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설교] 베드로후서 1장

yt1981 2024. 6. 1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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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베드로 후서일정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깨닫는 지혜와 응답받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부터 베드로 후소를 시작합니다. 베드로 전서가 박해받고 고난 받고 이제 죽어가는 흩어진 나그네들 바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대한 위로와 권면의 책이었다면 후선은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베드로 전설을 쓰고 나서 사실 베드로는 편지를 쓸 생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바울이나 요한처럼 성격 자체가 뭔가를 꼼꼼하게 쓰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죠. 설교하면 1번 설교하면 3천 명 5천 명씩 회계하는데 굳이 뭐 하러 이런 편지를 쓰겠어요. 그런데 지금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쓸 수밖에 없는 상황 왜 그러냐면 이제 초대 교회의 신앙이 뭐였냐면 예수님은 바로 오신다 였어요. 지금 오신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오신다 그러니까 믿음을 잘 지켜야겠죠. 곧 오실 거니까 예수님 오셨을 때 우리가 믿음을 보이려면 믿음을 잘 지켜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라든지. 많은 이들의 권면을 듣고 신앙을 잘 지켜왔는데 문제는 이게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점점 예수님이 안 오실 것 같은 거예요. 유수님 오신다 오신다 했는데 그래서 로마에 박혀도 견디고 신앙을 버텼는데 아무래도 안 오실 것 같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생기면서 그 틈새를 파고 들어온 존재들이 있었어요. 바로 이단이었어요. 

이단들이 야 재림 같은 건 없어 그냥 믿음은 지식이야 그냥 믿음은 헬라 사상 철학처럼 그냥 이렇게 아 뭐 믿으면 좋고 안 믿으면 별거 아닌 거지 그게 굳이 너희의 삶과는 관계가 없어 그게 천국에서 너희가 살아가되 살아가야 될 영원한 삶 뭐 새로운 인생 재림 야 그런 거는 굳이 우리가 몰라도 되고 또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 사람이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 라고 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신앙을 추상화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신앙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멀리 뛰어보내는 그러니까 하나님이란 분도 어딘가는 계시겠지 전능하신 분이 계시겠지 그런데 그분이 나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나와 시장을 분리시키는 이런 이단들이 그때 많이 등장을 했어요. 

재림도 없고 예수님 다시 안 오실 거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안 오시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부활 이거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의 존립을 흔드는 그러한 그 당시에 이단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다시 패를 든 이유는 뭐냐면 그들에게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는 교인들에게 뭔가 확실하게 전해줄 필요가 있었어요. 그런데 뭘 전해줘야 됩니까? 이단들은 굉장히 철학적이고 사상적으로 굉장히 헬라사상이 잘 발달해있는 사람들이에요. 머리는 굉장히 뛰어나요? 근데 뭐가 없어요. 체험이 없어요. 여러분 이게 믿음과 체험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모르는 건 아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삶으로 겪어서 만난 하나님과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 체험과 지식이 함께 갖는 거죠. 그렇다고 체험만 강조를 해버리면 이게 또 엉뚱한 데로 가죠 그러니까 바른 지식과 우리의 삶을 체험이 중요한데 이 2가지 가운데서 지금 이 당시에는 뭐가 없어요. 체험이 없는 거예요. 머리만 있어요. 이성만 있어요. 거기에 진짜 지식은 머리로 믿는 게 아니라 내 삶으로 때로는 인내하고 때로는 견뎌내고 내가 내 삶이 변화되면서 하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책이 바로 베드로 후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베드로가 뭘 강조했나 자신의 독특한 경험 예수님과 했던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경험이 있잖아요. 그걸 강조해요. 

