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베드로 후서 말씀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1절로 11절까지 말씀 같이 읽습니다.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제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예술을 알므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일을 암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 인내를 인내 경건을 경건의 형제 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에게 주시리라 아멘 베드로는 어찌보면 한없이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참으로 겸손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거듭나고 나서 정말 성형 세례를 받고 나서 그런 예루살렘 교회의 당연한 지도자 당연한 1인자 노릇을 하고 위세를 부릴 만도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다시 한번 박해가 다가오는 시대 죽음을 바라보고 있어요. 이제 떠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 베드로 전서에 이어서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된 목적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이제 떠날 때 어떤 유언을 남기고 가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우리가 잘 아시는 대로 10 4장 5장 6장 그 이 7장 이쪽에 대제사장의 기도를 사실 남기고 가지 않습니까? 베더러도 그런 심정으로 편지를 쓰는 거예요. 교회가 어떻게 존속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어떻게 거룩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래서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지요 베드로 전선은 교회가 세상 속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편지라면 이 두 번째 쓴 편지는 그러나 세상 속에 들어갈 교회가 어떻게 세상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인가? 에 관한 포인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요. 마치 배와 같은 것이죠. 배는 바닷속에 있어야 합니다.
항해를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배지요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바닷물이 배에 들어오면 가라앉고 말죠 교회는 세상에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세상이 스며들면 침몰하는 배 가라앉는 배처럼 교회도 순식간에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베드로는 교회가 교회 됨을 어떻게 하면 유지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그런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1절 2절 다시 읽습니다.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알무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러분 전석 기억하십니까?
베드로 전서에도 인삿말은 은혜와 평강이 많을지어다 그렇게 인사했어요. 그러나 오늘 이 후세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에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인사하면서 무엇을 통해서 더 많아져야 하는지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1줄 덧붙인 것이죠. 그걸 보니까 주 예술을 알므로 하나님과 우리 주의 예술을 알므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삶을 추구하는 신앙이에요.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 삶으로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자라가고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느냐 날마다 더 알아가느냐 날마다 더 정확히 바르게 알아가느냐 여기에 우리 신앙의 관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에서 잘 아는 대로 호세와 선자를 통해서 제발 하나님께서 하소연하듯이 나를 좀 알라 나를 좀 알아달라 제발 좀 그렇게 안타깝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호세아서 6장 3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에 나타나시면 새벽 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일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은 우리는 세상을 아는 데 집중하겠죠. 그리고 세상에 점점 마음을 빼앗기겠죠. 그러면 세상을 더 얻는데 하나님께 매달리겠죠.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은 초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오늘 베드로는 정확하게 우리가 은혜와 평강에 거하는 길 우리가 점점 더 많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길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술 그리스도를 아는 알면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영생은 하나님과 그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신이 넌 나를 알기만 하면 모든 게 된다고 얘기하라겠어요. 우리에게 끊임없이 헌신과 우리의 끊임없이 헌금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느님은 너희들의 돈을 가져와라 너희들의 무슨 재능을 가져와라 너희들 걸 다 가져와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나를 알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바르게 아는 것은 바른 관계를 가져옵니다. 바른 관계를 가져오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바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점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의 본질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은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죠. 구원 받아야 시작되죠. 그런 그러나 구원 이후는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그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인가? 어떻게 날마다 구원을 누리며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인가? 그게 성화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3절 말씀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시작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 영광과 더불어서 우리를 부르신 일을 암으로 말미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일을 암으로써 우리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죠. 여기 3절 말씀에 조금 마음에 걸리는 번역이 신기한 능력이라고 되어 있어요. 신기한 능력이라는 번역은 조금 잘못된 번역입니다. 사실은 여기 3절의 신기한 능력과 4절에 나오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할 때 신성하다고 같은 단어예요. 헬러론은 같은 단어인데 이 뜻은 거룩하다는 뜻이고 신적인 신성한 이게 맞는 번역이에요. 같은 단어를 이렇게 신기하다 신성하다고 번역을 해 놓으면 우리가 읽을 때 조금 혼돈이 오게 되죠.
어쩌면 앞에도 그의 신성한 능력 신적인 능력 영어 성격은 디바인이라고 돼버려 거룩한 신적인 그런 능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생명과 경건에 관한 능력이에요. 하나님 왜 부르십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성공을 약속하기 위해서 부르십니까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십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부르신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란 말이죠. 따라서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닮아가도록 주시고자 하는 것도 생명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 생명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경건의 능력이란 말이에요.
경건하게 살 수 있는 능력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자꾸 주님께 와서 달라고 보채고 조르지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 하나님이 그토록 주시고자 하는 것은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고결한 것을 주시고자 하지 우리가 원하는 가장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시고자 하는 분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 기도지 내가 원하는 것에 따라 기도하는 게 기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따라서 이 한국에 들어와서 기독교가 결국 기복 신앙과 어떻게 보면 토속신앙과 서양의 번영 신학과 아주 그냥 이것들로 잡동 쓰레기가 돼버린 거예요.
