그래서 아무도 못해 나도 못해 너도 못해 아무도 못해 그런데 우리가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때 달려갈 때 눈을 들어본 즉 벌써 돌은 굴려져 있더라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면 이 돌을 누가 굴렸습니까? 예수님이 굴렸나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이 돌을 끊자 응짜응자 해서 밀어내고 나오셨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또 그렇게 알고 계시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네 예수님 부활하셔서 이 돌을 밀어내고 나오셨다 네 아닙니다. 아니구요.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은요, 이 돌이 그분을 막을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이문을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누가 이 돌을 불렸을까요? 마태복음 28장으로 한번 봐볼까요? 마태아 기록을 했는데 마태복음 28장 예 이 절 보겠습니다. 

자 1절은 오늘과 똑같은 말이 나와요. 1절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그랬죠 이 절입니다. 큰 지질인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도를 굴려내고 위에 앉았는데 그랬어요. 즉 천사가 내려와서 돌을 굴려냈죠 즉 예수님은 그전에 이미 나오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 문이 그분을 막을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문을 나오셨고 천사가 나와서 이것을 치워 넣은 겁니다. 그럼 뭘 말하는 거죠. 이 열린 무덤 문은 부활의 증거인 것이고. 부활의 상징인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는 마테마가 누가 요한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부활의 과정이 어땠고 부활의 뭐 현장이 어땠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왜 말해줘도 모르니까 내 보건소는 다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근데 중요한 건 뭐예요? 

부활의 결과는 기록하고 있다. 부활의 증거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굴릴 수 없는 고 돌이 굴려져 있다. 바로 선사가 것을 굴려놓고 비어있는 공간을 보게 해주는 거죠. 봐라 여기 계시지 않지 않느냐 그래서 5절에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1004죠 시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나사는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라고 말해요. 이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분이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무덤에 돌을 돌문을 굴린 것이죠. 그래서 이 공간에 아무도 계시지 않는다. 이 여기는 빈 공간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는 것을 지금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뭘 말해주는 걸까요? 부활은 설명이 안 돼요. 

부활 예수님 어떻게 부활하셨어요. 중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났어요. 그거 어떻게 알아요. 우리가 그걸 보여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뭘 보여줄 수 있는가 부활에 나타난 결과는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죠. 비어있는 무덤 열려진 돌문 즉 부활은 뭘 보여주는 뭘로 보여주나 변화된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나의 삶이 새로워졌다고 하는 내 삶의 변화된 모습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부활인 거예요. 여러분 부활은 내 보험소가 다 증거하고 있지만 우리는 부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입증해 낼 수 없습니다. 이건 벌어진 사건이지 이걸 우리가 이론적으로 몇 더하기 몇은 몇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다만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별것 아니고 연약한 것인데 이렇게 살다가 망할 인생인데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믿음의 능력 있는 삶이요. 가치 있는 삶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삶인 것을 보여주는 우리가 증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바뀌신 예수를 찾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사를 통해서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 그가 살아나셨다라고 하는 증거를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알려주시는 거죠. 더 이상 우리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받는 종이 아니십니다. 이제는 그가 살아나셨고 을 계시지 않습니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우리가 그를 두었던 곳 바로 비어 있는 빈 무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로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사람 원래 저렇지 않았는데 원래 별거 아니었고 원래 연악했는데 요즘 왜 그렇게 힘이 많아 힘이 세 왜 이렇게 요즘 활기차 요즘 왜 그렇게 사람이 긍정적이고 왜 이렇게 사람이 오늘 괜찮아 보여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 부활하셨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의 구조가 되셔서 지금도 사람의 삶 인두워 계시대 그렇구나 예수님의 부활이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켰구나라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이 다 끝나가고 이제 곧고난 주간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찾아옵니다. 

때가 됐으니 돌아오는 부활절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다시 한번 소망 가운데 붙들린 바 되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던 문에서 이걸 돌을 굴려주리오 하고 가는 낙담하던 우리가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달려갈 때 눈을 들어본 즉 벌써 돌은 굴려져 있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에 들려온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달려간다면 지금 이 어려운 상황들은 모두 굴러갈 것이고. 눈을 들어본 즉 벌써 문연에 해결돼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은 여전히 찾아오셔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위험한 현실 가운데 우리를 건져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주 님 마가복음의 16번째 장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그동안 16일 동안 이 마가복음을 따라오면서 저희들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귀한 분이요.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분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오늘 예수님의 부활 소식입니다. 

이름없고 힘없던 세 여인이 캄캄한 밤중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으며 그분은 왕으로 선포하며 향품을 들고 그분에게 달려갔던 것처럼 저희들도 그렇게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의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 고난받고 죄를 써주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하며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면서 우리가 험한 쌍 가운데 주님의 사랑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고 주님을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주리오 하는 현실이지만 그러나 가면서 서로 말하며 우리가 서로 희망을 얻으며 서로 격려할 때에 눈을 들어본 즉 벌써 도로는 굴려져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듣는 부활의 증인이 되든 복이 우리에게 힘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힘 주시고 다시 한번 능력을 얻어 이 시대를 이겨내고 주님을 찬미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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