왜 그래야만 그 당시에 이단의 공격에 흔들리는 교회에게 아 그렇지 예수님은 분명히 오셨고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 하나님이시고 거봐 베드로가 봤대잖아. 거봐 예수님은 정말 우리에게 오실 거야라고 하는 믿음을 다시 한번 이성과 또 체험으로 확인시켜주는 작업이 베드로에게 필요했죠. 자 그래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면 베드로가 이제 죽을 때가 다 됐어요. 이제 곧 순교가 다가와요. 이제 그게 느껴지잖아요. 아 이제 나 얼마 살지 못하겠다. 그러니까 이제 베드로는 자기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이제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자기만의 고백을 교회에 던져줌으로써 교회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희당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자기를 그렇게 던져버린 것이죠. 불쏘시개로 던진 것이죠. 그 내용이 바로 베드로 호서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 호서를 볼 때 우리가 고 특징이 잘 묻어나는 본문이 어디냐면 오늘 1장 13절입니다. 

베드로 호서 1장 13절 말씀 먼저 볼게요 이렇게 고백을 해요.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이 장막은 내 몸입니다. 근데 육신에 있을 동안 살아있는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자 생각나게 한다. 여기 1번 노란색 쳐보세요. 생각나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한다. 이 당시에 이단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이었지만 베드로는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건 뭐예요?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경험들 그 바람소리 그분과 함께했던 그 따스함 그 예수님과의 체험을 지금 떠올리게 하는 거예요. 이건 머리로 믿는 게 아니다. 그분과 함께했던 그 세밀한 느낌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14절 이는 우리 주의 숲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압니다. 이제 나도 곧 순교위 때가 다가왔다는 거죠. 

15절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자 그렇죠. 내가 떠난 후라도 내가 순교하고 난 뒤에라도 이것을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 노란색 뜨시고 생각나게 하려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사순절 묵상 포인트는 생각입니다. 자 그러니까 왜 생각이 중요한가. 생각은 이성이 아니에요. 생각은 모든 나의 경험이 다 포함되는 거예요. 이 생각 속에는 그래서 내가 함께했던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예수님의 따스한 눈빛 그분의 치유하는 손길 그분의 말씀 그분의 진실함이 다 떠오르는 거죠. 그게 생각이죠. 생각나게 하려는 거예요. 그래서 13절과 15절에서 반복해서 베드로는 생각나게 함이 생각나게 하려라고 강조하고 있는 거죠. 

자 그럼 뭘 생각나게 하는가? 16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자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 그의 강림하심 누가 경험했어요. 베드로가 실제로 오셨던 예수님의 능력을 받구요. 그가 이 땅에 오셨다는 걸 누가 확인해요. 누가 증인이에요. 베드로가 증인이에요. 자 이것이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자 분홍색을 드시고 교묘히 만든 이야기 이게 뭐예요? 이게 2단이에요. 이단들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건 하고 있는 건 뭐냐면 예수님을 본 적도 없어요. 이 사람들은 본 적도 없는데 뭘 만들었어요. 교묘히 만든 이야기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꾸며냈어요. 이거 이단 사설을 벗어나라는 거예요. 이거 아니고 그 다음에 노란색 뜻이고 그럼 뭐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험을 친히 본 자라 이걸 강조하는 거예요. 야 내가 직접 봤거든. 야 내가 그분의 위험을 친히 봤는데 그분은 이단들이 바라는 그런 교묘하게 만들어낸 그런 이론가가 아니야. 

그분은 실제로 오셨고 그분은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부활하셨고 실제로 다시 오실 거야. 라고 하는 자기의 베드로만의 그 증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그가 봤던 걸 뭘 봤나 17절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게 언제예요. 변화산 사건입니다. 변화산 사건 놀라운 일이었죠. 예수님이 정말 옷에서 더 이상 힐 수 없는 그런 흰 광채가 나면서 구약의 인물이 나타나죠. 누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자죠 모세와 엘리야가 나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죠 그때 베드로가 너무 놀라서 뭐라고 그래요. 예수님 여기에 제가 장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씩 사시죠. 여기서 합시다. 라고 할 정도로 너무 좋았죠 그때 예수님이 아니다. 

