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 3장 13절로 22절까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권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권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권한받는 것보다 나으리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어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어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어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8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편이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군이라 그는 하늘에 오러서 하나님의 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아멘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고통스럽고 어렵고 힘든 것은 왜 선을 행하는데 고난이 또 오느냐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 뜻대로 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어려움이 파도처럼 몰려오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정하면은 모든 일이 잘 풀려야 마땅한 것 아니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면 당연히 권한이 안 와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또한 신앙의 길을 가면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왜 저런 악한 자들은 저렇게 하는 일마다 잘되고 저렇게 눈두덩이가 붙도록 잘 먹고 살이 찌고 목에 힘이 가고 저렇게 살 수 있냐는 거예요. 도대체 저렇게 악이 방치되는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는 질문들을 누구나 하게 되고 끊임없이 그런 질문 가운데서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베드로는 오늘 우리 서신설을 통해서 왜 우리가 의로운 길을 가는데도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 아니 왜 의로운 일을 갈 때 당연히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3절 14절이에요.
시작 또 너희가 열심으로 손을 향하면 누가 너희를 헤아리오 그러나 이를 위하여 권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가 열심으로 손을 향하는데 누가 너희를 해치겠느냐 이건 질문이 좀 뜻밖이죠. 그러면 선을 열심으로 행하면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않습니까? 우리를 음해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궁금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존재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겠죠.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온다면은 그건 복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거야.
마땅히 받아야 할 권한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고 의로운 길을 가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올 때는 그건 섭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그래 그럴 때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두려워 말고 근심하는 사람처럼 근심하지 말라 세상은 고난만 오면 두려워요 믿음이 없으면 고난만 오면은 근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실 이 말씀은 이사였으나 시편에 있는 말씀의 부분 인용 내지는 그 메시지를 다시 잘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50장 구절 말씀을 보면요 보라 주 여호와께선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제할 자가 누구냐 하나님께서 도우시면은 누가 나를 정지하겠느냐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시편은 어떨까요? 시편 시편 말씀을 보면은요, 10편 56편 다윗의 시에 보면은 4절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성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까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그런 다윗이죠. 그리하였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더니, 혈욕을 가진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 모든 것은 사실은 두려움 때문에 더 큰 문제죠 사람들이 쉽게 손을 놓아버리거나 패배하는 까닭은 일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낙심 좌절 절망감이거나 이걸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이에요. 우리는 어떤 싸움에 그냥 실력이 없거나 능력이 없어 지는 게 아닙니다. 먼저 두려움에 지고 의심으로 지고 불신으로 지는 거예요. 여러분 절대 안 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길 때까지 하는 사람 이기는 거죠. 아프리카 부족들은 절대로 기도가 응답 안 된 적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니까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온대요 1년이고 2년이고 드리니까 그런 끈질김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믿음의 길이란 뭐 1~2번 해보고 뭐 포기하는 것 3~3번 해보고 안 하는 것 그게 우선 믿음이에요. 그건 확률의 게임이고 가능성의 게임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실 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할 수 있는 일을 두려워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보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지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문당한 사람들 감정을 이렇게 증언을 들어보면 정말 어느 수준을 지나면 통증을 못 느낀대요 뭐 때리는 건지 고문을 하는 건지 거의 실신할 정도로 가버리면 그래서 그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오히려 고문하는 사람들은 조심한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그 선을 넘기면은 고문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온다는 거예요. 참 슬픈 얘기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 뜻을 꺾고자 하는 무수한 유혹들이 있었고, 실제 끔찍한 기록들이 있지마는 고모는 사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끔찍한 박해도 신앙을 꺾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조건 없는 용서였지 사도 바올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본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리고 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난 이후에 그런 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이 진실된 사랑이고 조건 없는 사랑일진대 어떻게 누가 우리를 그 사랑해서 빼앗아 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아주 외신을 하나 보니까 어머니가 딸을 빼앗겼는데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데, 기어이 가서 그 딸의 복수극을 벌였더라구요. 여인의 힘이 대단한 게 아니라 사랑의 힘이 대단한 거죠. 사랑하는 딸을 정말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서 본인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그런 뉴스가 있는데, 사실은 뭐 그런 얘기들이 종종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사랑하게 되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사랑은 허다한 두려움을 허물을 내어쫓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드한 허물을 가려주기도 하지만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왜 두렵습니까? 안에 사랑이 없어 그렇다는 거예요. 왜 우리가 용기가 부족합니까? 사랑이 없어서 그래요. 자꾸 용기를 가지려고 애를 쓰지만 용기가 안 생기는 걸 어떻게 해요. 그러나 정말 사랑하면 용기가 생긴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일어날 제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면 버리는 거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덜 사랑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지. 용기가 없어 그게 아니에요. 용기는 다 없어요. 인간 다 비겁합니다. 누가 진실로 사랑하느냐죠 진실로 사랑하면 십자가까지 가는 것이죠. 15절 16절이에요.
