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창고

[설교] 오바댜서 1편

yt1981 2024. 6. 18. 01:01
728x90

오늘 오베다 1장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응답받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바다는 1장밖에 안 돼요. 그리고 21절까지 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속에 참 많은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짧은 책이지만 정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이 오바디아는 1절부터 보시면 오바디아의 묵시라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오바디아라고 하는 이름이 우리에겐 좀 낯설잖아요. 어 오씨 성을 가졌는데 이름이 바디아예요. 뭐 이름이 참 뭐 이래 이럴 텐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의 종 이라고 아바드 섬긴다는 표현을 쓰거든요. 근데 아바드에 야가 붙으면 야가 하나님이니까. 

여호하니까 아바드의 야가 붙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오바디아가 되거든요. 명사형어로 오바디아인데 그래서 오바디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의 종 여호와의 종이란 뜻이거든요. 그래서 아주 일반적인 이름이고 우리말로는 굉장히 흔한 이름이 됩니다. 그런데 이 오베다의 룩시라 그랬는데 이 오베다가 누군지 정확한 뭐 그 당시 시대라든지 이 사람의 직업이나 부모가 누군지 지파가 어딘지 나오질 않아요. 그러니까 아주 흔한 이름이다. 아바드 섬긴다는 뜻의 오바데가 이름인데 주 여호와께서 애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랬죠 노란색 드시고 표시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하나님의 종이 지금 전하고 있는데, 에돔에 대하여라고 그랬잖아요. 

에돔 이 전반적인 내용이 이제 에돔의 멸망에 대한 내용인데 우리가 궁금한 것은 성경 주로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잖아요. 그래서 물론 주변 나라들은 얘기를 하지만 그 주변 나라들을 왜 다루냐면 하나님은 그렇게 주변 나라들까지 다 통치하시는 실질적인 주권자다라고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다루는 것이지. 원래의 본심은 원래 본 내용은 다 남유다나 북유스라엘에 대한 예언이거든요. 그런데 오바디야는 특별히 참 특이하게도 에돔이라고 하는 이방 나라에 대해서만 다뤄요 왜 그럴까 여러분 이 히브리 문학에서 성경을 비롯한 히브리 문학에서 에돔이란 말이 나오면 에돔을 에돔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아담이라고 읽기도 합니다. 아담 같은 말이거든요. 아담도 흙이잖아요. 

