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주의인데 이 시대에 우리가 종교 개혁의 정신을 완성하려면 성도의 삶으로 세상 속에서 이루어야 된다라고 확신합니다. 505년 전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기치를 걸면서 그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 로마 천주교 이 거대한 종교 세력이죠. 이 거대한 종교세력의 형식주의 그리고 종교가 오히려 우리의 자유함과 복음을 누르고 있는 것에 대항하여서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은 율법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눌림이 되고 율법이 군림하려는 것에 대항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선언을 했던 것이죠.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우리를 누르는 것은 종교 권력이 아닌 거 같습니다. 율법은 더욱더 아닌 거 같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세속이죠. 이 세상입니다. 이 세대의 가치 문화 이 세대가 우리에게 주어진 헛된 자유함 이런 것들은 오히려 진정한 자유함을 구속하고 우리를 짓누르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시대 종교 개혁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이 세상에 침투하여서 이 세상을 힘 있게 변화시키며 사는 일에 승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할 종교 개혁이라고 믿습니다.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이죠. 로마서의 충심절이라고 선포해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죽음에서 살아난다 이런 뜻도 있고 구원을 얻은 다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야 된다. 신실하게 살아가야 된다라는 말도 된다고 선포해 드렸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신실하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신실하게 살 때 선한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를 설교할 때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려라 이것이 성들의 삶에 적용될 때에는 로마서 12장 2절로 적용이 됐죠 로마서 12장 2절 우리 암송절인데 암송하자 그러면 하실 분이 있겠지만, 발동을 걸고 암송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본문을 같이 보고 그다음에 암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스 12장 2절 자막으로 보시고요. 우선 같이 한번 읽으면서 암송되는지 확인하십시다.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리시고 이 잠송합니다. 시작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2분 빼놓고 다 맞으셨습니다. 여기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 쪽으로 동화되어서 변화되는 거죠. 이 변화의 목적이 있는데, 변화의 목표 목적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겁니다. 이게 목표예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근데 그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고요.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그 열매 결과가 선한 것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것이고. 온전한 것인지 이걸 보면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어진다 바울이 요렇게 가르쳐 주는 거죠. 근데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분별되어질 때 선한 뜻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선한 열매를 맺는 겁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특별히 종교 개혁 주일날 베드로 전세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리라 이런 마음의 결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바리 로마서 12장 21절에서 한 말이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은 구호이므로 한번 구호 따라 하시면 좋겠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마귀가 조금도 겁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귀가 겁낼 수준으로 한번 크게 해보십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 마태복음에서 나는 너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라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어떤 방식으로 감동을 주냐면 누구든지 내 옳은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누구든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져가려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주고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동행하자고 하면 끌고 가는 거죠. 기쁘게 심리를 동행하여 주라 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죠.
이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근데 여러분 이 말씀을 실천해 보셨습니까? 실천해보신 결과가 어떻습니까? 악이 쉽게 물러서지 않을 때가 허다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1~2개의 선행에 감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른 뺨을 맞거든. 왼 뺨을 돌려대 보십시오. 요즘에는 왼 뺨까지 맞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 할 때 심리를 동행해 주면 그 선행에 감동되기는커녕 나를 아예 데려다가 자기 편한 대로 다 부려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으로 악을 이기는 게 쉽지 않은 세대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되는데 그래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성경의 말씀은 계속 우리에게 권면하는 거죠.
그래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종교 개혁을 이루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겁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좀 더 깊이 있는 내용들을 베드로 전설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베드로 존서가 어떤 책이었나요? 지난주에 베드로 전설을 다 읽으셨습니다. 이제 계시록만 2주 읽으면 성경통독이 끝나서 드디어 내 일생의 성경일독했다라는 분들도 생길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자 베드로 존서는 어떤 책이냐면요 적은 무리의 성도들이 거대한 세상에 흐름 세속의 문화 가운데 던져져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뜨겁게 변화되었는데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선행을 행해야 된다는 거죠. 선을 행하되 지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끝까지 악이 혹 선을 행하는 너희를핍박한다. 할지라도 그핍박을 이기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고 교훈해주는 것이 베드로 전서의 천체 이 메세지인 것이죠. 베드로 전서가 이렇게 강한 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은 초대 교회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책 1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이고요. 저자는 로드니 스타크 라는 종교 사회학자고요. 저희는 이 책을 발간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어 이 책이 최근에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더 많이 우리 성도들에게 알려진 책입니다.