내려가자 그래서 내려가서 어린아이에 병을 고쳐주시고 그때부터 놀라운 일을 행하시잖아요. 그걸 경험했던 베드로 아무도 못 봤지만 말로만 들었지만 베드로는 봤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 마지막 대회에 이단이 창궐하고 교회가 그 속임수에 넘어갈려고 하는 관계에 빠져들 때 누가 등장하는가? 직접 본 사람이 등장을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지금 내가 말년이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다라고 베드로가 펜을 한번 다시 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그러면서 또 뭘 강조하는가? 18절 마지막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의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다. 자 뭐가 중요해요. 그와 함께 있을 때가 중요하죠. 그와 함께 있을 때 들은 것이다. 누가 내가 들었다는 거예요. 근데 이제는 이것만큼은 어떻게 뭐 아 어떠한 2단도 어떠한 관계로도 이거는 시비 걸 수가 없는 거예요. 

직접 봤는데 직접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지금 베드로 강조하는 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스스로 삶에 연관되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머리로만 믿고 그분을 이해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분과의 연합하는 삶 그러니까 삶 가운데에서 내가 적어도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또 이겨내 보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도 좀 보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억울해도 양보도 좀 해보고 예수님 때문에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요, 이게 정말 제대로 된 믿음인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매달 예수님 있는 것 때문에 고민하잖아요. 실제적으로 언제 헌금할 때 11조 예금을 드릴 때마다 고민하잖아요. 

이거 어느 선까지 끊어야 돼 이거 내가 총액으로 해야 돼 아니면 내가 수익에서 해야 돼 순수익에서 해야 돼 경비랑 뭐 다 빼고 나머지에서 10분의1을 해야 돼 여러분 이거 매번 고민하지 않으세요. 네 저만 믿음이 없군요. 여러분은 확실하시군요. 이게 우리가 늘 고민이잖아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길에서 누가 확 끼어들어도 내 성질 같아서는 빵빵을 해주고 싶은데 아이고 그래도 내가 내 뒤 차에 지금 물고기도 붙여놨는데 내가 우리 교회 다닌다고 뭘 붙여놨는데 내가 참아야지 이런 마음이 들잖아요. 여러분 이런 경험들이 우리의 신앙을 형성해 나간다는 거예요. 

내 몸 같아서는 시험 못 봐온 우리 아들을 콕 쥐어박고 싶지만 그래도 엄마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성적 하나 때문에 아들을 잡을 수는 없지 그래 1번 더 내가 사랑하고 이해하고 받아주리라 이러한 살면서 순간순간 갈등과 순간순간의 고민을 이겨내는 그 신앙의 힘을 경험해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한테 내가 안부를 물을 것인가? 내 자랑을 할 것인가? 내 남편 자랑 애들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신앙을 보일 것인가? 그래서 내가 저 영혼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것을 더 중심에 둘 것인가? 아니면 내 세상적인 자랑의 허영에 빠질 것인가? 이거 고민이 우리는 순간순간 매순간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우리의 신앙이에요. 결국에는 내가 사도식령을 믿냐 안 믿냐 내가 주기동물 하루에 몇 번 하냐? 

이게 신앙이 아니고 실제 내 삶에서 내 성격이 변화되는가 내 말이 달라지는가? 내가 살면서 나의 중심이 지금 예술인교로 이동하고 있는가 지금 베드로는 그 얘길 하는 거예요. 이 당시에 삶은 하나도 없어지고 그냥 나는 믿는데 나 예술인 믿어요. 그러니까 된 거 아니에요. 라고 하는 이 당시의 모든 이단들에게 지금 베드로는 도전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신앙이 머리로만 가면 안 된다. 이건 경험이고 삶이고 그분과 함께 듣고 보고 누련 모든 것이다. 그걸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강조하는 책이 바로 베드로 후서입니다. 자 그럼 1절 들어갑니다.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랬어요. 자 이 인사는 굉장히 의례적인 것 같지만 전서와 달라진 부분이 있어요. 