근데 에돔도 붉다는 뜻인데 뭐가 붉은가 흙이 붉은 거예요. 그래서 흙이 불다 아담이 붉으면 애덤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실 아담과 애덤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일부러 애덤을 아담이라고 의도적으로 읽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오바디아의 몫이라 주 여왕께서 에도메디아와 이와 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것을 우리가 이스라엘 식으로 읽으면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흔한 사람이 아주 평범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비전을 전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전했는데 무슨 말씀이냐 아담에 대한 즉 누구나 해당되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지금 전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주 평범한 사람이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바자가 에돔에 대하여 말씀함을 전하는 것 바로 이런 뜻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바자는 어찌 보면 특별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에돔은 특정한 지역 특정한 나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짧은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유가 뭐냐 보면 애덤만 나쁘고 애덤만 잘못됐고 애덤만 문제가 있어서 심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의 후예고 애덤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에돔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오바디아를 말씀을 통해서 에돔 나쁜 놈들 아 에돔 그렇게 하면 그렇게 사람들이 망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에돔의 모습 가운데 아담인 우리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멸망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연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자 일어날지어다 라고 하는 말이 쿵이거든요. 쿵 이것은 앉았다가 일어나란 얘기가 아니라 뭔가를 시작하란 이야깁니다. 뭔가 시작하는데 그 시작하는 것이 아주 의도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의도냐면 싸우자라는 거예요.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일으켜서 싸우자 하는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누가 애덤이 그런데 과연 애덤이란 나라만 그런가 하나님은 애덤과만 싸우시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는 모든 자들과 하나님은 싸우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이유는 왜 세상을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높임받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영광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신 분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을 어떤 때는 참 쉽게 생각합니다. 내가 어쩌다 보니까 교회 와 있는 거지 내가 뭐 불교를 믿었어도 잘 믿었을 것 같고, 내가 다른 걸 믿어도 참 열심히 믿었을 것 같은 나의 성실함과 나의 선함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를 갖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나의 취향이나 나의 습관이나 기술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따지고 보면 이게 사람의 지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뭘 가지고 있냐면 세상의 주권자는 나지라는 마음이 있거든요.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고 내가 모든 것에 판단의 가치중심이 나지 하나님이 영광받으신다 하나님이 중요하다 아니 하나님이 누군데 나는 1번 만난 적도 없는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고 그분이 세상을 인도한다는 것을 여러분 믿는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내가 좀 선하게 살아 살아볼려고 시장을 가졌다 내가 좀 우아하게 품위 있게 살아볼려고 기독교를 믿는다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체질상 본질상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가 이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은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은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는 은혜 그래서 우리가 한없이 약하고 한없이 죄인되고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내가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거죠. 이제는 이 고문서인 성경이 지금 나에게 살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온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그 마음속에 신앙이 자리할 수 없는 우리 마음속의 신앙을 주시고 반면에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싸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상 영적인 전쟁 영적인 전투를 계속 벌여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려는 것들마다 하나님은 싸우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이 땅에 찾아오는 것이 살롬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평강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면서 찾아온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심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죠. 그들이 이루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불호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오바디아 1장 1절입니다. 자 그러면서 이 에돔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 하나님 앞에 높아진 자들 이들을 어떻게 할 거였다고 마시냐면 2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자 이 말은 과거형으로 쓰였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 아주 작게 만들 것이고. 그래서 내가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과거형으로 쓰였어요. 이것을 예언적 완료 라고 말합니다. 예언적 완료형 이것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일인데 과거처럼 썼다는 거예요. 앞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인데 마치 벌어진 것처럼 그러잖아요. 우리가 누군가 이렇게 맘에 안 들고 싸울 때 야 너 죽었어 그러잖아요. 죽었어 죽었어라는 말은 과거형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뜻이에요. 내가 너 가만히 안 둘 거야라고 하는 미래의 의미를 담고 있죠. 의미는 미래인데 말투는 과거예요. 왜 이미 넌 죽은 거나 다름없다. 너는 이미 내 손에 넌 끝났다라고 하는 표현이잖아요. 그게 이제 예언적 완료죠 자 그러면 왜 이런 일을 당하는가? 바로 3전입니다. 

분홍색을 오랜만에 드시고 한번 표시해 보겠습니다. 분홍색으로 너의 마음이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이거예요.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여러분 이 말이 참 재미있는데요.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제일 방해되는 게 뭘까요? 제일 방해되는 건 뭐예요? 세상에 온갖 악한 것들이 나를 유혹합니까? 아니면 예수 못 믿게 내 친구들이 자꾸 술자리로 날 끌어냅니까 아니면 예수 믿지 않는 나의 배우자가 날 교회 가는 걸 방해합니까? 아니면 나 직장이 내가 교회 못 가도록 나의 일정을 안 좋게 짭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내가 신앙 생활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은 그런 것들 때문에 흔들리는 나입니다. 내가 제일 내 문제인 거예요. 내가 제일 대적인 거예요. 나의 신앙생활을 제일 방해하는 건 나입니다. 

결국 그 모든 문제들 때문에 계속 흔들리고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이 내 신앙의 가장 큰 방해거리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못 믿는 거예요. 나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나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것을 너무 잘 표현한 게 오늘 3절이에요.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는 거예요. 남이 너를 속인 게 아니고 남이 너를 신앙을 떨어뜨린 게 아니고 너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 그것이 곧 너를 속이고 있다. 즉 이 말을 우리에게 바꾸면 내 교만 나를 속이는 거예요. 내 교만 때문에 내 마음이 나를 속여서 내가 마치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마치 내게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교만은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을 미워해야 죄고 남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위해를 가해야 되고 아니면 간음을 해야 돼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요, 그렇지 않아요. 살인이나 간음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지만 성경이 언급하는 가장 큰 죄가 뭐냐 교만입니다. 교만이에요. 왜 그죠 여러분 사람을 미워하면요 그 마음속에 죄책감이라는 게 들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아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귀하고 더 내 마음을 돌아보게 돼요. 어떠한 죄도 다 죄책감이라는 거를 일으켜요 그런데 죄책감이 없는 죄가 있어요. 그게 교만이에요. 교만은 죄책감이 1도 없어요. 왜 죄책감을 가진다는 건 내가 누군가를 두려워하거나 누구를 경외하거나 섬겨야 되는데 교만은 그럴 대상이 없는 거거든요. 