너무 많이 알려진 것 같아서 저는 이 강단에서 오늘 처음 소개하는데 이 책은 요지가 이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 전서랑 같은 이 베드로 전서의 메시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건데 기독교가 1세기 때 아주 조그만 종교였잖아요. 참 몇 사람 믿지 아니하는 그런 무리였는데 4세기에 들어들면서 전 세계를 다 점령하는 이 세속 문화를 완전히 이기는 그런 종교가 됐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콘스탄틴이라는 황제가 개종했기 때문에 이렇게 보지 않고 기독교 자체 안에 이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 DNA가 뭐였는가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관찰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도 그 당시에 있었던 기독교의 원초적인 힘을 가지고 우리가 그 힘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종교 개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인 거죠.
5 꼭지인데 이걸 뭐 오늘 다다룰 수 없습니다. 여기에 아주 관련된 포인트만 탁탁 짚고 가겠습니다. 첫 번째 꼭지가 뭐냐면 당시에 로마 제국 안에 대도시에 가끔씩 역병이 있었습니다. 이 역병이 있을 때마다 많은 도시민들은 도시 밖으로 도망을 갔는데 기독교인들은 그 도시에 남아서 역병을 앓는 사람들을 돌보고 이들의 치유를 위해서 힘썼다는 겁니다. 이 두 번째 세 번째는 관으로 뛰고요.
네 번째도 요거와 비슷한 그 꼭지인데 165년 주후 251년 때 두 해에 걸쳐서 당시의 로마 제국의 엄청난 전염병 요즘 코로나 팬데믹 같은 코로나 팬데믹 같은 그런 인제 역병이 전염병이 로마 제국 전체를 공격을 해서 3분의1 정도 되는 인구가 사망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바로 그 시기에 기독교는 가장 믿을 만한 모든 세계 사람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어 기독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는 거죠. 2가지 면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첫째, 기독교가 제시하는 이 복음의 말씀이 왜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해야 되는가에 대한 답을 제대로 제시해 줬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믿는 사람들의 무리 공동체 곧 교회가 그런 역병이라는 상황 하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안정적이며 연결되어져 있고 이 사회에 모범이 되고 도움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서 결국 이 사회가 필요한 이런 성도들의 모임이 사회가 필요한 것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거죠. 네 번 다섯 번째 포인트는 뭐냐면 수많은 박해가 있었는데, 박해가 있을 때마다 성도들은 이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세상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결론이죠.
이 이야기는 베드로 전서의 중심적인 교훈과 일치합니다. 베드로 전설을 쭉 읽으신 분들 여러분 읽으시면서 아 이런 느낌을 가졌을 거예요. 베드로 전서 중간중간에 아 참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여기저기 기록이 돼 있구나 그러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선하게 살 건가 문제로 접목시키고 있구나 이렇게 베드로 전설을 읽으셨으면 졸지 않고 잘 읽으신 겁니다. 오늘 보면은 선을 행하라 열심히 행하라 라는 이 문맥 속에 소망을 갖는 송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기대하는 송도들의 모습이라고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본문은 15절에서 시작되는데 사실은 단락은 13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13절 눈으로 따라와 주시면서 보셔야 됩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오 여러분 선을 행할 때요 대충 조금 행하면 다른 사람이 그 선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선을 행하면요 대부분의 경우 그 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들의 삶에 한번 적용하고 우리들의 삶을 돌봐야 될 부분이죠. 그런데 14절을 보면 가끔은 가끔은 열심히 선을 행해도 힙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에 믿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상황에 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를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으니 두려워 하지 말라 라고 선포하는 겁니다.
그리고 16절로 이동해 보시면 그럴 때 포기하지 말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되는데 계속 선으로 악을 이겨야 되는데 그 방법에 대해서 16절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자 16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이런 선한 싸움을 계속 하는 성도들 가운데 특별한 덕이 하나 나타나는데 그게 소망이라는 겁니다. 이 소망을 품고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하는데 큰 유익이 있다라고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한 싸움 선행을 가지고 악을 이기는 것에 2 중요한 축은 그 선행을 계속하는 것과 소망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선포하는 거죠. 자 15절이 소망에 관한 구절입니다. 암송구절입니다. 아까 여러분 와서 12장 2절 너무 잘하셨는데 요 절도 암송하셔야 됩니다. 우선 잘 읽겠습니다. 집중해서 15절 읽겠습니다.