전서에서는 그냥 예수의 사도인 베드로는 이랬거든요. 근데 뭐가 들어갔어요. 종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시몬이란 말이 들어갔죠 베드로가 이제 죽을 때가 다 되니까. 베드로의 성격은 되게 급하잖아요. 급하고 어땠어요. 어부 중에서도 그물 던지는 어부잖아요. 그러니까 굉장히 뭐랄까 결과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결과중심이던 시범 베드로가 말년에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도 주의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려요 이 균형이에요. 균형이 잡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할 때는 뭐가 중요해요. 사명이 중요한 거죠. 내가 전할 말이 있는데, 이게 전서였어요. 그런데 후손은 종이란 말이 들어가면서 그만큼 자기를 겸손하게 만들면서 둘로 쓰라는 말은 이건 뭐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나는 완전히 종 되었고 너희들에게는 사도가 되었다. 이것을 강조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불은 받았지만 나는 그분의 철저한 종인데 내가 시몬 베드로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원래 이름이잖아요. 내가 시몬이었던 사람인데 예수님이 나를 베드로 만들어주신 거 아니에요. 원래 나는 시몬이었어요. 아무 능력 없는 그냥 무지랭이 어부였어. 그런 시몬을 베드로로 만들어주신 분 자 그분의 의의를 힘입어서 나는 이걸 전하는데 누구한테 전해요. 동일하게 나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오늘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리 자 고배로운 믿음 노란색으로 쳐보세요. 고배로운 믿음 이 당시에 믿음이 보배롭지 않았어요. 이단이 창궐하고 흔들리고 교회들이 뭐 정상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들을 인정하고 격려하면서 뭐라고 말해요.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해요. 이 이유가 있어요. 왜 보배로운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내가 잘 믿어서 보배로운 게 아니에요.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 이만큼 낸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는 믿음이 보배로워지는 거예요. 이게 이 말씀을 받을 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배롭게 하시고 우리의 삶도 거룩하게 바꿔주신다 그러니까 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뭐였냐면 우리의 삶은 안 바뀌어라는 거였어요. 아 예수님 벌써 왔다 갔는데 예수님이 내 삶에 무슨 영향을 미쳐 그냥 머리로 믿는 거지 우리 삶은 안 바뀌어 경건 에이 우리가 어떻게 경건하게 살아 우린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돼 그거 하느님 앞에 죄가 아니야. 왜 우리는 미천한 인간인데 이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베드로는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기 때문에 이 보배를 손에 쥐는 자는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 내가 미쳐라면 어때 믿음이 보배로운데 그러니까 이 거룩한 믿음 놀라운 믿음을 소유한 자는 삶이 이제는 변화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서 2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술을 알므로 은혜와 평강이 너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러분 은혜와 평강이 그동안 바울이 강조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바울이 강조할 때 은혜와 평강은 모든 사람들이 누릴 만한 그냥 일반적인 얘기였는 데 반해서 베드로는 거기에 하나를 더 첨가해요. 이게 뭐냐 주 예술 주를 암으로 암으로 동그라미 해보세요. 암으로 이것 이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은 그냥 아무나 받는 게 아니라 주 예술을 알아야지 받을 수 있어요. 근데 여기서 암이란 단어가 중요한데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피그노시스 이 말은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던 그냥 정말 철저한 지식 머리로만 믿는 그노시스랑은 달라요. 그노시스는 영지주의가 말하는 일반적인 지식이라면 에피그노시스는 더 명확한 지식이고요. 

이것은 그냥 하나님이 계시되 이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얻어내 얻는 확실한 체험이에요. 이게 에피 그노시스 알미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분은 예술 한 분이 있댄다라고 아는 것과 예수로 살기 위해서 내가 매일매일의 삶을 싸우고 투쟁하고 인내하고 그러면서 알게 되는 예술임은 전혀 다르다는 얘기죠 그러면서 알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얻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는 1번 받는 선물이죠. 죄 없이 죽으신 예스름으로 말미암아 죄인 우리가 죄 없다. 하시면 받는 것이 1번 받는 은혜고 평강은 에일의 뇌는 매일매일 받는 매일매일 얻는 하나님의 손길이죠. 그래서 이 카리스 은혜와 편강 에이레네는 1회적이냐 연속적이냐의 차이지만 그런 애가 좀 반드시 필요하죠. 