내가 최고인데 내가 모든 걸 다 주관하고 내가 모든 걸 다 좌지우지해야 맞는 사람인데 내가 누구에게 죄책감을 갖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래서 교만은요, 유일하게 죄책감이 없는 죄면서 유일하게 대안이 없어요. 교만한 사람은 방법이 없어요. 그 사람을 깨닫게 할 방법이 없고 그 사람이 돌아오게 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차라리 정말 길거리에서 남과목살 잡고 싸움질을 한다 그러면 부끄러운 줄 알고 돌아옵니다. 술을 마시고 가정을 내팽개치고 온통 다 박살을 내고 여러분 그런 분들도 돌아옵니다. 누가 안 돌아오나 교만한 자는 돌아오지 않아요. 교만한 자는 내가 하나님인데요.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교만한 자는 하나님 필요 없어요.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죠. 입으로는 말씀도 전할 수 있어요. 입으론 전도하고, 입으론 사냥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내가 하나님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모든 것이에요. 여러분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 그런 모습이 참 많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 교회는 희망이 없어요. 더 이상 그 에게는 희망이 없고 더 이상 단체와 모임에는 희망이 없어요. 교회가 잘못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중심에 교만이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저는 정확히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된다. 왜냐하면, 교회가 커지면 거기에 있는 교만이 자리하기가 너무너무 쉽기 때문에 근데 교회의 교만이 들어오면 대책이 없어요.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하니까 이 말로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데요. 말로는 하나님이 다 했되 하나님이 여기까지 오게 하셨대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래 근데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내가 한 거예요. 

내가 만들었고 내가 여기까지 했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만들어 왔는데 그러니까 내가 떠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다는 거예요. 다 죽어도 다 망해도 내려놓을 수 없어요. 내 건데 교회 내 건데 교인 내 건데 교세 내 건데 어떻게 내려놔요 그러니까 교만이 자리한 교회는 암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자기만 복제하고 자기만 늘어나고 모두를 죽이는 암 덩어리가 된다. 그런데 이 교만이 과연 나에겐 없는가라고 하는 거죠. 교만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은혜를 몰아냅니다. 모든 은혜를 은혜 아닌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게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 지금까지 받은 모든 사랑과 모든 은총을 다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요. 다 배설물처럼 여기게 만들어요. 

왜 내가 잘났으니까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내 손으로 이루었으니까 그러면 모든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는 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하나님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죠. 결국은 내가 하나님 되는 것 그것이 교만이에요. 성경 66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가 될까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다 그런데 교만은요, 아니라고 말하는 거죠. 내가 주권자다 그래서 여러분 애덤의 죄는 애덤만의 죄가 아닙니다. 오늘 에돔의 멸망은 우리가 아 에돔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로망이 망했대 왜 망했어. 어 오바데라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대 아 그래서 망했구나 자 다음 이럴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모스를 9장까지 받고 이제 다음은 요나 아이고 요나는 참 우리에게는 친근하고 재미있고 얼마나 어렸을 때부터 들은 좋은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요나소 그러면 우리가 막 가슴이 뛰어요. 