너희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가 소망을 품고 있다면 그 소망에 대하여 그 소망을 왜 갖고 있는가 이유에 대하여 질문하는 자들이 나타날 테인데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을 갖게 되는 가장 중요한 근본은 마음의 우리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에 그때 소망이 우리 가운데 생기기 시작한다. 이렇게 교훈하는 겁니다. 이렇게 뜻을 잘 파악하고 암송하면 암송이 잘 됩니다.
이제 여러분 오늘 설교를 마칠 때까지 이 말씀을 암송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데 다 하실 겁니다. 자 이 말씀을 인제 하나하나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소망은 극도로 물질적이며 조직화되고 다양한 가치를 갖고 개인주의적인 이 세대 사람들도 관심을 갖는 덕목입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꽤 오랜 기간 묵상 해봤어요. 이 시대에 이 세대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 제일 관심을 가질 게 뭔가 오래 생각해봤습니다. 사랑 우리 믿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특별히 무조건적인 사랑 이 세상에 관심을 많이 가질 것 같은데, 제 관찰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헬라 문화서부터 이제 고대 고대의 문화에서부터 4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첫 번째 사랑이 애정이죠. 스토르겔 라는 인제 단어로 표현되는데 에 이거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두 번째가 우정인데 필리아라고 그러죠 요건 형제애 같은 거고요. 그다음 세 번째가 에로스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네 번째가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이죠. 교회에서 말하고 성경이 말한 것은 아가페의 사랑인데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을 볼 때 그다지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 앞에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보면서 느낄 매력은 사랑 속에 있지 않을 것 같아요. 아 있다. 하더래도 그 영향이 줄어든 거 같습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도 믿음이 참 많아요. 여러분 지금 직장생활 하시고 세상에서 열심히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굉장히 중요시하는 게 신뢰성 아닙니까 누구든지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신뢰할 만한 사람이 돼야 된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을 떠나서도 신뢰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사실 한때 우리가 세상에 보여줘야 될 제일 큰 미덕은 기쁨이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어요. 세상에 없는 기쁨이 우리들에게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얼마나 이 미친 것처럼 기쁨 이 우리 기쁨이 아니에요. 세상의 기쁨은 뻔히라는 거죠.
그 즐거움 말초적인 즐거움을 쫓아다니는지 그리고 그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선 제일 중요한 가치가 되어 버려 가지고 기쁨 이런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별로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이민 목회할 때 아유 그 젊은 친구들 얼마나 뻔뻔이라고 그러거든요. 즐기는 거 그거 나쁜 거 아닙니다. 근데 너무해 너무 모든 게 그냥 펀이야 펀 모든 가치의 기준이 펀입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 과연 기독교의 기쁨이 매력이 될 수 있을까? 저는 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도 믿는 사람 속에서 찾을 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소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이 소망이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인제 깨닫게 되는 거죠.
왜 그렇냐 하면 세상에는 가공된 희망은 있는데, 진짜 소망은 없어요. 왜냐하면, 진짜 소망은 부활해서 생기는 거거든요. 진체 소망은 부하로서 생기는 건데 부활 빼고는 소망이 생길 수가 없는데 세상에는 부활을 알지 못합니다. 유튜브에 관해서 어떤 분이 조사를 했는데 유튜브가 뭐 요즘 대단하죠. 모든 배움은 유튜브를 통해서 갖는다 이래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여러분도 배움의 반절쯤은 한 유튜브를 통해서 갖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 유튜브에 올라오는 그 인제 올라오는 요 유튜브 건수의 특징이 있답니다.