신작 너희 마음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왜 선한 사람들이 또 고난을 받느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거룩하게 하고 그렇게 고란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그 소망이 뭐냐 도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사느냐 보통 사람 같으면 다 죽고 말았을 때 너는 뭘 붙들고 사는 것이냐 하고 그 까닭을 묻는단 말이에요.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다니니 우리가 점점 거룩하게 되고 그리스도 때문에 점점 우리가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붙들고 그 소망을 산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면은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럴 때 반드시 묻는 자가 있어요. 또 혹은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꼭 상담을 요청합니다. 밤에 니고데모처럼 찾아와요. 야 1번만 만나자 내 얘기 좀 들어줘라 한번 좀 얘기 좀 나누고 싶다. 그런 사람이 반드시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가 뭔지를 묻는 사람에게는 항상 대답할 준비가 되죠. 이때 대답하다라는 건 이거 사실은 선명하다 뭐 변호하다 변증하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변정 불신자들에게 신앙을 변정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희 교회 성도 가운데 항상 이 성경을 보고 준비하시는 분은 처음에 몇 번 이 가까운 분들한테 질문했는데 답을 못 한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뭐 이런 흰소리 같은 질문에 제대로 변변히 대답을 못 한 게 너무 챙피하기도 하고 또 화가 나기도 하고 하니까 준비를 철저히 하고 계신 분이 있어요. 항상 준비하는데 근데 이때 할 때 뭘 하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거예요. 영어로 보면 젠틀리스가 돼 있는데, 점잖게 해야 돼 부드럽게 해야 돼 저는 좀 사납다고 이렇게 소문이 난 것 같은데, 사나우면 안되고 온유하게 해야 되고 그다음에 두려움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이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그런 경외심을 갖고 있어야 그 경외감은 반드시 표현됩니다. 사람을 딱 한눈에 볼 수 있는 방법이 경외감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태도는 눈빛이 다르고 말투가 다르고 행동거지가 다른 거예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걸음걸이가 다릅니다. 정말 참 놀랍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러분 선한 양심이라고 하는 흔적도 좀 찾아오기 어려워요 그걸 양심에 화인 맞았다.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양심의 마비된 양심이라 이 뜻이에요. 지금 이 시대는 양심이 마비된 시대입니다. 그게 그들의 양심으로 어떻게 일깨우겠어요. 기준이 없는데 본 바가 없는데 여러분 보고 자란 게 없으면 그걸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어요. 어릴 때 보고 배운 바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이 사회에 지금 양심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깨워 세우는 까닭은 그 마비된 양심을 그나마 충격을 가하기 위해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 것 이게 우리가 남은 자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깨우는 양심이에요. 어쩌면 시대의 죄악을 그들의 얼굴에 다시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자 내 죄악을 보라 이 거울을 보고 그런 뜻에서 선한 양심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막 욕하던 사람들이 거울을 보고 아 부끄러움을 수치심을 갖게 돼야 된단 말이에요. 지금 이 시대는 수치가 없잖아요. 뭐 어디를 보나 어느 나라를 보나 수치심이 사라진 사회 아니에요. 뭐가 부끄러움 뭐가 부끄러운데 다 그게 당당한 것처럼 얘기해요.