야 큰 고래가 나오고 막 막 그냥 막 토하고 야 담에서 니는 왜가 나오고 다시스가 나오고 야 뭐 박롱쿨이 나오고 요나서에는 우리가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아모스도 지난 9장을 보면서 정말 사자가 포효하는 하나님의 음성 이야 되게 멋있다. 아모스 요나 어떻게 보면 미가 나홈 하바꼭 다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오바디아는 뭐야? 오바디아는 이름도 모르겠고 내용도 모르겠고 이건 1장짜리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 그런데 성경은 그냥 지나가도 되는 성경은 하나도 없다. 도리어 짧지만 이 짧은 책이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교만이 내 자신의 삶을 지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고 있 멀어지게 하게끔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를 지금 주저앉게 만드는 원인은 질병이 아니고 대적이 아니고 문제가 아니고 상황이 아니고 나라는 거예요. 나를 속이던 나 나를 망치는 나 나를 끌어내리는 나 결국 교만한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 그럼 왜 교만하게 되었는가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바위틈에 거주하면 높은 곳에 산다 여러분 에돔이 어느 지역이냐 하면 사해 남동쪽인데 사해 남동쪽이면 거기가 지금으로 가면 요르단 지역이에요. 요르단의 페트라라고 하는 유명한 지역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가보신 분들 많이 계실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가본 세계 관광지 중에 가장 좋은 곳을 꼽으라면 저는 페트사를 꼽습니다.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어디냐 그러면 아직 제가 가본 곳 중엔 페트사입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놀랍고 너무 경이로워서 인간이 이걸 만들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은 딱 그거 하나예요. 제가 콜로세움 했을 때도 별로였고요. 뭐 피사의 사탑도 별로였고요. 에펠탑도 별로였는데요. 진짜 깜짝 놀란 건 이 페트라였어요. 페트라는 예술인 당시에 만들어진 성이라고 해야 될까요? 요새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데 그것이 너무너무 좁은 협곡을 지나 아주 정말 말도 안 되는 협곡을 지나서 그 안쪽에 어 너무너무 거대한 성의 입구가 등장하거든요. 근데 이게 그 당시 에덤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놀라운 일이죠. 그 당시부터 이 길을 열심히 열심히 다녔어요. 

그 길의 이름이 뭐냐 왕의 대로입니다. 왕의 대로는 아프리카에서 팔레스타인을 지나 터키와 유럽을 잇는 길이에요. 이 길이 얼마나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길에 톨게이트가 바로 이 애덤의 수도인 세라였습니다. 그것이 페트라입니다. 거기가 톨게이트인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전 세계의 상인들이 그 길을 지나가지 않으면 대륙과 대륙을 연결할 수 없는데 그 길에 통행시간마다도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거예요. 그 페트라 지역을 말하기를 바위 틈에 거주하면서 높은 곳에 사는 자여 그 당시 무슨 성분이 무슨 속담이 있었냐면 이 페트라 지역 세라라고 하는 애덤의 수도는 12명만 지키면 된다. 이런 말이 있었어요. 12명만 있으면 그 지역을 딱 12명이 막아서면 어떠한 군대도 뚫을 수 없다. 그렇게 자신할 정도의 천연 요새였어요. 

너무 높고 너무 좁아서 어떤 군대도 뚫을 수 없는 천연의 요새 거기가 애덤이었고 그 수도인 세라였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우리는 바위틈에 거주하면서 우린 높은 곳에 살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못 건드려 라고 하는 거죠. 내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 하니 그렇죠. 누가 나를 끌어 내리겠어 누가 아주 교만의 극을 달리는 거죠. 자 그런데 그러한 교만이 과연 에돔에게만 있는 것이냐 아담인 우리에게는 없느냐는 거죠. 너무 많죠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라고 하는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니까 하는 거야라고 하는 나니까 이 정도 하는 거지 아무도 못할 걸이라고 하는 마음 우리에게는 그 마음이 있어요. 

근데 그 마음이 뭐 이게 대단한 죄야 아니요. 그것 때문에 망해요. 우리는 결국 그것 때문에 망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진심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깨닫지 않고 살지 않게 하는 바로 그 시작은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을 이겨내야 되는데 여러분은 교만의 실체를 알아야 되잖아요. 교만의 실체는 바로 아주 작습니다. 내가 이것만 아니면 이게 교만이에요. 내가 이것만 아니면 우리는 여기 하나에 다 걸려 있어요. 