조회수를 늘리려면 자극적인 이 타이틀과 자극적인 내용을 다루어야 된대요 그러니까 별것도 아닌 것 같고, 큰일 났다 뭐 이렇게 망하게 되었다. 뭐 이런 에 뭐 이런 것들을 이렇게 타이틀로 써야 조회수가 많이 생긴댑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이 관찰은 뭐냐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관찰은 뭐냐면 사람의 이 의식 가운데 가장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게 죽음인데 근데 이상하게도 유튜브 올라오는 이런 그 올라오는 것 중에 죽음에 관한 게 참 적대요 상대적으로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타픽을 피하고 산댑니다. 여기에 소망이란 것이 얼마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지를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 마음의 말씀을 따라 결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망의 사람이 되자 소망의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자 이 마음의 결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결단 안 가지신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저는 그냥 소망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소망을 뿜뿜 뿜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마 이런 마음을 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을지 우리가 잘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 전서가 가르쳐주는 소망은 보통 소망보다 조금 특이한 표현으로 이 소망이 표현되고 있는데, 이 소망이 어떤 소망이냐면 1번 산소망 2번 죽은 소망 몇 번입니까?
네 산소망 산소망 다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일장 3절 같이 한번 자막을 보며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극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앗아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소망이 아니라 산소망이었습니다. 왠지 아시죠.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 돌아가실 때 베드로가 제일 크게 실수했잖아요. 3번 예수님을 부인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어떤 제자보다도 마음이 찢어졌던 사람이 베드로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기뻤던 사람이 저는 베드로였을 것 같애요. 그때 그때 베드로가 가졌던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갖게 된 소망을 베드로는 그냥 소망이라고 표현할 수 없어서 산소망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 산 소망을 우리가 갖고 있을 때에 소망의 매력이 있는 성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마음 가운데 이 바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소망으로 매력있는 사람 되리라 이 세상 사람 베드로 전사가 말하는 이 세상 사람은요,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연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에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하나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약한 그리스도를 보고 놀라는 거 그 안에서 뭔가 부러운 것 이게 뭐냐면 소망이라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이런 소망을 꼭 갖는 행복한 성도 되시기를 주안에서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소망을 갖고 있으면 특별히 산소망을 갖고 있으면 그 소망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가르침의 하일라이트예요. 자 15절 다시 한번 암송해야 되니까. 보시면요 너희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그다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 이유를 뭐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고 요 부분을 집중 하셔야 됩니다.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고 다 중요한 단어가 됩니다. 특별히 준비하는 게 제일 중요한 단어입니다. 첫째, 정말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어서 소망의 내력을 뿜뿜 뿜어내려면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 그게 내 안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거죠. 여러분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대답할 것이 있죠. 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소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볼 때 나는 무슨 답을 할 것인가? 이게 준비되어 있으셔야 됩니다. 저는 준비가 꽤 잘 돼 있는 것 같애요. 여러분도 그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겠죠.
소망에 대해서 물어보면 생명에 대해서 오늘 베드로 전설 읽은 것처럼 부활에 대해서 부활의 산소망 얘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 그래서 나는 산소망을 가졌다 이렇게 베드로가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 소망 그럼 부활 이렇게 우리가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좀 쉽게 정리해 드리려면 여러분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요, 마지막에 대해서 자신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 대해서 자신 있기 때문에 이 땅을 살아갈 때 그게 매력이 돼요.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끝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소망의 매력 중에는 참다운 인내가 거기 담겨 있어요. 꼭 필요한 인내 담겨있습니다. 마지막이 어떤지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 알았을 때 그러니까 소망은 반드시 마지막과 연결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사실과 연결시켰을 때 소망에 관한 바른 대답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대답할 것을 준비해 두라 그랬는데 이 준비해 두는 게 이게 사실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준비를 얘기합니다. 저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분명히 물어주시면요 그것도 겸손한 태도로 목사님 목사님 보니까 참 평안해 보입니다. 소망이 있어보입니다. 그 소망의 이유가 뭡니까? 그러면 저도요 온유하고 겸손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형제님 자매님 소망은 이러이러한 겁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애요. 여러분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뭐 가끔 버벅대시는 분도 있겠지만, 근데 이 준비하라는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보면요 질문이 이렇게 간단한 질문이 아니에요. 겸손하게 다가와서 정말 관심을 가지고 당신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물어봐. 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예상하지 않았던 질문 방식이 본문에 2가지가 더 담겨있습니다. 하나씩 차례로 보겠습니다. 첫째는 소망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데 잘 들으셔야 돼요. 말로 질문하는 게 아니에요. 삶으로 보여달라고 질문하는 거였는데 이걸 말하지 않아 지켜보고 있어요.