그게 왜 부끄럽니 다들 그러고 사는데 예 그러나 여러분 남의 물건을 훔치는 99명이 기준이 아니라 남의 물건을 보고 손대지 않는 1사람이 기준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을 곳곳에 두신단 말이에요. 그게 죄악을 비추는 거울이에요.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는 거울이란 말이에요. 또 오늘 베드로는 또 재미있는 말을 하죠. 17절이에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인데 악을 행함으로 고난 갖는 것보다 나으니라 어차피 고난은 봤습니다. 자기 잘못해 가지고 고난 받는 것 예 내가 무슨 뭐 악을 행하다가 고난받는 것보다야 선을 행하다 고난받는 게 낫지 않겠냐 재미있는 표현 아니에요.
기왕 매를 맞더라도 잘못해서 매를 맞는 것보다는 착한 일 하고 매를 맞으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 아니냐 그런 얘기죠 우리가 어차피 이 세상은 고해입니다. 불교에서 말할 때 고해 고통의 바다라는 거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뭐 고통의 바다라는 말을 안 쓰지마는 그러나 이 세상에 고난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고난은 파도처럼 닥쳐옵니다. 지나갔다고 이제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난의 파도타기를 즐겨야지 고난의 파도타기를 두려워하면 결국 빠져가고 마는 것이죠. 또 우리가 뭐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 또 물에 빠지면 또 가서 또 타고 또 타고 기어이 그 파도를 타고 넘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사는데 우리도 뭐 그런 진짜 바다에 파도타기는 못할망정 이 고난의 파도타기는 할 줄 알아야 이 세상을 이겨낼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는 즐거워하라 기뻐하라 의인에게 상이 크도다 예수님께서 그 얘기 아니에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에 하늘이 저희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금 너희들 선지자들도 그랬고 믿음의 선배들이 다 그런 고난을 겪었고 그래서 우리가 고난받는 걸 너무 갈등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 왜 내게는 이런 고난이 왜 내게는 이런 고난이 그런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면 고난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지 않겠어요. 18절 19절입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어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어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어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게 참 이게 인제 18절 이하가 어려운 이른바 해석하기가 어려운 얼핏 우리가 깨닫기가 어려운 본문들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는 사도 베드로가 하고자 하는 말에 문맥을 잘 살펴야 돼요. 왜 지금 예수님이 권한을 가지고 나왔냐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시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가 고난받는 게 뭐가 이상하냐? 예수님과 1 되어야 할 1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믿음의 이 결단 그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받는 게 그리스도가 권한받았는데 뭐가 이상하냐?
그 얘기를 하는 게 베드로의 기본 입장이라는 것을 우선 이해하고 들어야 된단 말이에요. 근데 예수님께서 왜 의인으로서 불의를 대신하셨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은 영어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부활에 이르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 몸만 죽고 몸은 죽고 역만 사셨냐 그분은 부활하신 독특한 몸으로 살아나신 거예요. 역만 살았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하셔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문을 잠그고 있는데, 문 잠겨있는데도 불구하고, 쑥 들어오셨어요. 그리고는 도마에게는 내 손을 만져보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육신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아닙니까 십자가의 흔적과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 몸을 보여주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마리아가 무덤에서 만지려고 했을 때 내 몸은 아직 만지지 마라 그런 표현을 쓰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육체로는 죽임을 당했지만, 육체로는 온전히 죽었지만 인스피릿 성령 안에서 그분은 다시 부활하셨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해석해야 되고 또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영으로 가셔서 그분께선 부활하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다 곧 요 뒤에 있는 것과 연결이 돼 있어요. 옥에 있는 영들이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이렇게 묻지 않겠어요. 자 20절 이하입니다. 시작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8명이니라 그 옥에 있는 영들이란 누구냐니까 노아의 날 노아의 방주 노아의 홍수를 비유로 든 거죠.
노아의 방조란 심판이 임했을 때 심판이 임했을 때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 단순히 노아의 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기 위해서 그냥 자기가 기어이 심판의 길로 뛰어든 자들을 말한단 말이에요.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노아의 방주를 거절했던 자들처럼 기어이 구원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에 그자들을 근데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이 많으냐 구원을 받은 자가 소수란 말이에요. 노아 때는 겨우 8명 노아의 부부와 세 아들과 세자부 며느리만 구원 8명만 받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노아의 방주는 세례 표시다 세례 얘기를 들고 나오죠. 자 21절 22절입니다.