내가 돈만 좀 있었으면 이렇게 안 살았을 텐데 내가 몸만 건강해져도 이렇게 안 살았을 텐데 우리 흔히 하는 말로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내가 이렇게는 안 살텐데 요런 여기 하나만 뭐가 걸리잖아요. 그럼 그게 교만입니다. 실은 그게 교만입니다. 내가 이것만 아니어서 내가 부모만 잘 만났어도 내가 이 일만 해결됐었어도 내가 이것만 잘 됐으면 말이지 이게 교만이에요. 문제는 그거 하나가 아니거든요. 문제는 그거 하나가 아쉬워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지 못하는 내가 문제거든요. 근데 우리는 자기가 문제라고 하지 않고 이것이 문제라고 말해요. 

내가 아내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 남편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 내가 그때 애를 낳을 때 몸이 망가져서 그렇다 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 내가 학교를 잘못 가서 그렇다 내가 이 지역사회에서 그렇다 그것만 아니면 나는이라고 우리는 말해요. 근데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의 모든 약함과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날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거예요. 이것만 아니었으면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 내가 지금 살아 숨 쉬며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고백하며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의 반댓말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반댓말은 교만입니다. 

교만하여 아무것도 나에게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아니 그렇게 믿는 걸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만을 사장님 어떻게 하실까요? 4절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자 독수리가 높이 날아오르면 얼마나 높이 높을까요? 게다가 별 사이에 깃들인다 이건 정말 우주적인 개념이죠. 그렇게 꼭대기로 올라갈지라도 니가 끝까지 갈지라도 어떡해요.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노란색 별거 표시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높아져도요 아무리 올라가두요 그곳은 하나님의 발등상도 못 됩니다. 아무리 올라가도 그곳은 하나님께는 까마득하게 낮은 곳이죠. 왜냐면,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수준에는 높이 올라갔어요. 

우리 수준은 높이높이 올라가서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곳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지요.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만났어요. 38년 동안 소망이 없던 병자를 만났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주셨죠 중풍에 걸려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환자를 만나 주셨습니다. 왜요 왜 그렇게 희망 없는 자들을 만났습니까? 가장 낮은 곳에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높은 곳에 도리어 다 가졌다는 곳에 도리어 부족함이 없다는 곳에 예수님은 1번도 가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까지 왔으니 됐어 아닙니다. 이것만 아니면 이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잘살았을 텐데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과 모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나의 연약함과 나의 최선 적성과 나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가 올라갈 때 저 높은 곳에 거할 때 우리를 끌어내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 낮은 곳에 거할 때 오직 하나님만 고백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 다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하시는 여호와 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한번 우리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만 섬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이길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계속 거리낌이 있어도 좋습니다. 해결되지 않아서 두렵고 떨려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새로운 길을 여실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시 한번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교만한 나를 내려놓고 연약한 나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쿵 일어나 하나님 편에 서는 하나님 백성 되기를 우리 하나님 원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안나님 오바디아라고 하는 가장 흔한 이름으로 에돔이라고 하는 모든 이들이 될 수 있는 그 대상에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 바로 교만 나는 아무도 못 건드려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하나님 그런 분은 없어 모든 것은 내가 했고 나니까 됐고 나니까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우리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교만을 하나님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만을 넘어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내 마음을 다시 돌아보고 내려놓고 회개하고 신앙의 새출발을 하기 원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바라보길 원합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술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피공로 의지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만 붙잡고 살기 원하오니 하나님이여 내 삶의 주권자가 되시고 내 삶에 은혜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나를 온전히 주장하사 내 모든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이하로도 주님만을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하나님만 기대하기를 소원합니다. 내일은 주일입니다. 저희들 은혜로운 예배를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내어드리고 모든 교만을 우리가 알아채고 회개하고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오니 오늘 이 시간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메 

728x90

'성경 66권 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오바댜서 3편  (1) 2024.06.18
[설교] 오바댜서 2편  (2) 2024.06.18
[설교] 베드로후서 1장 3편  (2) 2024.06.11
[설교] 베드로후서 1장 2편  (0) 2024.06.11
[설교] 베드로전서 1장  (1) 2024.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