어 믿는다 그러는데 예수님을 안다고 그러는데 저 사람 속에 정말 소망이 있다고 그러는데 그게 진짠지 가짜인지 살짝살짝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에도 그 사람에게 삶으로 대답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있느냐 이 질문입니다. 여러분 되어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이게 소망의 매력이 있는 사람 진짜 매력인 멋있는 사람들이에요. 베드로 전서는 지금 이 얘기를 여러 차례 거듭 얘기하고 있어요. 베드로 전서의 큰 맥락이 뭐라고 말씀드렸냐면 적고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거대한 로마 제국의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 정말 복음의 그 능력이 있는 건가 라는 질문에 그럴 수 있다 라고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 보면 여러 구절이 있지만 1구절 같이 보겠습니다. 3장 오늘 본문 앞으로 보면요 3장 1절 2절입니다.
본문 3장 1절과 2절 삼장 1절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믿는 아내들이 믿지 않은 남편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믿지 않는 사람 믿지 않는 남편을 어떻게 믿게 만들 거냐는 거예요. 남편에게 순종하라 근데 당신은요, 어쨌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어요. 순종 안 할 길이 없었거든요. 그 당시 로마 모나이는 근데 또 순종하래 이 상징으로 보셔야 돼요. 이 가르침 속에 뭐가 담겨 있냐면 약한 자를 대변하는 게 아내예요. 강한 자를 대변하는 게 남편이에요.
그러니까 약한 자가 강한 그리스도인이 로마 제국을 어떻게 복음으로 뒤흔들 건가 그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순종하라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치 않고 그 아내의 무엇으로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라고 얘기하고 자 2절은 같이 읽어야 됩니다. 2절 읽겠습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는 경결한 행실을 봄이라 여기 본다는 말을 인제 눈여겨야 되는데 본다는 말은 그냥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슬쩍 보는 거예요. 슬쩍 저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 그러는데 어디 제대로 행하고 있나 슬쩍 보는 거야.
슬쩍 보는데 그때에도 야 행실이 괜찮네 어느 날 탁 봤는데 그때에도 행실이 괜찮네 어려운 상황에 보니까 그래도 소망이 있네 그걸 보면서 진짜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수준까지 대답할 것을 준비해 두어라 라고 본문이 요구하는 겁니다. 또 1가지 경우는 뭐냐면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시면 이제 3자를 자꾸 보면서 15절을 자꾸 보면서 암송하셔야 되는데 자 한번 15절 또 이제 암송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십시다.
시작 너희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대답할 것 여기서 대답은 언어를 보면 아폴 로기아라는 말인데 그 변증학 뭐 이런 것에 해당하는 단어예요. 까 이거는 그냥 쉽게 물어보는 말에 내가 편안하게 답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흠을 잡으려고 물어뜯으려고 폄하하려고 생각을 무너뜨리려고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저에게도 어떤 분은 질문할 때 정말 공손하게 질문한 분들이 있어요. 1번입니다.
그러면 참 저도 답하기 쉬워요 근데 어떤 분들은요, 공격적으로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목소리부터 달라요. 표정도 달라요. 제가 가끔 쓰는 대로 목사님 딱 이러면서요 시작부터 아주 그냥 싸우자고 이렇게 하시던 분들이 있어요. 근데 그들에게도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거예요. 어쩌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향하여 대답할 준비는 내용으로 무엇을 답할 거냐보다는 온유와 두려운 마음을 늘 가지고 준비되어 있느냐 이것이 관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는 내용을 준비하려는 것보다는 태도 온유와 두려움이라는 태도 특별히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그 태도 이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세상을 향한 대답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런 성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제 오늘 말씀을 빨리 정리합니다. 소망을 이렇게 가질 때에 가장 근본적이 되는 게 우리의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서 나를 다스리는 절대 인물이 되는 거죠. 이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그를 하나님 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생기는 소망 이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자들에게 때로는 온유하고 정확한 말의 내용으로 두 번째는 삶으로 세 번째는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자들조차도 다른 소망의 이유를 알 수 있는 성숙함으로 이렇게 답할 것이 준비되어있는 매력적인 소망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주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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