근데 이 2가지를 어떻게 얻느냐는 바울이 얘기한 적이 없어요. 근데 베드론 이야기합니다. 바로 에피그노시스 예술을 암으로 받는 것이다. 그분과의 삶의 연합 그분으로 사는 거 즉 어제 우리가 얘기하는 걸로 따지면 예수 중독이죠. 예수가 좋아서 예수 살다가 때문에 죽는 거 그게 이제 이 에피그노시스 주위의 수를 알모로죠 자 그래서 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자 노란색 들고 표시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모든 것 뭐에 속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즉 이제는요 내가 경건하지 못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에요. 아 내가 피조물인데 어떻게 경건해 난 그냥 사람인데 이런 말 할 수 없는 거예요. 왜 다 주셨으니까 다 주셨어요. 여기서 주셨다는 말은 뭐냐면 무상급식처럼 돈 받지 않고 줬단 얘기에요. 은혜로 줬단 얘기예요. 선물을 줬다는 거예요. 

받을만해서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로 주셨다 무엇을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머리로만 믿으면 안 되고 삶으로 믿어야 되는 거예요. 이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되는 거예요. 결단을 해야 되는 거예요. 왜 이것이 이것을 주신 분이 신기한 능력으로 줬기 때문에 신기한 능력 여러분 바울이 이 베드로가 베드로 후소에서는요 표현이 굉장히 정밀해집니다. 전선은 그냥 개념만 더 줬다면 후설은 굉장히 정밀해져요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 그리고 신기한 능력 또 사전에서 보면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하나가 굉장히 세밀해요. 왜 죽을 때가 되니까. 이제 순교를 앞두고 있으니까 굉장히 명확해져요 그의 믿음의 내용 하나하나가 굉장히 명확해지는데 바로 3절에도 모든 것을 주셨다는 거예요. 이미 받았다.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안 돼요가 아니라 경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는 3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일을 암으로 말미암입니다. 또 나왔어요. 에피그노시스 또 나왔어요. 암으로 동그라미 해보세요. 암으로 그래서 2절에 알므로 3절의 알무로 굉장히 중요한 단어예요. 그냥 머리로 왔는 게 아니라 삶으로 알아가는 것 근데 여기서 또 보시면 덕이란 말이 나오죠. 덕 덕도 없는 동그라미 해보세요. 덕 아레테란 단어인데 아레테 이 아레테가 베드로 후설을 관통하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예요. 덕 이 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탁월함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말이거든요. 덕 그런데 이 덕이라는 말이 단순한 믿음과는 다릅니다. 믿음이 머리로 믿는 거라면 덕은 삶으로 보여주는 거죠. 덕을 세운다 라고 할 때 그 덕이에요. 아레테 그러니까 이제 신앙이 성숙하게 되려면 예수님의 주구심과 부하를 머리로만 믿으면 안 되고 삶으로 그게 나타나야 되는데 그 나타나는 과정이 뭐냐 하면 아레테예요. 덕이에요. 

덕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4절입니다.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자 더 명확해지죠 보배롭고 지극이 큰 약속 이게 뭐예요? 복음이죠. 익수님이 주신 복음이죠.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즉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돼요.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게 지금 베드로 하고 싶은 말이죠. 그전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분을 확실히 알기 전에는 우리의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었을 것을 위해 살았어요. 그게 우리 모습이었어요. 그러다 죽을 것이 우리의 미래였어요. 그런데 이제 그런 우리를 누가 변화시켜요 예수의 보검이 그분의 덕으로 변화시켜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노란색 들고 표시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단순히 이제 우리를 죽을 자를 구원한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썩어질 정욕에서 건진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간신히 턱걸음을 믿는 구원만 얻는 천국 가스니 됐다. 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어 내 삶을 통해서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 교회 덕을 세우고 믿지 않는 자에게 내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되는 거죠. 여러분 이 일이 일어났어요. 안 일어났어요. 일어났어요. 그래서 이단의 시름하던 소아시아 교회들이 다시 일어났어요. 