시작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편이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군이라 잠깐 여기 보면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표다 이 홍수가 내린 것은 노아의 방주가 구원받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 아니에요. 홍수가 없으면 방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대홍수가 없으면은 방주를 갖다 그 큰 방주를 산 중턱에 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긍께 물이 이케 임한다는 것 대홍수가 임한다는 것은 구원의 표시란 말이에요. 심판은 곧 구원을 부르는 표시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심판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있는 옥외 그 지옥의 주님께서 내려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이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었다 그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들에게도 연옥에 가서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캐톨릭적 시각이고 이게 성경적 시각은 그들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가 아니라 승리를 선포하셨다 이 말이란 거예요. 구원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구원의 승리를 승리자로 나타나셨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죠. 자 22절입니다. 시작 그런 하늘에 오러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회복하셨다는 뜻이에요. 빌리버스를 보면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취하지 않고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다시 승귀 돌아가셔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셨다 그리하여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다 그 권세에 복종하고 있다.
그 얘기란 말 자 그런 분이 우리의 주님 되시니 그분과 함께 우리가 연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단 말이에요. 세례란 세례 그 자체가 능력이 아니라 세례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자 하는 믿음의 결정이 구원을 이르게 하는 거란 말이에요. 물만 몇 방울 뿌렸다고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그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할례만 받았다고 구원받았다고 믿는 그런 유대인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 물 몇 방울이지마는 그 물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같이 내가 경험하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 부활 생명과 연합하고자 하는 결정 그 결단이 그 고백이 구원에 이르게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 부활의 생명으로 이 고난의 시대를 이겨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때 온유와 겸손으로 대답하고 늘 우리는 변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나 그 어떤 말의 변정 입술의 변종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행실의 변정 우리 삶의 변정 우리 믿음의 행위의 변종이 된단 말이에요. 따라서 지금 베드로가 우리에게 간곡하게 얘기하는 것은 이 베드로 전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이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이 얘기죠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도 이 세상 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게 여러분 오늘 17절 말씀에 중요한 얘기 아닙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이 정말 선을 행하다가 고난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악을 행하다가 고난 받지 마시고 기왕 이 땅 가운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정말 말세 이 끝 시간을 살아가고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데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다가 고난 받을 일이 1~2가지가 아니지만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을 행하다가 고난받는 하루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받는 하루 그리고 주님의 뜻 가운데 꿋꿋이 서 있다가 고난 받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좋겠지만, 있더라도 그 고난을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세상 살아가다가 반드시 환란을 겪겠지마는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에 선언과 선포가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리기를 축복합니다. 같이 기도 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사실 주님 저희들도 때로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을 행하던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반드시 이루리라 과신 그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낙심의 자리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믿음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하였사오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오 주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소리 높여 외쳤던 바올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믿음에 걸음을 걷습니다. 광야를 걷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도움은 위로부터 오는 것임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겠습니다.
우리를 돕는 손이 어디서 올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만 도움이 온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오니 주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한번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할 수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옵소서 내 힘으로 내 정신으로 못 갑니다. 주님 가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내 능력이요. 내 힘이 아님을 주님께 고백하오니 주님 손을 붙들어주옵소서 때로는 업어주옵소서 때로는 우리를 품에 안고 가셔 주시옵소서 주님 그리하여 우리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주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을 때는 안식하게 하시고 다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땐 일어나게 하셔서 주의 길 끝까지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권한 받는 것이 선한 일을 하다가 권한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니 주님 권한에 대해서 갈등하지 않겠습니다.
선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 주님 의로운 길을 가다가 겪는 고난을 당연히 여기고 그리고 상급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 진정한 그리스인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고난의 끝을 보여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고난의 끝자락에서 우리를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고난의 끝을 기꺼이 달려가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에 충만하게 하심이 오늘 말씀대로 다시 한번 악을 행하여 고난 받는 것보다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다가 권한 받기를 결단한 이전에 고귀 숙인 모든 믿음의 사람들 참된 의인들 위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다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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