뭐, 뭐 목사를 무당으로 만드는 거 아주 그냥 이게 뭐 아주 그냥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임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냥 그냥 영적 지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뭐 무당 비슷한 사람들 찾아가서 그냥 계속 떼를 쓰는 거죠. 이거 풀어주세요. 이거 좀 주세요. 이거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러나 해결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에 늘 갈등을 일으킨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출발도 과정도 목적도 결과도 다 거룩해야 돼요.
우리는 뭐 개같이 벌어서 정성 같이 쓰자 예수인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우리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다 신성한 능력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에 관한 것 경건에 관한 것 그걸 다 주셨단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절 말씀을 읽습니다. 시작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하려 하셨느니라 지금 베드로가 이런 편지를 쓰는 까닭은 교회가 벌써 조금씩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예감케 하거나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교회를 다시 거룩히 하고 정결케 하기 위해서 이런 이걸 기억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느님과에서 관계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약속이에요.
하느님께선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을 구하는 것 그런 것들을 구하지 않고 신성한 성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 곳에 우리의 신앙에 초점을 맞춘단 말이에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떼를 쓰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 가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돼요. 우리는 예를 들어서 음악 하는 사람들은 베토벤을 닮아가고 싶고 쇼팽을 치면 쇼팽을 닮아가고 싶고 무슨 비겨스케이트가 되면 김연아를 닮아 가고 싶고 하는 이런 게 있잖아요. 우리 신앙은 누구를 닮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것 그게 우리 신앙의 목적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을 통해서 뭘 얻는 것 그게 목적이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님을 닮아갔더니, 예수님께서 구하셨던 것을 우리도 구하고 예수님께서 살아갔던 방식을 흠모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소망을 품게 되고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 세상과는 충돌하게 되지요 부딪칠 하게 되죠. 그래서 날마다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을 꺾고자 하는 것을 기도를 올려드리게 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따라서 베드로는 우리의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떤 것들로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얘기를 5절 6절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 인내를 인내 경걸을 경건해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라 여러분 여기 보니까 믿음에서 사랑으로 가요 첫째,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계속 반복되는 동사는 더 하라는 거예요. 이 더하란 동사는 충분히 지원하라 후원하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출발점을 보니까 찬양대를 갖다가 내 돈 내서 지원하는 걸 이 단어를 써요 찬양대를 후원하는 후원 비용을 내가 지불하는 것 그러니까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이걸 더 하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에다가 뭘 더 해야 돼요. 덕을 더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기초예요. 씨앗이에요. 거기에다가 덕이란 뭡니까? 덕이란 탁월한 인격이나 성품을 말합니다. 그분은 덕성스럽다 할 때 뛰어난 인품을 가지고 있단 뜻 아니에요. 그러니까 믿음이 인격을 더해야 된단 말이에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격을 빚어갈 것입니다. 누구를 아느냐에 따라서 우리 기인격은 달라지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암으로 그 부분을 믿음으로 우리는 덕을 더해 간다네 인격과 성품을 더하고 지식을 더하고 지식은 이 고상한 지식 아니겠어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고 절제를 더하라고 말합니다. 절제 믿음도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극단으로 치닫는 걸 이단이라고 말해요. 이단 믿음의 절제 지식의 절제 절제 인내를 인내하고 인내에다가 경건하고 경건의 형제 우애 예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다음에 형제 우애 이 형제간의 친밀감과 이거보다 더 중요한 마지막 골은 서로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할 때 아가페 사랑을 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가페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사랑 의지적인 사랑 그런 사랑을 더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믿음은 궁극적으로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사랑을 더 하지 못하면은 바른 믿음인지 우리가 한번 점검해 봐야 될 일이에요. 나는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데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 안 믿는 거죠. 예수님을 모르는 믿음이죠. 예수님을 안다면 우리가 내 감정은 좀 거슬릴지라도 형제를 사랑할 줄 알고 형제를 섬길 줄 알고 그냥 그냥 형제란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거예요.
뭐 자매도 마찬가지 서로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거란 말 그렇게 사랑을 더할 때 우리의 믿음은 바른 믿음을 지향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믿는데 싸운다 믿음으로 싸운다 아유 싸워야 할 대상이 따로 있죠. 자 8절 구절을 읽습니다. 시작 이런 것이 너에게서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위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이런 게 있어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또 게으르지 않는 것이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 거예요. 베드로는 이 지금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헬라 출신의 이방인들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편지예요.
그들이 정말 헬레니즘 속에서 다신교 속에서 유일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들의 삶은 금방 바뀌지 않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할 것인가? 여러분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빚어지지 않고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으면 그 신앙 무엇 때문에 갔겠습니까? 따라서 베드로가 그토록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토록 많은 에 잘못을 허물을 가졌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남을 통해서 그는 정말 당대에 있을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 사람 아니에요. 갈릴리 호숫가의 한 어부가 어떻게 이 땅의 모든 교회 영적 기초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같은 평범한 어부를 영원한 교회의 기초로 삼을 수가 있냐는 말이에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믿음의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 입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 하셨고 그에게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을 줌으로써 그런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믿음의 어떤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시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베드로를 보면 얼마나 큰 변화가 느껴집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그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감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을 통해서 우리도 베드로가 당대에 이렇게 했던 한 인생 가운데 이렇게 했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게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게 없는 건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자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왜 안 변합니까? 죄 가운데 붙들려 있으니까 맹인이니까.