일어나서 이때부터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지만 로마의 모든 흥청망청하는 이 활락의 세계가 더 깊어질수록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령한 덕은 더 높아졌어요. 더 높아졌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게 단순히 아멘 믿습니다만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뭐냐 5 6 7절입니다. 그 유명한 믿음 위에 쌓은 7가지 덕이에요. 이게 그냥 윤리적인 차원에 나온 얘기가 아니라 예수 믿는 건 삶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왜 그분이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게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어요. 자 5~67절 같이 했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 인내를 인내 경건을 경건해 형제 우애를 형제우애 사랑을 더하라 아멘 여러분 2단들은 뭐라고 말하냐면 5절로 끝이에요. 믿음의 로 끝이에요. 믿음 믿음 있으면 됐지 뭐 그런데 그 믿음 위에 아니 베드로 뭐라고 말해요. 덕이 올라가야 돼 믿음만으로 끝나면 안 되고 그리고 그 믿음에 덕이 들어가서 그 덕스러운 믿음이 필요해 자 거기에 지식이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식이 기본이 아니고 믿음이 기본이구요. 그 위에 덕을 더 세우기 위한 지식 에피그노시스 예술임을 더 명확하게 아는 게 필요하구요. 그 지식 위에 뭐가 올라가요 또 절제와 인내 경건이 들어가요 이건 뭐예요? 삶이에요. 이건 생각이 아니에요. 머리가 아니에요. 삶이에요. 절제 인내 경건 삶이죠. 

거기에 또 뭐가 들어가요 형제의 우애 마지막으로, 사랑까지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머리에서 머리로 믿던 교회에서 이제는 모든 삶이 충만해지는 교회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 시대의 이기적이고 세상적이고 세속적으로 타락하던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가 바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요. 근데 사순절이 잘못하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나 때문에 고난 받으신 예수님 굉장히 개인화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사순절은 어떤 날입니까? 40일을 묵상하다 보면 나 하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남아요. 너무 많아요. 그럼 뭘 생각하게 됩니까? 

아 그분이 나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위해 오셨고 우리 일터를 위해서 우리 사회를 위해 오셨고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구나 그럼 나는 뭘 해야 될까 아 나는 믿음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위에 덕을 덕의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 인내를 인내 경건을 형제의 우애를 형제의 우애의 사랑을 더 해야겠구나 나도 이제 그분의 오심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겠구나라고 내 삶의 변화까지도 다짐하고 내 삶의 변화까지도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덕과 성품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에요. 내가 행위로 믿어야지 그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너무 깊이 알다 보면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 있는 분이시군요.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내 삶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올 수 있는 그 길이 열리는 거죠. 그게 우리가 꿈꾸는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가려면 뭐가 필요해요. 먼저는 믿음에부터 시작해요. 믿음의 덕을 부터 시작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 첫 계단을 오르려고 해요. 믿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 믿음의 덕이 필요해 그리고 그 위에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 형제 우애 사랑 하나씩 쌓아가길 원해요. 그래서 내가 점점 예술을 믿어갈수록 베드로처럼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 중요한 사람 내 방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의 성품까지 내가 닮아 가는 것이 중요한 사람 그래서 내가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내서 나도 변하고 내 자녀도 내 주변 사람들도 함께 변화되는 거룩한 사순절을 우리가 보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베드로 호서를 시작합니다. 그 당시 수많은 이단들이 창궐했고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분은 실제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머리로만 믿으면 된다.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라고 하는 수많은 이단의 게임이 있을 때 베드로는 다시 한번 펜을 들고 그가 만났던 확실한 예수님과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그분의 보배로운 약속을 힘입어 우리도 보배로운 믿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예수림을 향한 에피그노시스가 있기를 원합니다. 더 확실한 믿음 내 삶을 통과한 거룩한 믿음이 우리에게 더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하셔서 단순한 머리로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말게 하시고 믿음의 덕을 덕의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 인내를 인내의 경건을 경건한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여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은혜를 우리 삶으로 고백하고 그를 통하여 주님을 증거하는 거루권 주혜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내일은 주일입니다. 저희들 잘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경건한 예배 주님이 받으심직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다시 한번 이 힘든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저희들이 다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온 기도 제목을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삶에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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