멀리 못 보니까 10절 11절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적 언제든지 실종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그러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형제들아 더욱 힘써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만세전부터 창세전부터 택하셨습니다. 그 택하신 소명과 목적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실수합니까?
내가 누군지를 잊었기 때문에 우린 왜 그렇게 비굴해집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잠시 망각했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옷만 제가 하나 깨끗하게 입어도 이 옷에 안 묻히려고 정말 애를 씁니다. 넥타이에 걸핏하면 뭘 흘리지 않습니까? 이걸 안 흘릴려고 정말 조심해서 먹어요. 이 옷 하나를 깨끗하게 유지할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외의 옷을 거룩한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옷의 가치를 알면 그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입혀준 그 옷의 가치를 알면 우리는 더러움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단 말이야. 나를 더럽히지 않을려는 그런 노력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지 않겠어요. 뭘 할려고 애를 써서가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이죠. 새 옷 하나 비싼 옷 하나만 입어도 더러운데 안 갈려고 거리를 두는데 우리가 거듭났다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죄로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된단 말이에요.
그걸 주님께서는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이걸 알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 우리를 의예 길로 가게 하시는구나 이걸 깨달은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 베드로 후수를 다시 시작하면서 정말 교회가 지켜야 할 것 교회가 교회다움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오늘 베드로 사도의 권위 면을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출발하지만 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에 그리고 인내를 경건을 형제우애를 사랑을 날마다 더해 가는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행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나 구원받았으니 됐다.
이제 구원은 받아 놓았으니 어떻게 산들 어떠냐 천국 가는 건 티켓을 받았는데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받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가치를 알면 그 가치의 합당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동행하는 예수님의 가치를 알면 우리가 받은 거듭남의 가치를 알면 우리는 그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설혹 내 목숨을 잃더라도 그 가치만은 우리가 지키겠다. 그게 순교적 삶이에요. 꼭 어디 선교지 가서 무슨 순교하는 게 순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하는 삶의 태도 순교적 삶이죠.
거룩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삶 날마다 에 지식을 더하고 덕을 더하고 그렇게 경건과 인내를 더해가는 삶 그걸 우리는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이라고 말하고 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이루어 가는 성화의 우리의 삶을 목적을 다시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다시 추구해야 할 가치는 거룩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 2020년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올 한 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너희들이 더욱더 거룩을 회복하라 교회 본질을 회복하라 교회가 세상 속에 있지만은 세상과 닮지 말아라 세상을 따라가지 말아라 하는 주의 음성 듣게 하시고 결단케 해주옵소서 이 땅에 조국교회 위해서 온 열방의 교회를 위해서 교회 거룩함을 위해서 한몫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 교회를 향하여 유언을 남기듯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 시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리매김을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죄 음성의 귀를 우리가 세상 끝들에 마음 껴앗기지 않게 하시고 세상을 쫓아가느라고 분주한 시간 보내지 않게 하시고 이 코로나 시대에 잠시 정말 거리를 두는 시대에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고 일상과 거리를 두고 분주함과 거리를 두고 주 앞에서 잠잠히 머물러 주님의 형상구와 모양을 회복하는 시간들 되게 해주옵소서 교회가 분주한 사역을 내려놓고 바쁜 일들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시간 되게 하여주옵소서 하나님 그리하여 2021년에는 교회 교회 됨을 교회의 본질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그리하여 믿음 가운데 담대한 교회 본질을 선언하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소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우리가 거룩하라고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나 여아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화라고 하는 거룩의 본질이 세상에 어떤 가치보다 선행하는 가치 앞선 가치 더 소중한 지켜야 할 가치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교회를 이 땅 가운데 흔들어 정말 음해하고자 하는 사탄마귀의 괴개를 틈타지 못하게 하시고 끝까지 죽게 붙들린 끝까지 소망에 붙들린 교회가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향한 세상에 지탄을 듣습니다. 하나님 정말 다윗이 저주에 가까운 얘기를 듣고도 내버려 둬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를 저주하겠느냐고 얘기했듯이 교회를 향한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깨우고 우리를 회복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거룩을 회복하게 하시고 교회가 본질을 다시 한번 조 앞에서 분명히 드러내게 하시고 세상과 구별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거룩한 교회의 기초와 머리가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에 깨닫게 하심이 오늘 다시 한번 교회 거룩을 위한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들고 참된 교회 본질을 회복하기로 결단하는 이 자리에 고개 숙인 모든 진정한 교회 위해 믿음의 형제자매들 위해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언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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